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6화 (6/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6화>

6. 성실한 나라의 루카(1)

“루카?”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아, 미안 다른 생각 좀 하느라.”

“뭐가 그렇게 심각해? 책이 마음에 안 드는 거야?”

검술서가 마음에 안 드냐고?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이 검술은 클리프가 익힌 [부르고스 검술]과 같은 ‘전설’ 등급의 검술이니까.

문제는 이 검술의 주인이 거대 암흑 세력이라는 것.

스킬북에도 나와 있는 고대 결사단은 황무지를 제외한 전 지역에 세력이 분포되어 있다.

이곳에서만 활동할 거라면 큰 위협은 안 되지만, 게임을 진행하다 보면 이들과 맞닥뜨리게 될 터.

‘게임에서는 클리프의 검술이 폰허부의 것인 걸 알고서 바로 죽이려 했었지.’

고대 결사단의 주인, 요검의 펠리스.

그녀는 아득히 먼 선대 스승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거대 세력을 꼬라박은 또라이다.

심지어 그 복수는 결사단의 세력이 모두 괴멸할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최후에는 주인공 버프가 걸린 클리프에게 심장이 뚫려 죽었고.

“인마, 왜 말이 없어? 이게 그냥 낙서 같아 보여도 엄청 심오한 뜻이…… 있을 거야.”

“아니, 아니야. 검술서는 마음에 들어.”

최악의 빌런이면 어떠하리.

전설급 검술이 어디서 솟아나지도 않을뿐더러, 게임 초반에 얻어 낼 방법도 전무하다.

어차피 원수의 제자는 클리프지, 내가 아니잖아?

게다가 나는 그 이름의 무게감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결사단을 쓸어버린 게 수십 번은 될 텐데. 내부 정보도 빠삭하게 기억하고 있고.

오히려 뜻밖의 선물이라면 선물이다.

무엇보다 전설급 스킬의 생성 특전도 무시하기는 아까우니까.

“검술서는 잘 읽어 볼게.”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네. 그 검술에 필요한 오러 연공법도 알려 줄게. 아, 오러 연공법이 뭐냐면.”

클리프는 불과 몇 시간 전에 학습한 따끈따끈한 내용을 신나게 떠들었다.

판게아에는 크게 3개의 에너지가 존재한다.

마나, 마기, 에테르.

에테르는 신앙심을 통해 발현되며 성기사나 사제들의 신성력 강화 용도로 쓰인다.

마족이 사용하는 모든 능력의 원천이 되는 검은색 기운, 마기는 일반 동물을 거대 메뚜기와 같은 마물로 만드는 사악한 힘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인간과 정령들이 사용하는 마나. 주로 무술가나 마법사들이 사용하며, 생명체의 근원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에너지이다.

여기서 오러란, 마나를 고도로 압축하여 심장이나 단전에 저장한 푸른색 기운을 말한다.

오러 연공법은 오러를 모으는 방법론.

이는 마나를 고리로 만들어 가능한 한 순수한 황금색으로 저장하는, 마법사들의 마나 연공법과는 궤가 조금 다르다.

마법사는 순도.

무술가는 압축.

마나를 축적하는 방법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스킬도 구분이 생긴다.

나의 경우에는 전설급 검술이 생겼으니, 무술가 타입을 기본으로 깔고 성장하는 편이 좋았다.

“잘 들었지?”

“응.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면 돼?”

“나를 따라서 자세를 잡아 봐.”

클리프는 가부좌를 틀고서 눈을 감았다.

평범한 명상 자세다. 나는 그와 똑같이 자세를 잡고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눈을 감고 내가 이끄는 대로 마나를 움직이면 돼. 알겠지? 어떤 일이 있어도 자세를 유지해야 해.”

“알겠어. 그런데 이거 괜찮은 거지? 선생님, 초짜 아니죠?”

“숙달된 조교니까 괜찮아.”

눈을 감고 명상에 든 나의 등에 클리프의 손바닥이 닿았다.

게임 설정에는 마나를 잘못 다루면 폐인이 되거나 몸이 터져 죽는다던데.

그런 걱정이 들기 무섭게 무형의 기운이 신체 내부를 뚫고 들어왔다.

“커헉!”

아프다. 예전에 치루 수술을 한다고 척추에 마취 주사를 맞았던 고통과 똑같았다.

그 불쾌하고 끔찍한 기억이 재현되다니.

“자세를 그대로 유지해. 내가 주입한 오러에 몸을 맡기는 거야.”

클리프의 외침이 들렸으나 몸이 말을 듣지는 않았다.

이거 정말 죽겠는데? 단순한 고통을 넘어 신체가 기운을 부정하는 느낌.

다행히도 [침.착.해]의 효과 덕분에 나는 가까스로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설마 오러와 검술만 아는 또라이 검성이 실패하겠어?’

약간 무섭기는 하네.

그래도 이 걱정은 기우였는지 폰허부가 다루는 기운은 거침없이 나아갔다.

내부로 파고든 오러가 두 줄기로 나뉘어 움직였다.

하나는 심장에서 시작해 상반신을 돌아다녔고, 다른 줄기는 단전을 한 바퀴 돌고서 하반신에 회로를 새기며 나아갔다.

상반신과 하반신이 불타는 것처럼 고통스럽다.

나는 이를 악물며 이 지옥을 견뎌 내야 했다. 이윽고 예민해진 감각이 모두 정돈되었을 때.

[능력치: ‘오러’가 개방되었습니다.]

[스킬: [개조: 그림자 연공]이(가) 생성되었습니다. 오러+30, 근력+3, 민첩+3, 체력+3]

[특성: [예리한 감각]이(가) 개방되었습니다.]

[[예리한 감각]의 효과로 주변 지역의 특이 사항이 감지됩니다.]

[특성: [나는 전설이다]이(가) 개방되었습니다.]

[[나는 전설이다]의 효과로 숙련도 상승치가 200%로 변경되었습니다.]

“푸후, 쓰읍! 푸하아아!”

거친 숨소리를 내며 마른 흙바닥을 뒹굴었다.

식은땀이 이마와 귓바퀴, 볼을 타고 무수히 흘러내렸지만, 나는 그것들을 신경도 쓰지 않고 바로 스킬의 내용을 살폈다.

‘으랴아아아!’

★[개조: 그림자 연공]★

분류: 무술가 액티브

등급: 전설

숙련도: F / 0.0%

설명: 명상을 통해 단전과 심장에 있는 오러홀에 마나를 압축하여 축적한다. 연공 중에는 모든 회복력이 상승하며, 204분 연공에 오러 능력치가 ‘1’만큼 상승한다. 누군가의 솜씨로 연공법이 개조되어 오러 획득량이 일정량 늘어났다.

> 명상 60분당 : 숙련도 +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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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문제는 없었다.

금쪽같은 두 개의 특성도 생겼고, 오러 능력치도 무사히 생성되었다.

그런데 그림자 연공 스킬은 내가 알던 그림자 연공 스킬과는 달랐다.

이름 앞에 개조가 붙은 것도 그랬지만.

‘……더 좋아졌어?’

내가 알던 그림자 연공보다 더 좋아졌다.

보통 F등급을 기준으로 전설급 연공법은 오러를 240분당 1씩 올려 주는데, [개조: 그림자 연공]은 산술적으로 원래의 [그림자 연공]보다 15퍼센트의 상승 효과를 받았다.

‘이야, 역시 모든 유저의 스승 폰허부!’

나는 재빨리 검술도 스킬창에 등록해 보았다.

[스킬: [검귀식: 그림자 검술]이(가) 생성되었습니다. 민첩+5, 체력+3 근력+1]

낙서처럼 그려진 검무 동작이 머릿속에 그대로 새겨졌다.

팔의 움직임, 다리의 배치, 검을 뻗는 동작과 타이밍 등등.

무술의 정체성이 두루뭉술하게 뇌에 각인되는 느낌이었다.

‘아쉽게도 검술까지 강해지진 않았나 보네.’

검술까지 더 강해졌으면 금상첨화였을 텐데.

하지만 전설급 검술을 얻은 것만으로도 대단하니 여기서 만족해야지.

* * *

꾸아아악, 꾸아아악.

상공을 날아다니는 괴조의 울음에 눈꺼풀이 저절로 걷혔다.

오늘은 첫 출근 날, 나는 낡은 침대에서 일어나 반쯤 깨진 거울로 안면을 살폈다.

루카의 외모는 전형적인 서양 미남을 닮았다.

갈색 머리카락에 검은색 눈동자를 제외하면, 정말 큰 특징도 없이 무난하다.

보통 엑스트라 NPC들은 특징이 없이 잘생겼고 예쁘니까.

‘그래도 못생긴 게 아니라 다행이지.’

나는 사무소에서 보급받은 옷을 입으며 나갈 채비를 했다.

셔츠와 코트, 웨스턴 스타일의 모자. 추가 능력치는 없으나 게임 초반에는 자주 입었던 복장이다.

조금 거북한 점은 이 옷이 주인보다 오래 살고 있다는 것. 중고인 것도 모자라 전 주인은 이미 요단강을 넘은 후였다.

이거 설마 저주가 걸려 있지는 않겠지?

짧은 기도를 마친 뒤. 옷을 걸치고 가죽 벨트와 부츠, 그리고 보안관보 배지까지 착용하자, 완전히 서부 영화의 엑스트라 총잡이가 되어 있었다.

‘엑스트라는 아니야, 엑스트라는.’

다시 정정해서 서부 영화의 신출내기 보안관보가 되어 있었다.

나는 방을 나와 녹슨 열쇠로 개인실 문을 닫았다. 그리고 옅은 밤색 목재 복도를 지나 아래층으로 갔다.

“어머, 그렇게 입으니까 완전 보안관 같으시다.”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반쯤 내려왔을 때.

계단 아래에서 빨래 통을 들고 가던 여급이 인사를 건넸다.

“보안관 같다니. 어엿하게 개척지의 보안관보로 채용된 분에게. 아침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번에는 카운터에 서 있던 남자 관리인이 나를 바라보며 정중히 물었다.

“먹고 갈게요. 식당에서 기다리면 되죠?”

“예, 금방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먹고살려고 이 짓 하는 건데, 아침밥을 굶으면 수지가 안 맞는다.

나는 1층 로비에서 오른쪽으로 난 공간에 들어왔다.

판게아의 큰 지역 중 하나인 ‘황무지’는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를 많이 베꼈다.

여기는 50번 개척지의 유일한 여관으로.

가끔 상인이나 여행자들이 머무는 장소이자 보안관 숙소로 사용되는 곳이다.

상태는 대한민국의 시골 민박집 이상으로 후졌지만, 개인실에 따뜻한 아침 식사라니.

정말 최고…….

“오늘은 삼눈박이 알 프라이에 땅굴쥐 소시지, 그리고 양상추 샐러드입니다.”

물론, 식재료는 대부분 황무지의 괴물들이다.

나는 달걀보다 두 배는 큰 삼눈박이 알 프라이에 쥐 고기를 먹었다.

이름은 좀 징그럽지만 그래도 맛있다. 이곳에 온 이후로 먹은 음식 중에서는 최고였다.

음식을 위장에 밀어 넣으며 몇 없는 장식품을 둘러보았다.

그러던 와중에 벽면에 설치된 한 회사의 로고가 눈에 들어왔다.

위트니 컴퍼니.

50번 개척지를 건설하는 데 모든 비용을 지불한 기업이다.

이 여관도 위트니 컴퍼니의 소유다.

개척지를 보호하는 자경단에 급료를 주고, 장비를 지원하는 곳도 그곳이다.

원래는 나와 클리프도 회사 소속의 노동자였지만, 영감님의 은덕으로 계약을 무효화하고 자치 경찰에 해당하는 임시 보안관보가 되었다.

보안관은 회사의 용병인 자경단과 다르게, 철저하게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 독립성을 부여받았다.

그래서 급료는 개척지를 건설한 회사가 절반, 나머지 절반은 자유 무역 연합의 중앙정부에서 나온다.

자유 무역 연합(Free Trade Union).

줄여서 연합은 가장 최근에 건설된 50번 개척지를 포함한, 100개가 넘는 거주지가 뭉쳐진 황무지의 유일 집단이다.

중요한 것은 보안관보가 회사나 정부, 어느 쪽에도 소속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렇게 개인 시간을 풍족하게 가질 수 있을 만큼.

아침 식사를 끝낸 뒤. 총잡이 복장을 입은 클리프와 나는 사무소 뒤편의 공터에서 보안관보 수업을 들었다.

헤르만은 간략하게 알아야 할 정보를 주입했고, 나와 클리프는 경청하며 내용을 숙지했다.

신입 보안관보에게 정해진 연수 기간은 세 시간. 여기서 알려 주는 내용은 이런 것들이다.

자기한테 총 안 쏘는 법.

총알이 나가게 총을 관리하는 법.

개척민에게 총을 쏴야 하는 순간을 구분하는 법.

마지막으로 자경단이랑 시비가 붙어도 총질 안 하는 법.

총으로 시작해서 총으로 끝난다.

이게 진짜 웨스턴 감성이지. 이곳의 정신 나간 정서를 다시금 뼈저리게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두 시간짜리 이론 교육을 끝내자, 나와 클리프에게 각각 한 정씩 총이 지급되었다.

“총구는 사람을 향하면 안 된다. 원칙적으로는 그렇다. 마물을 상대할 때는…….”

헤르만의 일장 연설을 들으며 총기를 분해하고 다시 조립했다.

강한 친구, 굳건이의 노예였던 나는 비교적 쉽게 실습을 따라갈 수 있었다.

옆의 애는 전혀 아니었지만.

내게 지급된 총은 낡은 더블베럴 샷건.

우습게 보지 마라!

무려 60년이나 살아오신 산탄총 할아버지에게 실례이다.

클리프의 총은 자경단원에게도 지급되는 파이프 기관단총.

설정집에 따르면 영국에서 만들어진 ‘스텐 Mk.2’에서 따왔다던가.

파이프에 구멍만 뚫어 놓은 것처럼 보여도 총알은 나간다니 정말 다행이다.

아주 대충 총기 관리법에 대한 설명을 끝으로, 헤르만은 나와 클리프에게 책자를 주었다.

“내가 설명한 내용은 모두 여기에 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

설마, 글자를 읽을 놈은 없겠지.

헤르만은 심드렁한 얼굴로 두 보안관보를 보았다.

“그래, 역시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없…….”

“저는 읽을 줄 압니다.”

“뭐? 그럼 이 책의 제목을 읽어 보게.”

“보안관 기초 메뉴얼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나는 자랑스럽게 웃으며 제목을 읽었다.

왜냐하면, 이 세계의 문자는 지구의 영어 알파벳이니까.

판게아는 지구의 식민지가 된 차원. 마계의 침략으로 세상이 한 번 초기화가 되었지만, 영어는 여전히 전 지역에서 공용어로 쓰인다.

듣고 말하는 거야 루카의 [판게아 공용어] 스킬이 있으니 되었고.

책에 적힌 알파벳은 이미 중학교 시절의 김만득이 학습한 내용이다.

내친 김에 책의 목차와 소개 글까지 읽자, 헤르만은 눈꺼풀을 깜빡거리며 굉장히 기뻐했다.

“대단해! 자네는 오후부터 나와 함께 서류 작업을 하면 되겠군.”

“루카가 서류 작업을 하면, 저는 무슨 일을 합니까?”

“자네는 글을 못 읽으니 무기고 정리부터 시작하세.”

클리프는 가방끈의 차이를 실감하며 언제 글을 배웠냐는 눈빛을 보냈다.

대신 너는 폰허부를 가졌잖니. 나도 눈빛으로 그런 메시지를 보냈다.

“자, 교육은 끝났으니 점심 먹고 출근하도록.”

헤르만은 실탄 사격은 탄약이 부족하니 실전에서 해 보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정말 멋진 동네야.

이어서 결국 몸 쓰는 일을 맡았다며 조잘대던 클리프도 사라진 뒤.

혼자 남겨진 나는 가부좌를 틀며 명상 자세를 취했다.

어젯밤부터 익히기 시작한 연공법은 이런 자투리 시간만으로도 충분히 수련이 가능했다.

나는 공간을 부유하는 마나를 코와 입으로 빨아들이며 생각했다.

‘이제는 정말 노가다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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