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4화>
4. 스승의 은혜(2)
이튿날.
우리는 여느 때처럼 끼니를 때우기 위해 식당으로 왔다.
나와 클리프는 미리 식당에 나와 앉아 있었고, 스칼렛은 여성 숙소에서 조금 늦게 도착했다.
“그러니까 아저씨 검술이…… 아라곤 제국이…….”
클리프가 식당의 허공을 향해 혼잣말을 날렸다.
나는 어젯밤에 훔친 칼자루를 클리프의 손에 쥐여 주고 잠들었다.
그리고 이게 그 결과다.
검성이 어쩌고, 제국이 어쩌고 하는 모양새를 보니, 이제 천천히 서로를 알아 가는 관계까지 나아간 듯 보였다.
서로 친해지길 바라!
물론 나에게만 그렇게 보일 뿐, 스칼렛에게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클리프…… 설마 루카한테 옮은 거야?”
“어허, 옮다니. 클리프의 병은 다들 한 번은 겪는 그거야, 그거. 열다섯 살 무렵에 걸리는 병.”
“엥, 그게 뭔데? 그리고 우리는 열여덟 살이잖아.”
“아무튼! 이 병은 폭주하는 정체성과 자아를 주체하지 못하고 흑역사를 축적하는 질환이지. 영장류 중에서도 청소년기 인간에게서…….”
“그만. 우리 밥이나 먹자.”
황무지인의 평균 교육 수준은 지구의 서당 개 3년급이라, 내가 늘어놓은 말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특히나 스칼렛의 초기 지능은 8점. 그녀는 결국 항복을 선언하고 숟가락을 들었다.
그래, 먹는 게 남는 거란다.
나는 고개를 내려 메뚜기 살점이 들어 있는 밀가루 수프를 보았다.
[침.착.해]의 효과가 없었다면 당장 비명을 질렀을지도.
이 말도 안 되는 식단에 손발이 띵하고 머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살기 위해 먹자. 살기 위해서.
‘힘내라, 김만득!’
나는 크게 한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었다.
맛은 그저 그랬다. 신기한 사실은 꽤 먹을 만하다는 정도.
모든 메뚜기 고기를 흡입하는 스칼렛과 다르게.
식사가 거의 끝날 때까지 클리프는 내면의 아저씨와 싸웠다.
“저는 굳이 강해질 필요가 없어서. 아뇨, 여기는 훈련할 곳도 없고요.”
클리프의 탤런트는 ‘영혼 계승자’.
세계를 호령한 영웅이 사용한 도구에는 영혼이 조금씩 깃드는데, 흡수한 영혼의 기억을 토대로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초능력이다.
이제 폰허부의 영혼을 계승한 클리프는 더 많은 힘을 계승받기 위해 스승의 유품을 찾아다니게 될 것이다.
‘폰허부에게 3주 정도 수련을 받은 클리프면, 황무지 안에서 객사할 정도는 아니겠지.’
나 같은 천민은 목숨을 건 실전을 겪어야 크게 성장한다.
하지만 1등 시민인 클리프는 스승의 조언만 따라가도 크게 성장할 터.
따흡!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린다.
클리프, 나를 위해서 무럭무럭 성장하렴.
열심히 수프를 퍼먹는 사이. 별 모양의 금속판을 가슴에 단 터프 가이가 건들건들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어이, 거기! 너는 식사하고 보안관 사무소로 오도록.”
제 할 말만 하고 휙 돌아서 나가는 보안관보.
작업반장 쪽으로 시선을 옮기니, 나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쇠뿔도 단숨에 빼라고, 우리 윌리엄 보안관님께서는 나를 빠르게 만나고 싶었나 보다.
내가 덤덤하게 있자, 내면의 아저씨와 비밀 친구가 된 클리프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너 설마…….”
“만약 잡아가려고 온 거면. 포박당해서 질질 끌려갔겠지.”
“음, 그건 그렇지.”
“내가 말했지? 보안관이랑 자경단한테 잘 보이겠다고. 좋은 일이 분명하니까, 걱정하지 마.”
나는 그러면서 군고구마를 스칼렛과 클리프 사이에 놓았다.
“뭐야, 그런 험한데 가려면 든든하게 먹어야지.”
오늘부터 맛있는 거 양껏 먹을 테니까!
나는 뒷말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식당 문을 나서며 힐긋 쳐다보니, 고구마를 두고 티격태격하는 두 주인공이 보였다.
“클리프! 그쪽이 더 크잖아. 나한테 좀 더 줘.”
“무, 무슨 소리야? 공평하게 한 손에 들어갈 크기로 잘랐는데.”
“내 손이 더 작잖아. 치사해!”
“느낌이 그런 거야. 아무튼, 그런 거야.”
저 둘이 빨리 성장해야 나도 좀 편할 텐데.
언젠간 세상을 구하게 될 존재들이 지금은 고작 고구마를 두고 다투고 있는 모습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나중에 잡화점에서 먹을 거라도 사다 줘야 하나.
두 아이의 식량 쟁탈전을 구경한 뒤, 나는 폐허 같은 식당을 나와 거리를 거닐었다.
대로를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줄지어진 건물들. 그 중심에는 상당히 잘 건축된 보안관 사무소가 있었다.
“영감님은 안에 계신다. 들어가 봐.”
사무소 그늘 안에 앉아 말을 건 사람은 식당에 왔던 보안관보1.
그가 가죽 부츠에 성냥을 긋자 칙 하는 소리가 나며 불이 붙었다.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이며 사선으로 째려보는 모습이 숙련된 총잡이 같았다.
자기도 신입이나 데리러 온 짬찌면서 염병은!
“옙, 알겠습니다.”
선배님, 충성! 충성!
훌륭히 사회성을 기른 K-도비는 앞에서 웃고 뒤에서 뒤통수를 노린다.
어차피 좀비들한테 먹힐 운명일 텐데, 선배님 대접 정도야.
끼이익, 문을 열자 빈 쇠창살 감옥과, 나무 책상에 앉은 남자가 나를 반겼다.
감옥 안에 죄수가 없는 이유는 모두 사형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정말로 아름답고 멋진 동네다.
“네가 루카인가?”
“네, 사무소로 오라고 하셔서 왔습니다.”
“저번에 날뛰는 거 보니 우리랑 잘 맞겠더군. 나는 헤르만이다. 영감님이 기다리시니 빨리 2층으로 올라가 봐.”
호의적으로 말한 남자의 배지는 앞서 본 보안관보와 조금 달랐다.
이 사람은 수석 보안관보. 겉멋만 잔뜩 든 보안관보와는 급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올라올 필요 없네. 그냥 여기서 대화하지.”
나와 헤르만은 위에서 내려오는 남자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하얗게 센 머리, 꼬장꼬장해 보이는 표정.
리암 니슨의 열화판처럼 생긴 윌리엄이 계단을 내려와 보안관보 배지를 내밀며 말했다.
“할 건가, 말 건가.”
어이구,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나는 헐레벌떡 배지를 받아 들고 살짝 웃어 보였다.
“이렇게 상황 판단력이 좋은 녀석이 진짜 보안관감이지. 안 그런가, 헤르만?”
“그렇습니다, 영감님.”
“범죄자 앞에서도 이렇게만 행동하게. 그리고 이거는 이번 주 급료일세.”
손에 군용 5.56mm탄 열 발이 후두둑 쏟아졌다.
이게 진짜 신분 상승이지. 보안관보가 되었다고 바로 급료가 열 배로 뛰는 거 보소.
그런데 행복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참! 내가 자경단 놈들에게서 받아 온 자네 몫이야. 저번에 쓰러트린 메뚜기 몸에서 나온 마정석이네.”
“이건…….”
“자경단 놈들. 전부 자기들 거라고 우기는 걸 받아 온 거니, 받아서 생활하는 데 쓰게.”
내가 쓰러트린 메뚜기에서 나온 마정석의 개수는 다섯 개였다.
알고도 포기해야 하는 보상에 미련이 남아, 여태 기억해 두고 있었는데.
손에 전해진 묵직함은 그 이상이었다.
손에 들어온 마정석은 일곱 개.
최하급이라고는 해도 마정석 하나가 보통 군용탄 10개의 값어치는 하니, 개척 노동자 주급의 70배라는 의미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남의 돈으로 생색내는 거라더니.
본래 자경단의 것까지 뺏어서 나의 충성심을 사겠다는 뜻이었다.
나야 아주 고맙지. 어딜 가나 돈은 옳다.
나는 손톱만 한 마정석 일곱 개를 주먹으로 꼭 쥐며 기간제 충성을 맹세했다.
“뼈가 가루가 되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허허, 계산이 빠른 걸 보니 객사할 팔자는 아니군. 앞으로 우리는 한 식구이니 편하게 영감님이라 부르게.”
내 등을 팡팡 때리며 웃은 윌리엄은 등을 돌려 위층으로 올라갔다.
폭풍 같은 보안관보 수여식이 끝나고, 헤르만은 다시 의자에 앉아 이렇게 말했다.
“일단 오늘은 숙소에서 쉬고 내일부터 출근하게. 계약서랑 필요한 것들은 빠른 시일 내에 보내 주도록 하지.”
이곳은 천국인가?
지금은 일을 줄 수 없으니 퇴근하라는 말에 나는 후다닥 사무소에서 빠져나왔다.
* * *
여명이 트기 직전의 어두운 새벽.
노동자 숙소가 밀집된 거주 구역 공터에서 누군가 굵은 땀방울을 흘리고 있었다.
남들보다 1시간 일찍 일어나 검술 수련을 시작한 남자.
클리프는 자세를 잡고서 손에 쥔 나무 몽둥이로 허공을 갈랐다.
쉬익. 발을 뻗으며 베어 낸 공기가 날카로운 소음을 내며 흩어졌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하더라도 검술이 무엇인지조차 몰랐을 텐데.
단순히 폰허부의 경험을 이어받은 것만으로도 검술가 흉내 정도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실제로 본 검성의 검술은 저렇구나.’
나는 한창 수련을 이어 나가는 클리프를 몰래 숨어서 바라보았다.
묵직한 위력을 내포한 직선적인 검술, 저 무시무시한 검에 얼마나 많은 적이 분쇄되었던가.
검성의 성격을 담은 듯 호쾌한 움직임이었다.
부르고스 검술. 폰허부가 창안하고 발전시킨 전설급 검술을 제외하고도, 클리프가 전승받은 능력은 더 있었다.
바로 영웅이 될 자가 지녔다는 타고난 감각. 영웅 등급의 특성인 [초감각]이었다.
클리프가 황급히 몸을 돌렸다.
설마 지켜보는 사람이라도 있는 건가. 불안감을 느끼며 뒤쪽을 살피던 클리프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뭐냐, 보안관보 나리가 이른 시간에 이런 데를 다 오고.”
요놈 봐라.
[잠행] D등급의 은신 정도는 단숨에 간파해 버리네.
역시 주인공이라 그런지 쓰레기 자경단과는 질적으로 아예 다르다.
나는 능청스럽게 통조림 두 개를 흔들면서 그에게 다가갔다.
“이거 전해 주려고 네 숙소로 가는데, 뭔 소리가 나서 들렀지.”
“아, 이건 그냥. 잠이 안 와서 휘둘러 본 거야.”
무일푼 노동자였던 내가 400년 전 검성의 제자가 되었다?
이딴 개소리를 누가 믿겠는가. 클리프는 황급히 몽둥이를 등 뒤로 숨겼다.
사실, 현재 시점에서 남자 주인공은 검술에 관심이 없다.
부랑자로 온갖 괄시를 받아 온 그의 소원은 소시민처럼 평범하게 사는 거니까.
그럼에도 꼭두새벽부터 검술 수련에 나선 내막은 이랬다.
수련하자, 수련. 수련하자, 수련. 수련하자, 수련.
이렇게 24시간 내내 떼를 써 대면 안 하고 배길까.
게임에서도 수련을 조금만 게을리하면 매번 폰허부가 온갖 지랄을 떨었다.
밤이고 낮이고 성에 찰 때까지 주인공의 머릿속을 끊임없이 울리면서…….
결국, 내면의 스승과 격론을 주고받던 클리프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분명 친구를 돌려보내고 수련이나 마저 하자며 조르고 있는 거겠지.’
진짜 미친놈은 미친놈이다. 뇌에 검술만 가득 찬 미친놈.
나는 그런 클리프의 멘탈 관리를 겸해서 슬며시 콩 스튜 통조림을 건넸다.
“배고파서 미치겠냐. 이건 어제 오후에 잡화점에서 산 거야. 스칼렛이랑 나눠 먹어.”
“후우…… 고맙다. 근데 갑자기 보안관보가 되어도 괜찮은 거야? 너 제대로 싸울 줄도 모르잖아.”
“모르긴 뭘 몰라. 내가 거대 메뚜기 잡는 거 못 봤어?”
“그래도 도적 떼나 큰 괴물들과도 싸워야 하잖아. 나 같으면 불안할 거 같은데.”
“불안하긴. 네가 하는 것처럼 나도 열심히 수련하면 되지.”
내가 손가락으로 몽둥이를 가리키자, 클리프는 얼굴을 붉히며 몽둥이를 내려놓았다.
“이, 이건 심심해서 해 본 거야.”
“그래? 내가 보기에는 엄청 대단해 보였는데. 내가 둔기를 휘두르는 거와는 확실히 달랐어.”
“정말?”
“뭔가 안정적이면서 강력한 느낌? 몽둥이를 묵직하게 내지르는 느낌이었어. 정교하면서도 단단했다고 해야 하나.”
클리프가 익힌 부르고스 검술의 특징은 묵직한 공격으로 적을 분쇄하는 것이다.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제자가 될 클리프에게는 푸대접이나 받았으니.
내 칭찬은 폰허부에게 메마른 땅의 단비 같을 터였다.
“윽!”
내가 칭찬을 날리자마자, 우리의 주인공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마 폰허부가 기뻐서 날뛰고 있지 않을까.
‘클리프, 조금만 버티렴. 폰허부를 너에게 선물한 보답을 나도 좀 받아야 하지 않겠니?’
영웅심, 검술, 열정, 의리, 수련.
이 다섯 가지 키워드를 빼면 폰허부는 거죽만 남는다.
그중에서 검술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은 다른 네 가지보다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검술을 내가 칭찬했으니 폰허부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보상’을 하려고 하겠지.
고작 칭찬 몇 마디로 폰허부에게서 검술을 전수받을 수 있다면, 입술이 부르트도록 칭찬해 줄 자신이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진지한 얼굴로 스승과 대화를 나누던 클리프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래, 그래! 어서 말해 클리프!
“루카, 너 혹시 검술 배워 볼 생각 없냐.”
낚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