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1화>
1. 판게아(1)
삶을 갈망한 적이 있었나?
참으로 쓸모없고 해괴한 질문이다. 누구나 본능적으로 그렇다고 답할 테니까.
하지만 이 질문에 심도 있는 고민을 던져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태어나서 살았고, 살다 보니 나이를 먹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어렸을 적 막연히 두려워했던 죽음에도 다소 무뎌졌다고.
그리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렇다.
사람은 큰 시련이 닥친 순간, 굉장히 기괴하게 변하기도 한다.
* * *
“루카, 너무 늦었지만 우리 다시 여기로 돌아왔어.”
여인이 나무 두 개를 엮어 만든 십자가 앞에 서서 나직이 말했다.
설움이 복받친 듯 눈물을 흘리는 여인, 그녀 옆에 있던 남자는 오랜 벗이자 아내인 여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너의 희생이 없었다면, 스칼렛은 여태 살아 있지 못했을 거야.”
남자의 이름은 클리프, 여자의 이름은 스칼렛.
판게아 대륙을 덮친 파멸을 막아 내고, 영원불멸의 전설이 된 두 영웅이었다.
그들은 옛 절친의 무덤에서 서로를 껴안으며 사랑과 평화의 온기를 느꼈다.
“스칼렛의 배 속에 남자아이가 있대. 이름은 루카야, 네 이름을 따서 지었어.”
“우린 불행하게 시작했지만, 앞으로는 네 이름을 딴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살게. 고마워, 루카.”
이 말을 끝으로 엔딩 크레디트가 시작되었다.
개발사인 ‘데브 퍼피’의 로고를 시작으로 여러 직원의 이름이 아래에서 위로 주르륵 올라갔다.
이제 정말 끝이라는 것처럼.
“임신 엔딩은 언제 봐도 새로워.”
늘 짜릿해.
청정수 때부터 쭉 가장 마음에 드는 엔딩이다.
이제는 몇 번을 봐서 대사까지 외울 지경이지만.
플레이 타임 3,000시간. 업적 달성률 100퍼센트.
발매일부터 시작해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여가 시간을 이곳에 갈아 넣었다.
멀티플레이도 없는 작품에 쏟기에는 시간이 조금 아까워 보일지도 모르지만.
어떡하냐, 한번 꽂히면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인 걸.
나, 김만득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시곗바늘을 살폈다.
오후 10시 30분.
오늘은 모처럼 주말에도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게임에만 몰두했다.
당연히 거래처에서 기가 빨리거나, 상사의 잔소리에 머리카락 숫자가 줄어드는 일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기운이 조금 넉넉했다.
“아직 자기도 좀 그렇고. 게임 커뮤니티나 들어가 볼까.”
인터넷 도구를 실행해 게임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자, 이제는 고이다 못해 썩어 버린 커뮤니티 게시판이 펼쳐졌다.
콘텐츠가 고갈된 게임의 말로는 늘 이런 법이다.
나온 지 3년도 넘었을 뿐더러 추가 업데이트도 없으니.
한데 오늘은 조금 희귀한 글이 추천 글 상단에 올라와 있었다.
- 루카를 살려서 엔딩 볼 수는 없나요?
거대한 캠프파이어가 활활 타오른다.
어느 뉴비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커뮤니티 고인 물 판을 뒤흔드는 중이었다.
스칼렛됴아: 판린이 쉑.
여고생쟝: 엔딩만 30번 봤는데, 그런 분기 없음.
토끼공듀: 루카는 님처럼 모쏠 아다 운명임.
사각비키니: 만더기 성님한테 물어보라구, 저번에 인증도 했었잖아.
총자비: 아니, 이 게임 업적 100%가 가능하긴 함?
나까지 소환될 정도로 후끈후끈하게 달아오른 상태잖아.
이전에 업적 달성률 100퍼센트를 인증한 이후로, 커뮤니티 내에서 나를 성님이라고 추종하는 세력(?)도 있었다.
이 판에 끼기는 좀 뭐하고. 나는 그냥 천천히 댓글을 읽어 내려가기로 했다.
다운폴: 판게아.
줄여서 판게아는 싱글 오픈월드 RPG로, 지구에 의해 침략당한 중세 판타지 세계를 다루고 있다.
지구인이 침략자로 나오는 작품은 종종 나오지만, 이 게임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지구의 식민지로 전락한 판게아는 다시 마계의 침략을 받아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그렇게 문명이 완전히 초토화된 세계의 200년 뒤가 이 게임의 배경이다.
게임의 구조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하자면 이렇다.
판게아에는 클리프와 스칼렛이라는 두 주인공이 있는데.
처음에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동료를 영입하며 취향에 맞는 파티를 구성할 수 있다.
동료와 전투 스타일을 다양하게 구성하며 전략적으로 적을 쓰러트리는 방식.
이 게임은 전형적인 오픈월드 RPG임에도 수많은 분기로 나뉜 구성과 깊이로 호평을 받았다.
여기서 유저들의 관심을 받는 동료 캐릭터가 등장한다.
‘내가 제일 아끼는 캐릭터이기도 하고.’
본디 이런 게임에는 비극적인 운명의 캐릭터가 있기 마련이고, 게임의 시작 마을에 있는 ‘루카’라는 NPC가 이에 해당된다.
혹시 탄광의 카나리아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광부들이 독가스에 노출됐음을 알려 주는 새로, 보통 카나리아가 죽으면 광부들은 광산에서 빠져나와 목숨을 지킨다.
그런 의미에서, 루카는 초반부에 위기감을 조성하기 위한 카나리아다.
절친한 친구 사이처럼 묘사되다가 튜토리얼에서 좀비에게 목이 뜯기며 퇴장.
물론, 숙련된 유저는 루카를 살린 채로 게임을 시작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나 극초반부를 넘겨도 큰 이벤트가 일어나면 어김없이 주인공을 위해 희생하며 죽는다.
주인공이 위기에 빠졌을 때, 그 누구보다 힘이 되어 주고.
죽는다.
루카는 아무리 살려 두고 싶어도 게임의 중반부 즈음에는 무조건 죽게끔 설계된 캐릭터다.
주인공의 각성 재료로, 좋은 아이템을 얻기 위한 제물로.
모든 분기에서 소비되고 버려지는 게 루카라는 NPC의 사용법이었다.
그래서 매번 죽는 루카가 안쓰러웠는지, 커뮤니티 내에 루카를 애정캐로 꼽는 사람도 많았다.
어차피 너희들도 화룡검 얻으려고 불쌍한 루카를 용암에 빠트려 죽였잖아!
위선자 새끼들. 나는 이렇게 생각하며 스크롤을 아래로 내렸다.
강철협객: 퍼스트 시티에 처음 도착했을 때, 루카 파티에서 버리면 살 수 있음.
누군가가 쓴 글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했어도 죽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바로 아래 댓글에 내 경험과 똑같은 글이 달려 있었다.
Go인물: 퍼스트 시티에 갖다 놔도 죽어. 대전이 이후에 좀비된 루카 보고, 오열하며 죽이는 이벤트 뜸.
맞아, 그랬었지. 역시나 루카가 살아날 방법은 없다.
사실 판게아에 이런 NPC는 넘쳐 난다. 멸망한 후의 세계가 배경인 게임이니.
다만 루카의 경우에는 시작부터 등장하고, 주인공들의 절친이라는 조건 덕분에 특별 취급을 받는 것이다.
“별 이야기도 없네, 이제 슬슬 환승할 게임을 찾아봐야 하나.”
아무리 재밌어도 반복되면 결국 질리는 법.
나는 인터넷 도구를 종료한 뒤, 바탕화면의 한 아이콘을 클릭했다.
Sleam. 게임을 유통하는 플랫폼에 들어가니, 나에게 온 각종 메일이 수십 통이나 있었다.
게임 친구들의 안부 인사나, 판촉 광고들이 대부분.
이제 슬슬 잘까. 졸린 눈으로 메일을 열어 보던 와중에 이상한 메일 하나가 눈에 띄었다.
[DLC, 루카를 살리고 싶은 분에게.]
[From. Dev Puppy.]
루카를 위한 DLC라고?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그 메일을 클릭했다. 단순한 홍보 메일인 줄 알았으니까.
* * *
화창한 황무지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대형 SUV 크기의 괴물이 도사리는 곳!
타오르는 태양 밑에서 두근두근 노동이 기다리는 곳!
온갖 무법자들이 깜짝 총알을 선물해 주는 곳!
“하하하하하! 너무 즐거운걸!”
나, 김만득은 이 아름답고 자애로운 세계에 떨어졌다.
“클리프, 요즘 루카가 정신이 이상한 것 같아.”
“내버려 둬. 조금 저러다가 말겠지.”
아침밥을 먹다가 정신 줄 놓고 웃는 친구를 보면서, 미래의 두 영웅은 조용히 속닥였다.
“루카, 밤에 악몽이라도 꿨어? 이 고구마 너한테 줄까?”
긴 와인색 머리칼을 말총처럼 묶은 소녀.
스칼렛은 클리프의 고구마를 들어 루카에게 슬쩍 내밀었다.
“스칼렛, 주려면 네 몫을 줘야지?”
은발 소년은 고구마를 잽싸게 낚아챘다.
그래, 먹을 건 중요하지. 여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니까.
“루카, 너는 반장님한테 말하고 쉬어. 말뚝은 혼자서 작업해도 되니까.”
“아니야. 일은 해야지.”
나는 다 먹은 밀가루 죽 그릇을 들고 일어났다.
훌륭한 K-도비는 외로워도 슬퍼도 출근을 빼먹지 않는 법이다.
그릇을 반납하고 낡고 녹슨 식당에서 나오자, 광막한 황무지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글거리는 태양과 바싹 마른 토양.
저 멀리 지평선에서 사냥감의 체액을 흡입하는 ‘그레이트 스콜피온’의 모습이 생중계되었다.
또 다른 곳에서는 늑대에 탄 오크 워밴드가 질주하며 일으킨 흙먼지도 보였다.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겠지?”
“뭘 걱정하냐. 자경단이랑 보안관이 있잖아.”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클리프가 등을 툭 치며 대답했다.
아프다, 등보다 마음이.
‘아오! 왜 하필 이런 곳에 떨어졌냐고!’
나는 마른 땅을 발로 밟으며 절규했다.
스릴러 소설을 좋아했다. 아포칼립스 세계관에도 완전히 환장하고.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고통받고 역경을 헤쳐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얼마나 재밌는지.
그래, 지켜보는 게 재밌다.
내가 직접 거기서 사는 거 말고!
“쟤는 왜 저러냐.”
“아, 반장님. 어제 악몽을 꿔서 그런가 봐요.”
“개척지에 처음 오면 다 그런다. 혹시 많이 이상해지면 말하고.”
“넵!”
클리프가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작업반장과 이야기한다.
저 캐릭터는 이름도 없다. 게임 내부에서는 그냥 반장이라고 불렸다.
그래도 여기는 게임이 아니니 물어보면 가르쳐 주지 않을까.
“야, 작업반장님 이름이 뭔지 알아?”
“그게 갑자기 왜 궁금한데?”
“그냥, 이름을 들어 보지 못한 것 같아서.”
“저번에 들었어. 반장님 이름은 토미라더라.”
“그렇구나…… 이제 일하러 가자.”
이곳은 게임 ‘다운폴: 판게아’의 세계관을 그대로 가져왔다.
하지만 이 세계는 게임과 다르다. 정말로 현실인 것이다.
‘그래서 더 무서워.’
가장 무서운 걸 꼽자면, 이 루카라는 캐릭터는 곱게 죽는 루트가 없다는 것.
좀비에게 내장이 뜯겨서 죽거나.
산 채로 피가 빨리거나.
용암에 빠져 강제로 터미네이트2를 찍거나.
오크에게 잡혀서 사육당하다 고기가 되거나.
등등,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두 용사에게 기여하며 잔인하게 죽는다.
하하, 정말 개판이군.
나는 클리프와 함께 말뚝과 망치를 가지고 일터로 향했다. 그러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상태창을 떠올려 보았다.
당연하다는 듯이 공중에 생긴 반투명한 창. 이런 건 그냥 자연스럽게 있는 거구나.
우선 그 ‘루카’가 맞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인간 방패], [2.0], [희생자]
특성창을 열람하자 루카가 가진 특성 3개가 나타났다. 다른 특성은 일단 넘어가고.
내가 주목한 특성은 루카라는 캐릭터의 상징이라고 볼 수도 있는 [희생자]였다.
-[희생자]-
등급: 영웅
설명: 이 캐릭터가 죽으면 동료 중 하나의 능력이 ‘크게’ 성장합니다.
--------
썅, 이게 희생자냐? 피해자지!
실제로 게임 내에서도 루카의 이런 특성을 활용해 플레이하도록 권장되는 게 사실이다.
초반부에 고기 방패가 되어 주든가, 각성용 제물로 쓰이든가 하면서.
‘나도 사람이야, 사람! 일회용 각성 물약 따위가 아니라고!’
아침에 잠에서 깨며 클리프의 얼굴을 보고서 얼마나 놀랐던가.
게임에서만 보았던 남자 주인공의 면상을 직접 보자, 내가 미친 게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당연히 꿈은 아니었고.
얼마 있지 않아 판게아 속의 튜토리얼 마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그것도 사망률 100퍼센트인 루카의 몸으로!
평생 선량한 시민1로 무난하게 살아온 나, 김만득.
이 정신 나간 세상에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갈지. 일반인의 정신력으로는 도저히 버티지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 아포칼립스 세계에서 포기란 곧 배드 엔딩으로 직결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세상이 기울어진 게 아니다. 내가 기울어진 것이다.
만약 이 세상을 떠날 수 없다면. 그리고 아프게 죽는 게 싫다면.
모쏠 아다로 죽는 게 싫다면!
나도 세상의 기준에 맞춰 살아야지.
더불어 정신이 맑아지자 이런 욕구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날 이곳으로 끌어들인 놈의 면상이 궁금한데? 절망을 또렷이 받아들이자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이 게임의 개발자든, 신이든, 사탄이든.
날 이 미친 세계에 떨어트린 놈을 찾아서 대가를 치르게 해 주마.
단순히 분노에서 비롯된 치기는 아니다. 나는 이 게임의 업적 100퍼센트를 찍은 고인 물이니까.
이 게임을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자신하는 고인 물이니까!
루카의 검은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그 순간 루카의 반가운 알람이 귓가를 툭툭 건드렸다.
[특성: [침.착.해]이(가) 개방되었습니다.]
[[침.착.해]의 효과로 상시 평정이 유지됩니다.]
기가 막힌 타이밍에 등장한 특성 [침.착.해]를 느끼곤 루카는 미소를 지었다.
이 미친 아포칼립스 세계에서 살아남자! 김만득 너는 할 수 있다!
“아자아아아!”
루카가 괴성을 지르며 일터로 뛰어갔다. 가만히 그의 곁을 지키던 클리프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말했다.
“하아, 저놈이 드디어 미쳤다고 반장님한테 말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