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7화 (7/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7화>

7. 성실한 나라의 루카(2)

3주라는 시간이 바람에 먼지가 날리듯 사라졌다.

50번 개척지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 나와 클리프는 마주 서서 칼을 뽑아 든 상태였다.

클리프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번에 내가 이기면 2연승이야.”

“반대로 이번에 내가 이기면 승률이 반반인 것도 알지?”

“그래, 이긴다면 그렇지. 바로 시작하자.”

“좋지.”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손에 쥔 검을 더욱 꽉 움켜쥐고서 상대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바싹 마른 황무지. 직선으로 내리쬐는 햇빛과, 건조한 바람에 펄럭이는 코트 자락.

약간의 정적이 흐른 뒤, 황량한 풍경 속에서 두 남자의 여덟 번째 대결이 시작되었다.

대검이라 부르기에는 조금 민망한, 날조차 서지 않은 거대한 쇠몽둥이를 늘어트리고서 클리프가 돌진했다.

그에 비해 내 무기는 날렵한 생김새의 녹슨 곡도. 정면 승부로는 칼이 닿자마자 부서지리라.

“후읍.”

숨을 들이마시며 두 개의 오러홀을 자극했다.

심장과 단전에서 빠져나온 두 줄기의 오러. 가볍게 발을 구르자 몸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정면으로 쏘아졌다.

그림자 검술의 정체성은 속임수와 속도에 있다. 빠른 속도를 이용해 적을 현혹하고 치명적인 일격으로 마무리.

검술의 근간인 속도만 따지면 훨씬 강한 상대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적을 만났는데 속도에서 밀린다? 그러면 뭐 무릎 꿇고 싹싹 빌어야지.

후웅!

대검이 코앞에서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걸려들었어. 내가 다리를 땅에 박고 멈춰 서자 잔상이 스르르 펼쳐졌다.

쇠몽둥이는 잔상의 머리 부분을 스치며 지나갔고, 나는 상대의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거대한 무기는 초근접전에서 자유롭게 다루기 힘들다.

타이밍을 놓친 클리프가 다급하게 뒤로 물러섰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완전히 틈을 파고든 곡도가 허리를 노리고 움직이는 순간.

주변의 공기가 멈췄다.

이어서 [예리한 감각]이 미친 듯이 경종을 울려 댔다.

익숙한 주인공의 기술. 서둘러 잔상을 뿌리며 위치를 벗어나자 클리프의 기술이 간발의 차이로 발현되었다.

파아아앙! 땅이 파이며 돌조각과 땅거죽이 비산했다.

마치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자욱하게 일어난 흙먼지에 나는 혀를 찼다.

‘진짜 위력 하나는 끝내주네.’

속도만 빠를 뿐이지, 그 이외에는 모두 클리프가 우위에 있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다. 온갖 주인공 특전과 검성까지 대동한 게임의 진짜 주인공이니.

그래도 상대의 특성을 잘 아는 이상, 못 이길 정도는 아니지만.

황토색 연기가 가라앉고 남자의 실루엣이 드러날 무렵.

클리프의 두 번째 기술이 펼쳐질 전조 현상이 일어났다.

자연스럽게 펼쳐지던 흙먼지가 순식간에 바람을 일으키며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다.

클리프의 대검.

그것을 중심으로 휘몰아치는 바람이 뿌연 안개를 가르고 참격이 되어 날아왔다.

‘온다.’

쿠과과과!

지면을 거칠게 할퀴며 진격하는 무형의 기운.

굳이 저 공격에 정면으로 맞설 필요는 없다. 나는 그저 그림자의 방식으로 임할 뿐.

서늘하고 날카로운 기운이 오러 회로를 타고 질주한다.

영웅 등급의 감지 특성, [초감각]조차도 마비시키는 잔상.

신형이 여러 갈래로 나뉘며 그 존재감마저 희미해졌다. 미끄러지듯 참격을 피하고 지면에 바짝 붙어 내달렸다.

오른쪽? 왼쪽?

실체가 마구잡이로 뒤섞여 감각을 마비시키자 클리프가 긴장한 듯 자세를 고쳐 잡았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부족하다. 결국에는 저 밸런스 파괴자에게 다가가야 하니까.

이기기 위해서는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

“앗!”

턱! 발끝에 돌부리가 걸리며 잔상이 일거에 사라졌다.

내가 균형을 잃고 지면을 향해 키스하듯 고꾸라지자, 클리프는 약점을 포착한 맹수처럼 대검을 앞세워서 달려들었다.

“2연승이다!”

승리를 점친 클리프가 함성을 내지르며 기뻐했다.

이거 어쩌나, 넘어진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인데.

나는 몸을 그대로 둥글게 말아 낙법을 펼치며 굴렀다.

순식간에 균형을 되찾고 몸을 쭉 뻗으며 검을 내지르자, 우리 국밥이는 임기응변으로 대검을 바닥에 꽂아 칼끝의 경로를 막았다.

응, 못 막아.

그림자 검술 1번, [잔상 꿰뚫기]

직선으로 움직이던 곡도가 기이하게 뒤틀렸다.

복부로 향하던 칼끝은 뱀처럼 휘며 대검을 지나치더니, 곧바로 수직으로 꺾여 클리프의 턱을 노렸다.

스릉. 목울대에서 멈춘 곡도.

나는 검을 회수하고서 당당하게 승자의 권리를 주장했다.

“아~, 쉽다.”

“아니, 이건 사기잖아. 정정당당한 결투 아니었어? 이제 막 연기도 하네.”

“칭찬해 줘서 고맙다. 꼬우면 아시죠?”

클리프는 손을 부들부들 떨며 애먼 땅바닥을 발로 찼다.

그러다가 뭔가 생각났는지 손가락으로 날 가리키며 소리 높여 말했다.

“너, 그 마지막에 기술은 언제 익혔냐. 저번 결투 때까지는 안 썼잖아.”

“좀 됐지. 설마 그런 비기를 아무 때나 사용하겠어?”

[잔상 꿰뚫기]는 검술의 등급이 올라가며 생성되는 액티브 스킬이다.

이를 연동 스킬이라 부르는데, 따로 능력치를 올려 주지는 않아도 숙련도는 검술과 연동되기에 따로 수련하지 않아도 되었다.

“으으으. 나중에 두고 보자.”

클리프는 흔한 악당의 도주 대사를 날리며 언덕 한구석으로 사라졌다.

나지막하게 ‘스승님, 잠은 자게 해 주세요.’라는 혼잣말이 들렸지만,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설마 대결에서 졌다고 밤새도록 수련을 시킬까.

‘내가 져 줄 수도 없는 일이고.’

[스킬: [한손 검 입문]의 스킬 등급이 ‘B’가 되었습니다. 근력+1, 체력+1]

숙련도가 꽉 채워지자 스킬의 등급이 올라갔다. 그리고.

E등급 94.45%

나는 대결의 승리로 4퍼센트가량 오른 [그림자 검술]의 숙련도를 살폈다.

일반 등급인 [한손 검 입문]과는 다르게, 확실히 전설급 스킬은 숙련도도 몇 배는 더디게 오른다.

그만큼 성능은 다른 스킬과 비할 바가 안 되니.

검술의 숙련도를 높이는 법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검술의 정수가 녹아 있는 ‘그림자 검무’를 수련하면 된다.

두 번째는 검술을 사용해 적과 싸우면 된다.

당연히 상대를 이겨야 숙련도를 팍팍 올려 주니 절대로 질 수는 없다.

아니, 애당초 클리프가 스펙은 훨씬 좋다. 내가 그걸 미친 노가다로 간신히 따라잡고 있는 거지.

업무와 먹고 자는 시간을 쪼개서 하루에 12시간씩.

3주 동안 죽어라 검무를 수련하고, 스탯 노가다도 하고.

틈틈이 연공법에 클리프와 대련까지.

진짜 잔상뿐만이 아니라 분신이라도 생겼으면 좋겠다.

눈물 나는 노오력 덕분에 주인공과 엇비슷한 속도로 성장 중이었으나, 한 가지 크나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오러 조루증.

두 개의 오러홀을 사용하는 탓에 타 검술에 비해 빠르고 강한 위력을 낼 수 있었다.

반대로 그만큼 많은 오러를 사용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결사단 놈들은 엘릭서를 퍼먹으면서 성장하니 별 상관이 없었지.’

애당초 이 비전 검술은 결사단의 최고 엘리트들을 위한 것.

엄청난 지원을 받으며 수련하는 금수저에게는 최고의 검술이란 소리다.

클리프의 [부르고스 검술]도 오러 소비가 많은 게 단점이지만.

걔한테는 검성이 붙어 있잖아.

스킬 등급이 올라갈수록 오러 요구량은 늘어만 갈 테니, 슬슬 오러를 뻥튀기할 수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리고 이놈도 계속 쓸 수는 없고.’

나는 손에 든 낡은 검을 바라보았다.

클리프의 대검과 내 곡도는 모두 무기고에서 처박혀 있던 걸 가져다 쓰는 중이었다.

황무지의 주 무기는 총이고, 검이나 둔기는 그저 기호에 따른 부무장일 뿐.

개척지에서는 이런 나사 빠진 무기만 구할 수 있었다.

●[오래된 사브르]●

분류: 한손 검

등급: 일반

내구도: 16/30

공격력: 35(-10)

관통(물리/마력): 5/0

효과: 근력+1 민첩+2

설명: 곡선 형태의 기병용 외날 검. 오랫동안 관리를 제대로 받지 못해 상태가 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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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내구도도 간당간당한 상태.

하지만 개척지 내에서는 이보다 더 좋은 검은 없다.

이거 이외에는 시스템에서 모두 고철로 분류할 정도니 말 다 했지.

‘진짜 파밍이라도 해야…… 참, 여기서 남동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거기가 있지 않나.’

레드넥의 소굴.

그곳은 무역 연합에 반대하는 무법자들의 마을로, 온갖 물건이 거래되는 암시장이다.

유저에게는 좋은 파밍용 던전이고.

자체 무장도 꽤 좋은 데다가 오크의 영역과도 가까워서, 원래라면 게임 중반부에나 갈 수 있는 곳이다.

내 오러 조루증을 해소해 줄 엘릭서. 황무지에서는 씨가 마른 희귀 등급의 검.

이외에도 온갖 물욕템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것도 공짜로!

‘어차피 공식대로 게임 중반부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잖아.’

이대로라면 주인공 옆의 절친1로 있다가, 대악마의 스테이크용 신선육이 될 터.

목숨을 걸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면 응당 지옥 문턱까지는 가 봐야지.

* * *

보안관보의 주 업무는 치안 관리다.

치안 관리의 기본은 위협 요소를 제거하는 것. 내부에서 개척민이 소란을 일으키면 총으로 침묵시키면 그만이다.

그러나 위협 요소란 내부, 외부를 가리지 않는 법.

나는 그런 숭고한 의미에서 말을 타고 외부 순찰을 돌고 있었다.

일단 대의명분으로는 그랬다.

“야, 여긴 개척지에서 너무 떨어진 거 아니냐?”

다그닥, 다그닥.

뒤에서 말을 탄 클리프가 걱정된다는 어투로 말했다.

확실히 개척지에서 많이 벗어나긴 했다. 저기 개척지 건물이 작은 점처럼 보일 정도로.

이상하게 게임에서 있던 미니 맵이 여기에는 없다.

레드넥의 소굴로 가려면 미리 길을 익혀 놔야 할 터.

“그러니까, 너는 언덕에서 수련하라고 했잖아. 저번처럼 쉽게 끝나고 싶지 않으면.”

“아오, 승률은 반반이거든!”

“뉘에, 뉘에. 그러시겠죠. 저는 그럼 조금 더 달리겠습니다.”

나는 K-게이머의 말빨로 클리프를 골려 준 뒤, 개척지 더 멀리 말을 몰았다.

인마, 그만 가라고!

뒤에서 소리치는 클리프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게임의 풍경과 비슷해도 황무지란 곳은 원래 거기서 거기다.

바위랑 고목, 듬성듬성한 잡초 등등. 이정표로 삼을 만한 기물은 극히 드무니까.

물론, 뉴비나 어정쩡한 고인 물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

‘음, 대충 길은 알겠네.’

처음에는 조금 헤맸으나 괜히 내다 버린 3000시간이 아니다.

최초의 방향만 유추할 수 있다면 그 이후는 쉽다.

게임에서도 레드넥의 소굴은 미발견 지역. 유저는 정보를 수집해 스스로 암시장을 찾아내야만 했다.

어느 정도 주변 지형을 익혔을 때.

[스킬: [승마술]의 등급이 ‘D’가 되었습니다. 체력+2]

벌써 등급업이 될 정도로 숙련도가 올랐나?

[나는 전설이다]의 숙련도 2배 효과로 스킬 등급 업이 무척 빨라졌다.

전설급 스킬이 존버용 장기 투자라면, 다른 스킬들은 스탯 노가다용 단기 투자.

성장 잠재력은 낮아도 내실을 다져 주니 여러 스킬의 숙련도는 여러 스킬 골고루 높여 두는 편이 좋았다.

‘능력치가 오르는 건 항상 옳은 일이고.’

레드넥의 소굴로 가는 길은 알아냈으니 이제 남은 난관은 3개다.

우선, 이 개척지에서 벗어날 정당한 방법이 필요하다.

거기에 레드넥의 소굴에 잠입할 수단과 다시 돌아올 구실도 마련해야 했다.

“야야! 이 이상으로 나가면 탈주라고!”

딱 맞춰 클리프가 알려 준 대로.

보안관보도 계약으로 묶여 있기에 무단으로 개척지를 벗어나면 현상범이 된다.

나는 고삐를 당겨서 말을 천천히 멈췄다.

진짜 현상범이 될까 무서운 것은 아니고 여기가 목적지였기 때문이었다.

이쯤이다. 50번 개척지를 통째로 집어삼킬 놈들이 잠든 곳이.

내가 정지한 곳은 잡초 한 포기조차 나지 않은 불모지 그 자체였다.

“휴, 그래도 현상금 걸리는 건 무섭냐.”

클리프는 타고 온 말에서 내려 나에게 다가왔다.

이상한 기운을 느꼈는지, 그는 주위를 빙 둘러보며 불안의 근원을 찾으려 애썼다.

[초감각] 성능 확실하네. 내 감각에는 아무것도 안 걸리는데.

“무섭긴, 경치가 좋잖아.”

“이 허허벌판이 좋다고? 나는 뭔가 등골이 으스스한데. 좀 불쾌한 느낌도 들고.”

“참나. 오크들도 없어서 좋구먼. 또 뭐가 그렇게 불쾌한데?”

나는 안 믿는 척 주인공의 감각을 시험해 보았다.

그러자 우리의 인간 탐지기, 클리프는 이 일대 전체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주변 전체가 좀 그래. 이만 돌아가자.”

50번 개척지는 좀비 군집의 공격에 쑥대밭이 되었다.

모든 사람이 먹이가 되거나 짓밟혀 죽었고, 몇몇 소수의 사람만이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좀비 군집은 현재 클리프가 가리킨 땅 아래에 잠들어 있다.

즉, 클리프의 육감은 정확하게 좀비 군집의 위험을 경고하는 것이었다.

나는 친구의 뜻대로 말머리를 돌렸다.

이로써 판은 모두 짜였다. 레드넥의 소굴로 갔다가 복귀할 수단까지 모두 정해졌으니까.

판게아의 튜토리얼.

50번 개척지에 덮칠 거대한 악몽을 이용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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