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화 >
“벌써 10년인가.”
화려한 쇼와 함께 장지후가 라오를 쫓아간 게 벌써 10년 전 일이었다.
김상식의 주도하에 장지후의 측근들은 그 일을 라오의 승천이라 부르며 진정한 신으로 거듭났다 포장하였고, 세뇌가 풀린 사제들을 추스려 생존자들을 이끌어 나갔다.
창가에서 광장 중앙에 세워진 장지후의 동상을 내려다보며 김상식이 중얼거렸다.
“언제 오시려나...”
10년이란 세월은 강산도 변하게 한다 했다.
더군다나 문명이 휩쓸려 나가 기록의 저장을 머리와 기록에 의존하는 현 인류다.
당연히 10년 전에 있었던 라오의 승천은 사람들의 입을 거쳐 전해질 때마다 살과 뼈가 붙어나가기 시작했고 그에 세월까지 흐르니 이제 정말 창세신화라고 믿을 만한 그럴싸한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아. 진짜라니까?”
광장에서 한 남자가 큰 바윗덩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빠가 옛날엔 저만한 바윗덩이를 번쩍번쩍 들어 올렸었어!”
그러자 그 남자의 아들로 보이는 아이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또 그 거짓말이야?”
“진짜라니까? 와. 이거 어떻게 보여줄 수도 없고. 네 친구 영식이 아빠 알아? 그 양반은 나보다 힘이 더 셌었어!”
“영식이도 그러더라. 자기 아빠도 맨날 거짓말한다고.”
아마도 과거 초인 또는 사제였던 걸로 추정되는 남자가 가슴을 내리치며 말했다.
“하. 진짜 초인 장비 입고 괴물을 맨손으로 때려잡았었다니까? 지금 사람들이 이만큼 안전하게 생활하는 데는 아빠 공도 적지 않어!”
“그럼 왜 지금은 못하는데?”
아이의 질문에 남자가 뒤통수를 긁으며 말했다.
“그. 그건... 라오님이 승천한 뒤로 갑자기 사라져서...”
“그것도 그래. 사람이 하늘에 떠올라 사라진다는 게 말이 돼?”
“진짜라니까? 괴물도 있는데 말이 안 될 게 뭐가 있어?”
“괴물이 왜?”
“응?”
아이가 너무나도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괴물은 원래 있는 거잖아.”
부자의 대화를 엿들은 김상식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세대 차이인가.”
구전과 기록으로 이어지는 기억의 전달.
그 과정에서 기억의 변질은 필연적이다.
종말 전과 초인들의 시대를 겪은 구세대와 태어날 때부터 괴물을 자연스럽게 접해온 종말 후 세대.
“유치원도 만들어야 하나.”
가장 급한 의식주를 해결한 뒤 천둥교 최고위층은 문명을 되살려감과 동시에 교육 시스템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고등학교부터 중학교 초등학교 순으로 차근차근 늘려나가고는 있지만 아직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비록 초능력이나 초인들의 힘은 모두 사라졌으나 다년간 축적된 대피 시스템과 경험은 사람들로 하여금 괴물과의 싸움을 이어나갈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거기에 더해 장지후의 공백을 메꾸기 위한 주교들의 노력까지.
진짜 천둥신 라오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제들은 교화가 풀리고 혼란에 빠졌지만 오히려 그 점이 그들 사이를 끈끈하게 메워주던 교화의 공백을 메꿔주었다.
교화가 풀린 사람들끼리 함묵하는 편이 오히려 일반 생존자들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유리하고 또 장지후에게도 득이 된다는 주교들의 설득에 대부분의 사제들은 여전히 천둥교의 사제 직함을 유지한 채 각자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김상식 주교님.”
집무실 밖에서 한 사제가 말했다.
“모두 모였습니다.”
“다들 잘 지내셨습니까?”
6개월에 한 번씩 열리는 주교 회의.
김상식의 말에 석주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가뭄이 너무 심하게 와서 작황이 좋지 않아.”
“비축분은 없겠지요?”
“비상용으로 조금 모아둔 게 있긴 한데 그 정도로는 택도 없어.”
석주의 말에 김상식이 다른 주교들을 보며 말했다.
“혹시 여유있는 곳 있으십니까?”
상식이의 말에 모두 침묵하는 주교들.
인류는 이제 간신히 의식주를 해결하는 수준.
가뭄과 같은 재앙에 대비되어 있을 리 없었다.
“어쩔 수 없군요. 일단 가까운 나라에서 십시일반 모아보도록 하죠.”
그러자 즉각 몇몇 주교들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영국 가뭄이 어디 하루 이틀 일입니까?”
“맞습니다. 매번 가뭄 핑계로 가져간 식량 때문에 죽을 맛입니다! 왜 영국과 가깝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만 매번 덤탱이를 써야 합니까?”
아직도 지구 전체로 놓고 봤을 때 물류의 이동은 제한적이었다.
당연히 먼 나라에서 대량의 식량을 공수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우니 가까운 나라에서 빌려오는 수밖에.
영국은 원래부터 농사에 적합한 나라가 아니었다.
우중충한 날씨.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가뭄까지.
덕분에 울며 겨자 먹기로 식량을 나눠주던 나라의 대표인 주교들의 반발은 당연했다.
주교들의 반발에 석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럼 그냥 굶어 뒤지라고?”
원래라면 장지후의 최측근인 김석주가 주교 중에서도 은연중 더 높이 대우받고 있어 이런 불만이 있더라도 눌러 참았을 거고 라오가 득세하던 시절엔 애초에 교화되어 절대 충성을 바치니 볼 수 없던 광경.
하지만 이제 교단 상태창도 없고 그들의 구심점이던 장지후도 사라진 지 벌써 10년.
덕분에 점점 독립적인 성향이 강해진 주교들은 반발했다.
“영국에 식량을 빌려주면 우리도 그만큼 허리를 졸라매야 합니다!”
“원래 대피소의 기본 원칙이 뭡니까? 자급자족 아닙니까?”
주교들과 김석주의 대립에 김상식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참 좋은 대화들 하십니다. 장지후 님이 보시면 너무 좋아하시겠어요.”
김상식의 말에 흠칫하는 주교들과 김석주.
그야말로 모든 걸 통하게 하는 만능의 단어였다.
단순히 장지후가 그들의 교주이기에 그런 게 아니었다.
그들 모두 초인과 초능력의 시대를 겪어온 사람들.
또한 장지후가 얼마나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장지후가 돌아와 그들을 징치하려 한다면 그 누가 장지후를 막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하나입니다. 서로서로 도와야 하는 게 당연하고요. 그리고 영국이니 프랑스니 이제 나라라는 게 의미가 있습니까? 그저 지역을 나누는 호칭에 불과합니다. 운 좋게 프랑스는 농업에 참 효율적인 나라죠.”
넓은 곡창지대 따스한 날씨까지.
과거 와인으로도 유명했을 만큼 프랑스는 영국과 다르게 농업에 적합한 나라였다.
“그런데 언제까지 농사만 지을 겁니까.”
김상식이 주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련소가 가동되어 철광석 제련을 시작한 게 4년 전입니다. 지금 프랑스에서 사용하는 무기들. 전부 프랑스에서 자급자족해서 만든 겁니까?”
넓은 곡창지대는 다시 말해 지하자원이 풍부한 광맥이 적다는 말.
김상식의 말에 프랑스의 주교가 주저하며 말했다.
“그... 그건...”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우리는 우리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줘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껏 발전해왔고 앞으로도 발전할 겁니다. 지금이야 철광석이니 식량이니 수준이지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건 지금도 미래도 아닌 과거입니다.”
발달된 물류, 풍족한 자원.
현 인류는 미래를 향해 가는 게 아닌 과거를 쫓아가는 거와 다름없었다.
“종말 전 그때의 관계를 생각하는 겁니다. 그때도 식량 가지고 이렇게 아웅다웅 싸웠었습니까?”
“......”
김상식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우리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게 천둥교의 정신이고 장지후 님이 추구하던 방향이라고 저는 생각하는데 다른 분들의 생각이 궁금하군요.”
김상식의 말에 주교들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도. 동의합니다.”
김상식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행입니다. 이해해주셔서. 우리 모두 합심해서 함께 나아가는 겁니다.”
“마음에 들어 하실까?”
아직은 미흡한 거 투성이지만 분명 인류는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실망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을 때 은퇴하는 것.
여태까지 고생한 장지후를 위해 은퇴를 앞당겨주는 것만이 김상식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니까.
“빨리 돌아오십쇼. 형님.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런데 바로 그때.
-이야. 생각보다 잘해놨네?
꿈에 그리던 그 목소리의 등장.
놀란 김상식이 뒤를 돌아봤지만 기대했던 장지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혀. 형님? 형님 맞으십니까?”
그리고 김상식의 머릿속에 울려퍼지는 장지후의 목소리.
-어. 맞어. 나야.
김상식이 다급히 온 방 안을 살피며 말했다.
“어디 계신 겁니까?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둘러봐야 소용없어.
장지후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 너 안에 있거든.
“예?”
-쩝. 원래는 라오 놈 신성력 빼앗아서 내 몸까지 함께 오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끈질겨서 말이지. 시간이 너무 지체돼서 신성력이 부족하더라고. 그래서 이렇게 강림하는 쪽으로 방법을 바꿨지.
김상식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실패하신 겁니까?”
-킥킥. 실패한 건 아니야. 라오 놈 지금 저쪽에서 허무한 표정으로 멍하니 누워있거든.
장지후의 계획을 알고 있는 김상식은 장지후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성공하셨군요!”
신격을 건 약속을 통해 라오를 몰아붙인 뒤 모든 신성력을 강탈.
라오의 신격을 육신에 봉인해 인간으로 만들었다는 뜻.
-그래. 뭐. 일반적인 육체는 아니지만... 이 자식이 필멸자의 삶을 사느니 차라리 소멸하겠다며 땡깡을 부리더라고. 그래서 불멸에 가까운 육체를 만들어줬지.
“불멸의 육체...”
-그래도 이제 라오는 아무것도 못 해. 신격유지조차 불가능한 양만큼만 남겨줘서 육체를 나오는 순간 소멸될걸?
김상식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거 정말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드디어 인류를 위협하던 라오를 완전히 무력화시킨 장지후.
-이제 2단계를 실행해야 하는데....
장지후가 구상한 계획의 2단계.
“이제 이 세상에 뿌려진 신성력을 흡수하셔야죠.”
장지후가 저쪽 세상에 가 있는 동안 사람들이 라오, 즉 장지후를 위해 모은 힘은 차곡차곡 쌓이게 된다.
그럼 원래 세상에 돌아온 장지후가 리틀이로 그 신성력을 이용해 두 세상의 연결 통로를 만들고 신성력으로 두 세상의 인력의 균형을 맞추는 게 바로 2단계 계획.
-그게 말이야... 문제가 좀 생겨서.
“문제라니요?”
비록 몸은 넘어오지 못했지만 강림도 했고 라오도 무력화했는데 또 문제가 발생하다니.
-내가 좀 오래 비워서 그런가... 이 세상에 쌓여가던 신성력의 신격화가 진행 중이네.
“예? 그게 가능합니까?”
-아마 저쪽 세상이랑 여기랑 완전히 분리돼서 별개로 쌓인 탓이 큰 거 같아. 그냥 방치했더니 말 그대로 나와 별개로 분리된 라오의 신격이 형성 중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대충 흡수 알고리즘이라도 만들어둘걸.
장지후의 말에 김상식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거 큰일이군요.”
겨우 라오를 무력화했는데 이젠 장지후에게서 분리된 또 다른 라오가 만들어지고 있다니.
“서. 설마.”
장지후를 직접 보고 기억하는 사람들과 그저 구전으로만 전해 들은 사람들.
그들의 존재가 별개의 신격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김상식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큭.”
-워. 워. 너무 걱정할 건 없어. 기본적으로 그 본질은 나한테 끌리도록 되어있으니까. 그런데 이놈이 반항을 한단 말이지. 그래서 좀 도와줄 수 있을까? 조금만 하면 깔끔하게 처리될 거 같거든.
김상식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역시 우리 상식이.
그 순간 김상식의 눈앞에 생겨난 반투명한 상태창.
“...교단... 상태창?”
-어. 내가 만든 거거든? 뭐 라오가 만든 것처럼 거창한 건 아니고. 내 사진이든 뭐든 내 얼굴 본 다음 무릎 꿇고 나. 그러니까 라오를 섬기겠다고 말하게 하면 돼. 그럼 자동으로 저 짭 라오가 아니라 나랑 연결되는 거지.
“에....”
-네가 섬기는 라오가 이렇게 생겼다. 뭐 이런 거.
김상식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이것도 사제 등급별로 뭐 이런 거 있습니까?”
-아니. 그런 거 없어.
“그럼 스킬이 생긴다든지...?”
-없는데? 스킬이 생기면 신성력 소모되잖아. 인력 균형 맞추려면 어쩔 수 없어.
“그럼 아무 득도 없는데 그냥 라오님을 향해 무릎 꿇고 섬기겠다 만들라는 겁니까?”
김상식의 어이없다는 말에 장지후가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그렇게 되나? 그래도 나보다는 쉬울 거 아니야. 원래도 나한테 매일 기도하는 사람들한테 내 얼굴 보여주면 되는 거니까. 그냥 각인 작업이라고.
김상식이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진을 어디서 구합니까?”
-응?
“물론 복사기야 있지만 복사기에 쓸 종이. 그것도 규격에 맞는 빳빳한 A급 종이를 어떻게 구합니까? 그것도 십억이 넘는 사람들에게 돌려보게 할 양을요.”
학교에 보급되는 책은 대부분 과거에 쓰던 교과서를 구해 종말 이후의 내용만 주석으로 추가해 사용하고 있었다.
천둥교 내부에서 쓰는 서류 또한 종말 전 생산해놨던 종이를 수거해 재활용하는 수준.
그러자 장지후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종이 생산 못 했어?
“하아... 종이 없다고 죽는 거 아니지 않습니까. 펄프 만들고 종이 가공 공장 돌려 종이 찍어낼 시간에 다른 공장을 우선 가동하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모든 제품은 재료 수급부터 수많은 공정 끝에 탄생한다.
당연히 당장 급한 게 아니라면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어... 어떡하지? 시간이 너무 걸리면 진짜 완전히 신격화돼서 독립할 텐데?
“수정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당장은 힘든데...
당황한 장지후의 목소리에 김상식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죠. 주교님들의 협조를 구하는 수밖에.”
폐지라도 모아서 압축해 펄프를 만들고 15년 넘게 방치된 종이 공장을 재가동 시키고.
할 일이 태산이지만 장지후의 복귀를 위해서라면 모든 주교들이 발 벗고 나설 게 분명했다.
-...그래 부탁한다. 젠장. 라오놈이 시간만 안 끌었어도... 아니 그 짭 라오가 생기기 전에 오기만 했으면... 아오씨. 라오가 도대체 몇이야? 말하다 보니 헷갈려 죽겠네.
장지후의 툴툴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미소를 지은 김상식이 말했다.
“아무튼 형님.”
-응?
“환영합니다. 기다렸습니다.”
김상식의 말에 잠시 침묵하던 장지후가 말했다.
-그래. 내가 돌아왔다.
< 186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