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화 >
첩보원으로부터 시작된 초능력자 섬멸 작전.
“이 잔인한 놈!!”
나에게 모든 신성력을 빼앗긴 초능력자가 광분하며 외쳤다.
“인류의 배신자!!”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날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어. 난 내 할 일만 하면 그만이야.”
“이렇게까지 우리를 몰아붙이는 이유가 도대체 뭐냐!!”
로이가 외부에 구성한 점조직은 본대에 비하면 극소수에 불과하건만 나는 마치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그들을 하나하나 추적해 모조리 흡수해버렸다.
“설명해준다고 해서 이해할 것도 아니잖아. 그냥 되는 대로 살아.”
초능력자가 허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능력도 없이 그냥 살라고? 이 괴물 같은 세상에서?”
“앓는 소리 하지 마.”
나는 초능력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인류의 절대다수는 일반인이야. 그 일반인들은 능력이 있어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건가?”
“큭! 난 그들과 다르다!”
“다를 거 없어.”
초인, 초능력자, 일반인.
그들의 차이는 단 하나다.
나 또는 신들에 의해 선택을 받았는지 아닌지.
“결국 내 것이 아닌 건 언젠가 사라지게 돼있어. 난 그 시간을 조금 앞당긴 것뿐이고.”
“괴물 사냥에 이어 초능력자 사냥이라...”
누가 뭐래도 장지후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라오와 맞설 수 있는 존재.
이미 5개의 대피소가 당하며 껍데기만 남은 상황이지만 장지후는 그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이제 신들의 부활은 없다.”
신들의 유일한 희망이던 초능력자들이 전멸했다.
물론 아직도 봉인된 신들을 믿는 사람이 다수 존재하지만 그래 봐야 소수.
라오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내 앞길을 막을 존재는 없다.”
사제들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라오님.”
“미국의 신도들도 돌아왔으니 이제 신성력을 모으는 일만 남았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7개월. 나의 현신을 준비하라!”
괴물 사태가 터진 지 벌써 6년.
문명이 완전히 후퇴했던 초기와 다르게 이제 인류는 많은 부분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기름 생산도 시작했다며?”
한 남자의 말에 동료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고 하더라.”
“빠르다 빨라.”
“시추 장비가 사라진 건 아니니까. 안전 보장만 되면 충분히 사용할 수 있지.”
괴물 사태 초기에만 하더라도 모두 절망감에만 휩싸여있었지만 천둥교의 적극적인 대처와 대피소 시스템으로 자리를 잡았고 이젠 식량 생산을 넘어 2차 가공은 물론 과거의 문명까지 활용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남자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연구소가 돌아가면 이 지긋지긋한 농사일 안 해도 되겠는데?”
“맞다. 예전에 화학회사 연구원이라고 했었지?”
“그래.”
문명은 결국 기억과 경험의 연속으로 축적되어 만들어진다.
만약 괴물사태로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죽었고 자리를 잡는 데 더 많은 시간이 소모됐다면 화학 전문가였던 이 남자의 지식은 그가 죽는 순간 사라져 없어졌을 테지만 지금은 다르다.
문명의 복원은 다시 말해 이들 같은 지식인의 활동무대가 다시 만들어진다는 뜻.
“얼른 그날이 왔으면 좋겠다.”
동료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화학자까지 필요하려면 아직 멀었으니까 쟁기질이나 해.”
“...말도 못 하냐. 말도.”
동료의 타박에 쟁기질을 하던 남자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맞다. 조만간에 거대 의식을 치른다면서?”
“어.”
“도대체 뭐 하는 의식이래?”
“라오님의 현신이라던데?”
동료의 말에 남자가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
“현신? 이젠 하다 하다 진짜 자기가 신이라 생각하는 거야?”
“하는 말이겠지. 그런 거 아니야? 천둥교의 세를 과시하는 일종의 연례행사 같은 거?”
“그런 건가?”
“그리고 말조심해. 라오님을 진짜 신이라 여기는 사람 은근히 많아.”
동료의 말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알아. 뭐. 솔직히 최근에 좀 삐걱거리긴 했는데 라오님 덕 안 본 사람이 없기는 하니까.”
“아무튼 의식을 치른다니까 한번 가보자고. 의식에 참여하면 식량도 나눠준다던데?”
동료의 말에 남자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래? 그럼 가봐야겠네.”
그저 변덕 심한 라오의 일탈.
또는 세력 과시.
이게 일반인들이 바라보는 현신 의식의 정의였다.
그렇게 사람들은 인류의 운명이 달렸을지도 모르는 의식이 다가오는 줄도 모른 채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무려 수개월이나 걸려 완성한 제단.
높이만 100m에 1,500개가 넘는 계단으로 구성된 종말 이후 만들어진 가장 큰 건축물이었다.
“내일인가?”
제단을 바라보며 한 말에 라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드디어 내일이다.”
라오가 손꼽아 기다려온 현신의 날.
라오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현신하는구나. 멀리 돌고 돌아 왔지만 결국 드디어.”
나는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감동받는 와중에 미안한데. 아무튼 현신의 조건이 내 몸을 넘겨주는 거였잖아? 언제 줄 거야?”
“현신 의식이 모두 끝나면 돌려주마.”
“에헤이. 우리 약속은 바로였잖아.”
내 말에 라오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를 못 믿는 건가.”
“그게 아니라 약속은 정확해야지. 안 그래?”
라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좋다. 현신 의식을 시작하면 바로 넘겨주지.”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케이. 그럼 나도 내일을 기대할게.”
드디어 대망의 날이 밝았다.
“와. 사람 엄청 많네.”
괴물 사태 이후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적이 있을까.
현신 의식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으로 제단 주위는 인산인해였다.
“옥수수 사세요! 옥수수!”
“도둑이야!!”
잡상인부터 도둑까지 나타나며 시끌벅적하게 라오의 등장을 기다리는 사람들.
“와. 제단이 거대하다는 말은 들었는데...”
한 남자가 제단을 보며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진짜 장난 아니네?”
“듣기로 수천 명이 매일 2교대로 움직여서 만들었대. 중장비도 동원했다고 하던데?”
“중장비까지? 아주 작정하고 만들었다는 말이네?”
“뭔가 중대한 발표라도 하려나? 예를 들면...”
“예를 들면?”
“국가 선포라든지.”
충분히 해볼 법한 추측이었다.
이미 나라란 틀은 무너진 지 오래고 세상은 천둥교가 모두 지배하고 있다.
여기서 라오가 왕이 되겠노라 선포해도 반론을 낼 사람이 전무하다는 말.
“그럴싸한데? 그러고 보니 현신이라며. 창세 신화 같은 거 만들라고 그러는 거 아니야? 알에서 태어났다든지 곰이 마늘 먹고 사람 됐다는 것처럼. 지금이야 이렇게 웃고 떠들지만 백 년 이백 년 후는 또 모르는 거 아니야.”
그때였다.
“모두 길을 비켜라! 라오님 행차시다!”
사제의 외침에 사람들이 제단까지의 길을 터주고 넙죽 엎드렸다.
휘황찬란한 옷을 입은 라오가 뒤에 주교들을 이끌고 제단으로 향했다.
“주교님들이 전부 다 오셨네.”
“그만큼 큰 의식이라는 거겠지.”
“현신이 마무리되면 네 동료들은 모두 자유다.”
사람들은 주교들의 등장을 단순히 라오를 수행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다르다.
약속을 지킨 나에게 주는 선물이자 마지막 협박.
“고맙네. 풀어준다니.”
그렇게 사람들을 헤치며 제단의 첫 계단을 밟은 라오가 한 걸음 한 걸음 위로 오르며 말했다.
“오늘 이후로 너는 네 몸을 되찾고 진정한 천둥교의 교주가 되는 거다.”
라오의 말에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네 부하가 되라는 말이잖아? 그건 싫은데.”
“그럼 앞으로 뭘 할 생각이지?”
“글쎄. 아직 확정은 아니라서.”
라오가 끝없이 늘어선 계단을 오르며 말했다.
“난 네 능력을 높이 산다. 나와 함께 이상적인 세상을 만드는 거다. 난 신으로서 넌 나의 대리인으로서.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지쳤다고. 쉬고 싶어.”
“흠. 정히 거절하겠다면 어쩔 수 없지.”
그렇게 한참 동안 계단을 올라 드디어 제단 최상층에 도착한 라오가 사람들을 향해 돌아섰다.
“오래 기다렸다.”
그리곤 양팔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나 라오가 고한다! 이제 나 라오의 현신과 함께 세상은 새로운 질서로 개편될 것이고 더 이상 종말이 없는 완벽한 세상이 만들어질 거다!”
일반인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라오의 말임에도 모두 한결같이 소리를 지르며 외쳤다.
“라오님! 만세!”
“천둥교 만세!”
라오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보아라! 이것이 진정한 천둥신 라오이니! 모두 나를 경배하고 나의 위대함을 느껴라!”
그리고 외쳤다.
“현신!”
드디어 가동된 진정한 현신 스킬.
“흠.”
처음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하지만 이내 허공에 찬란한 빛이 나타나며 휘황찬란한 광채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저. 저게 뭐야?”
“나도 몰라!”
가벼운 마음으로 제단을 찾아온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당황해한다.
라오가 환희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드디어... 드디어!!”
“그런데 라오.”
내 말에 라오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뭐지? 이 중요한 순간에?”
“내가 예전부터 궁금했던 게 있어서.”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말해라.”
“나중엔 기회가 없을 거 같아서 말이지. 있잖아. 라오.”
나는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왜 신들은 스스로를 봉인하며 너처럼 자유롭게 오가지 못한 걸까? 기껏 생각해낸 거라곤 로이에게 예지를 내려 대비하게 만드는 게 전부였거든.”
“누누이 말하지만 난 특별하다.”
“그래. 그러니까 왜 특별한 건데?”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 너도 가능하다면 신들도 가능해야 한단 말이지. 그럼 신격은 봉인하되 너처럼 일부라도 따로 분리시켜서 로이와 로이 부하들을 부렸으면 더 확실했을 텐데 말이야.”
황홀한 광채만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라오가 이상함을 느끼고 나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그런 확실한 방법을 두고 굳이 예지 같은 방법을 쓰니 나한테 당하기나 하고 말이지. 게다가 리틀이만 해도 그래.”
나는 내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놈은 절대 나한테서 벗어나지 않거든.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물론 연결선을 만들어 나눠줄 수는 있지만 그래 봐야 결국 리틀이의 일부일 뿐이고.”
“너....”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결국 답은 하나지. 신격은 절대 분리될 수 없다. 더군다나 너희는 신격에서 탄생한 존재니 신격이 너희의 본질이나 다름없다는 거잖아. 그럼 봉인된 신들도 이해는 가. 분리가 안 되니 어쩔 수 없이 통째로 봉인됐다는 거지.”
라오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갑자기 여기서 그런 말을 왜 하는 거지?”
“그리고 또 한 가지. 왜 현신일까? 봉인에서 풀리는 거면 풀리는 거지 왜 굳이 이 세상에 현신. 즉.”
나는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세상에 나타나려는 걸까?”
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마치 다른 세상에서 이곳에 오려는 것처럼.”
“너...”
나는 라오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신격은 분리될 수 없다. 봉인되면 그걸로 끝. 그렇다면 네가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는 건 한 가지 가정밖에 나오지 않아.”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 지금 봉인 푸는 거 아니지? 아니. 애초에 봉인된 적이 없었던 거지? 처음부터?”
< 182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