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
“어서 오십시오.”
잠수함에 들어가자 함장복을 입은 남자가 목례를 하며 말했다.
“본 함의 함장 로날드입니다.”
“어. 반가워.”
살다 살다 잠수함도 타보네.
“지금부터 본 함은 라오님을 최대한 빠르고 안전하게 미국으로 모실 예정입니다. 브라운 병장.”
함장의 말에 한 군인이 경례를 하며 외쳤다.
“옛썰!”
“방으로 안내해드리도록.”
“그전에 잠깐. 왜 초능력자들을 희생시켰는지 설명을.......”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하려 했으나 함장의 표정을 확인하고 말문이 막혔다.
“...대답 안 해줄 거지?”
여태까지 만나온 로이의 부하들이 그러했듯 함장 역시 마찬가지.
함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저 역시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저 라오님을 모시고 미국으로 향하라는 지시만 받았을 뿐.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로이님을 만나 질문하시면 됩니다.”
“여기입니다.”
배든 잠수함이든 모든 군장비는 최고의 효율을 내도록 고안되어있다.
무기와 여러 최첨단 장비를 실어야 하는 잠수함에서 공간확보를 위해 가장 먼저 줄이는 곳은 바로 군인들의 여가 공간이다.
“여기 혹시 함장실 아니야?”
그런데 내가 배정받은 방은 원룸 정도 크기에 침대도 하나뿐인 독실.
잠수함에서 이런 독실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함장 말고 또 누가 있을까.
“맞습니다. 최대한 편안한 여정을 위해 함장님께서 방을 비워주셨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포커스가 나에게 맞춰져있다.
이젠 부담마저 느껴질 정도로.
“......알았어.”
“푹 쉬십시오. 식사시간이 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병사가 나간 뒤 나는 침대에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여기라면 절대 안전하지.”
종말 전 최고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최고의 잠수함.
정상적으로 모든 레이더 기지와 함선을 풀가동하고 있다면 모를까 인공위성 정도만 간신히 사용 중인 천둥교에서 당장 이 잠수함을 추적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초능력자들을 희생시켰던 건가.”
천둥교와 라오에게 끊임없이 웜홀로 가기 위해 시도한다는 모양새를 보여주기 위해.
“영국은 이미 모든 군기지와 군수품을 모두 확보했어. 단지 이용하고 있지 않았을 뿐이지.”
레이더와 함선이 괴물에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당연히 항구와 기지에 처박아 놓고 최소한의 관리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괴물이 아닌 나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웜홀로 향하는 시도가 멈추면 나를 잡기 위해 안달이 난 라오는 내가 탈출할 만한 모든 루트를 전부 틀어막으려 했겠지.
그러니 초능력자들을 희생해서라도 내가 웜홀을 통과하려 한다는 인식을 끊임없이 주려 한 거 같은데...
“그래도 너무 과해.”
과해도 너무 과하다.
충분히 희생자를 줄이는 다른 방안이 있지 않았을까?
정보 통제를 위해 현장 부대원들에게 부정확한 정보만을 제공하고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함과 동시에 최악에 최악을 가정하고 움직인다.
그럼에도 그런 명령을 내린 로이에게 철저히 복종하는 사람들이 신기하기만 할 뿐이다.
“...만나보면 알겠지. 로이를 만나 모든 진실을 듣고난 뒤...”
나는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라오를 박살 내고 내 손으로 종말을 막는다.”
밤낮 구분이 안 되는 잠수함의 생활은 생각보다 안락했다.
주는 밥을 먹고 자고 쉬고.
그리고 미국에 도착했다는 병사의 말을 듣고 잠수함 바깥으로 나온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설마 미국에 간다는 것도 거짓말인 건 아니겠지?”
잠수함을 나와 가장 먼저 내 눈에 보인 건 아주 작은 섬 하나와 나를 마중 나온 모터보트 하나가 전부였다.
“거짓말은 아닙니다.”
모터보트로 마중 나온 로이의 부하가 천연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이 섬은 미국령... 아니. 미국령이었던 섬이니까요.”
“...로이는 어디 있어.”
“섬 안에서 라오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자. 궁금한 게 많아.”
“...정말 여기 맞아?”
내가 알기로 로이가 만든 초능력자 부대의 수는 모두 5만.
하지만 섬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의구심만 더해간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울창한 숲만이 가득한 무인도.
만약 로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나는 그저 이 섬을 널리고 널린 무인도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을 거다.
“가보면 아실 겁니다.”
“하여튼 비밀이 뭐 그렇게 많은지.”
그렇게 도착한 모터보트에서 내린 나는 로이 부하들의 안내를 받으며 숲 안으로 들어갔다.
“아...”
숲의 초입부.
울창한 나무로 가려진 지상엔 자연과 조화로운 건물들이 가득했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이어 만든 방어벽과 그 안으로 갈색과 초록색으로 만들어진 건물들.
그리고 난 그제서야 이 섬의 정체를 깨달았다.
“위장...”
“예.”
로이의 부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섬의 모든 것은 위장입니다.”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도 건물도.
모두가 녹색과 갈색뿐.
이들이 이렇게까지 위장에 목숨을 거는 이유는 뻔했다.
“위성 때문에?”
“예. 그걸 위해서 저희는 이 섬의 나무를 단 한 그루도 베지 않았습니다.”
빼곡한 나무들 사이에 주거공간을 만들다 보니 기형적인 목조건물들이 대부분이었다.
오로지 위성으로 관측되지 않도록 맞춤 설계가 된 위장 섬.
“가시죠.”
안내를 받아 사람들과 기형적으로 생긴 건물들 사이를 지나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밝네.”
사람들의 밝은 표정.
잘 꾸려진 대피소의 느낌이다.
“당연합니다. 저희가 지금의 생활을 영위하는 건 모두 로이님의 덕분이니까요.”
저 기형적인 집에 살면서 저렇게 밝다니.
게다가 이 섬의 규모로 보아 식량도 넉넉하지 못할 터.
로이는 어떻게 이들을 다독이고 통제하는 걸까.
“...나는 그렇게 잘해줘도 불만이 터지던데.”
그 열약하다던 소형 대피소도 이 정도는 아니다.
“전부 나무로 만든 거야?”
“예.”
“나무는 한 그루도 안 베었다며.”
“괴물 사태가 터지기 전에 모두 공수했습니다.”
“...괴물들은? 저 나무로 만든 방벽 정도는 금방 부숴버릴 텐데?”
괴물들은 물에 둥둥 떠서 이리저리 떠돌지 않는가.
물론 초능력자 숫자가 숫자인 만큼 어지간한 괴물들이야 간단히 처리했겠지만 대규모 군집을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저 방벽. 보기엔 나무 같지만 사실은 강철로 만든 뒤 위장색을 바른 겁니다.”
철저하네.
정말 철저해.
그렇게 한참을 걸어 섬의 중심에 도착한 남자가 한 건물로 들어가 나무판을 치웠다.
“계단?”
나무판을 치우자 계단이 나타났다.
“예. 로이님은 지하에 계십니다.”
“...좋아. 드디어 만나는군. 내려가자고.”
지하는 아주 깊었다.
하지만 동시에 매우 어설펐다.
“직접 판 거야?”
“예.”
나무로 지지대를 세우고 흙벽엔 횃불이 걸려있다.
티비에서 보았던 북한 땅굴보다 폭이 더 넓다는 것 외엔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
대신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이쪽은 창고입니다. 이쪽은 주거지역과 무기 관리고이고요. 이 지하는 지금도 지속적으로 그 규모를 넓히고 있는 중입니다.”
나는 일렁이는 횃불을 바라보며 말했다.
“...핵잠수함도 가지고 있으면서 횃불? 발전기 하나도 없어?”
“저희 섬은 철저히 자연에서 구할 수 있는 것으로만 만들어져있습니다. 식량도 초기를 제외하면 자급자족률이 80퍼센트에 이릅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육지로 나가면 아직도 쓸 만한 물건들이 도처에 널려있다.
그것만 주워다 꾸며도 나름 살 만할 텐데.
“결국 자연이 주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은 유한하니까요.”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만 사용한다...”
나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장기전을 대비한 대피소라 이 말이군.”
나는 종말을 대비하며 두 가지 방안을 놓고 고민했었다.
공격적으로 땅을 수복해가며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것이냐 아니면 아주 완벽한 방비를 갖춘 섬을 만들어 인류 자체를 보존시키는 데 의의를 둘 것이냐.
나는 결국 전자를 선택했지만 이 섬은 철저히 후자에 초점이 맞춰진 섬이다.
“맞습니다. 아마 수십 년. 아니 수백 년도 버틸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그때 로이의 부하가 한 방 앞에서 멈춰섰다.
아니.
이걸 방이라고 해야 하나.
성인 하나 겨우 들어갈 만한 구멍을 천으로 막아놓은 수준.
“로이님. 라오님이 도착하셨습니다.”
그리고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들어오시라 해.”
위성 전화기에서 들을 수 있었던 그 목소리다.
“들어가시죠.”
천을 걷고 들어가니 내 눈에 보인 건 나무로 만든 의자에 앉아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백인 중년인.
“네가 로이야?”
중년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제가 로이입니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반갑다. 정말.”
진실.
진실이 알고 싶다.
세상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나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는? 내가 할 일은 뭐지? 라오는?”
“자자. 진정하시죠. 많이 궁금하실 겁니다.”
로이가 나에게 의자 하나를 건네주며 말했다.
“여기 앉으시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제가 하나하나 설명해드릴 테니 진정하십시오.”
로이가 의자를 손으로 툭툭 쳤다.
“앉으시죠. 긴 이야기가 될 겁니다.”
나는 뚱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자. 이제 말해.”
로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이 섬에 대해 어떻게 느끼셨습니까?”
로이의 뚱딴지같은 질문에 나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게 중요해?”
“제법?”
“끙...”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마치 장기전. 아주 오랜 시간 버티기 위해 만들어진 소수만을 위한 대피소.”
로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확히 보셨군요.”
“뭐. 안내했던 사람이 해준 말이긴 하지만.”
“이 같은 섬은 모두 이 섬을 포함해 10개가 전 세계에 퍼져있습니다. 물론.”
로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모두 자신들이 사는 섬 외의 장소는 모릅니다.”
“너네 너무 비밀스러운 거 아니야?”
“이 정도가 아니면 인류를 보존시킬 수 없을 수도 있으니까요.”
나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인류 보존...”
“이 섬들은 오늘 이 시간을 위해 준비했지만 동시에.”
로이가 굳은 표정을 말했다.
“라오님이 종말을 막는 데 실패했을 경우도 상정하여 만들어졌으니까요.”
“내 실패...”
나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너는 예언을 했다고 했어.”
“예.”
“그 예언에서 난 성공하나 실패하나?”
로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완벽한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법.”
“...그래 좋아. 내가 무엇에 실패한다는 거지?”
“라오. 천둥신 라오를 막아내는 데 실패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로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라오는 자신이 종말을 막겠다고 했어. 하지만 너는 내가 그런 라오를 막아야 종말을 막는다 말하고 있고.”
“그렇지요.”
“어떤 게 진실이지?”
어느 쪽 말이 진실이냐 이 말이야!!
“둘 모두 진실이며 동시에 거짓입니다.”
나는 발로 땅을 내리찍으며 말했다.
“또 뜬구름 잡네! 이러려고 날 불렀어?”
로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가지신 의혹은 확실하게 풀어드릴 테니. 그전에.”
로이가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저 역시 초능력자인 건 아시겠지요?”
“...그렇겠지.”
초능력자 부대의 수장이 일반인일 리는 없겠지.
“저는 아무런 전투 능력도 없습니다. 단지 보여주는 건 가능합니다.”
“뭐?”
“직접 보십시오.”
로이가 나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종말의 정체와 진정한 진실을.”
< 152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