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화 >
싸움은 순식간에 끝났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풀려난 인질들이 나를 향해 연신 고개를 숙였다.
“조심들 해. 이런 세상엔 괴물보다 사람이 더 무서운 법이니까.”
인질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이놈들 데리고 돌아가. 난 할 일이 있어서.”
“맡겨주십시오!”
인질들이 되찾은 총으로 제압된 약탈자들을 향해 겨누며 말했다.
“어때? 상황이 바뀐 기분이?”
약탈자들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제발. 차라리 죽여줘! 교화는 싫어!!”
인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가 왜 너네 원하는 대로 해줘야 되지? 그냥 얌전히 운명이다 생각하고 받아들여. 그리고 선량한 생존자들을 위해 일해라.”
그때 크리스가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김상식 주교님. 역시 대단하십니다.”
“......”
“그런 능력도 가지고 계시다니. 역시 천둥교는 파면 팔수록 대단하군요.”
나는 또다시 조잘거리는 크리스의 목덜미를 잡아 들어올리며 말했다.
“넌 일단 맞자.”
“으어어어.”
실컷 화풀이를 하고 나니 속이 좀 풀린다.
결과적으론 잘된 일이지만 여차 잘못했다간 죽을 수도 있던 위험한 순간이었다.
물론 이놈은 내가 주교급 사제라고 생각해 그런 거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서되지는 않는다.
“한 번만 더 먼저 나서봐. 그때는 진짜 가만 안 둔다.”
“예. 예.”
역시 매가 약이다.
말수가 줄어들었어.
“다리는 피해서 때렸으니까 일어나.”
“예...”
그나저나 라오는 어찌 됐을까?
만약 나라면 정신 차리는 즉시 내가 강림한 대상을 찾은 뒤 주변 사제들에게 김인호 몰래 계시를 내렸을 텐데.
“...대피소를 나오기 직전까지도 그런 움직임은 없었어.”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으니 내가 강림한 대상이 상식이라는 것 정도는 알아챘을 텐데.
“그러고 보니 라오는 왜 자기 목에 걸린 장치부터 해제하지 않은 거지?”
그게 가장 라오의 발목을 잡던 거 아니었나?
당장 예상할 수 있는 건 기계장치를 완벽하게 제거할 자신이 없다거나 완벽한 현신이 아니기에 지속시간이 짧아 둘 중 하나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정도.
“확실한 건 내가 건 목줄이 아직 무사하다는 거지.”
만약 목줄이 무사하지 않았다면 라오는 김인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전 세계 사제들에게 즉각 계시를 내려 대피소란 대피소를 전부 뒤집어 놨을 테니까.
“그나저나 리틀아. 너 끝내주는데?”
-꿈틀.
일단 한번 물꼬가 트이자 일사천리다.
기억 속에 있던 어지간한 초능력은 전부 구현이 가능했다.
불, 물, 전기 등등.
완전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된 기분이었지만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고 급히 실험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리틀이의 크기.
초능력을 사용할수록 리틀이의 크기가 줄어드는 걸 발견한 것이다.
“신성력은 소모품이라는 거지. 마치 총알처럼.”
로이가 무슨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리틀이의 보존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건 확실하다.
신성력이 늘어날 구석이 없으니 리틀이가 보유한 신성력 소모를 최대한 줄이는 게 관건.
“그래도 좋은 무기를 얻었다.”
당장 사제들과 맞닥뜨려도 그에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으니 그걸로 일단은 만족.
“가자! 얼마 안 남았다!”
초능력.. 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능력을 알고 나니 이런저런 궁금증이 차오른다.
“그냥 미국까지 텔레포트를 하면... 안 되겠지.”
초능력자들은 모두 능력에 비례해 제약이 걸려있다.
강한 능력을 발동하면 다음 발동까지 긴 시간이 소요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중에서도 공간계열 능력자들은 특히나 그 제약이 심했다.
단거리 텔레포터조차도 연속사용이 불가능했으니까 말이다.
“신성력 소모가 엄청나겠지. 그것도 저 머나먼 미국까지 날아가는 거니까.”
일단 로이가 보낸 부대원들과 합류하기 전까진 전부 보류다.
“김상식 님.”
크리스가 지도를 보며 말했다.
“저기가 치퍼 필드입니다.”
100여 개의 버려진 집만 남아있는 음산한 마을.
이미 여러 차례 생존자들에게 털린 건지 집집마다 문은 전부 박살이 나 있고 내부 외부 할 것 없이 전부 난잡하다.
“흠. 여기에 있을 거라고 했는데.”
나는 잠시 고민하다 숨을 크게 들이쉰 뒤 외쳤다.
“나다! 나와라!!!!”
내 외침에 크리스가 대경실색하며 말했다.
“기. 김상식 님! 외부로 나올 때 소리를 최대한 죽이는 건 기본 중에 기본입니다!”
“시간이 없다니까.”
언제 추적대가 올 줄 알고.
“덤으로 괴물이 숨어있으면 죽이고. 기습당하는 건 싫다고.”
“허...”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인기척을 살폈다.
“아직 도착 안 했나?”
다시 한번 고함을 지르려는 찰나.
한 집에서 중무장을 한 남자 4명이 밖으로 나와 나에게 다가왔다.
“어디서 왔어?”
딱히 암구호를 정한 것도 아니니 일단 내가 물어볼 수 있는 건 이 정도.
“김상식 주교님이십니까.”
대표로 나선 남자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내가 김상식이다.”
남자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리곤 고개를 들며 말했다.
“라오님. 로이님의 명을 받고 기다리던 중이었습니다.”
빙고.
나와 접촉하기 무섭게 떠날 채비를 하는 남자들.
“대충 상황설명 좀 부탁해도 될까?”
남자가 무기를 챙기며 말했다.
“설명은 가면서 하겠습니다. 대피소들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아서.”
나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예. 어제부터 순찰이나 원정을 핑계로 사제들이 동원되는데 그 수가 평시의 몇 배에 달합니다.”
남자가 가방을 등에 메며 말했다.
“그것도 런던 대피소를 중심으로 말이죠.”
“추적대구나.”
“예. 저희도 그렇게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제라고? 내 예상보다 늦었네.”
며칠 만에 나온 천둥교의 대응이다.
나를 찾고 추적대를 꾸리는 데까지 기껏해야 두 시간에서 길어야 반나절을 예상했는데 어제라면 무려 이틀이나 걸렸다는 말 아닌가.
“저희도 자세한 건 잘 모릅니다. 대피소에 숨겨둔 첩보원들이 외부에서 관찰한 걸 알려준 거라. 근처 대피소들이 런던 대피소를 중심으로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으니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어떻게 갈 건데?”
영국 전역엔 이미 수백 개가 넘는 대피소와 수천수만 개의 소형 대피소가 지천에 깔려있으니 천둥교의 눈을 피해 달아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서 웜홀까지의 거리는 대략 500km입니다.”
“걸어서 가려면 한나절이겠네.”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죠. 저희는 이날만을 위해 몇 년간 수없이 많은 준비를 해왔습니다.”
짐을 모두 챙긴 남자와 그의 동료들이 뒤뜰로 향했다.
“어?”
뒤뜰에 있는 건 누가 봐도 상태가 멀쩡해 보이는 차량 5대.
“차로 이동한다고?”
“예.”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하루도 안 걸리겠네.”
내 말에 남자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쉽지만은 않을 겁니다. 도로도 예전 같지 않고 무엇보다.”
남자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자동차와 연료를 보유하고 있는 건 천둥교니까요. 자신들에게 소속되지 않은 차량이 5대나 같이 움직이면 분명 알아챌 겁니다.”
“그럼 차라리 한 대로 움직이지 뭐 하러 5대나...”
불현듯 드는 불길한 기운.
“만약 추적을 허용하면 5대는 뿔뿔이 흩어져 추적대를 나눌 겁니다.”
한마디로 여기 모인 부대원들은 희생까지 각오하고 이 자리에 왔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한 가지만 묻자.”
“말씀하시죠.”
“혹시 너네도 로이한테 교화당해서 그런 거야?”
처음 보는 사람인 나를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지만 나와 로이를 연결시켜주고 자살한 마크나 이들이나 모두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던진다.
그래서 드는 합리적인 의문.
“교화당하지 않고서 어떻게 이렇게 쉽게 목숨을 내던지지?”
“저희는 교화당하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로이님은 저희에게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보여주셨을 뿐.”
보여줬다고?
“만나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 그리고 사실 뭐...”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두렵긴 합니다만 어쩌겠습니까. 이렇게라도 안 하면 방법이 없는데.”
“......그럼 로이에게 전해줘.”
내가 각성한 힘을 로이에게 알려줘 최대한 이들의 희생을 줄이는 방법으로 가야겠다.
“내가 이번에...”
“그만.”
남자가 내 말을 끊으며 말했다.
“저희에겐 아무런 정보도 주셔선 안 됩니다.”
남자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만약이지만 천둥교에게 잡혔을 때 고문당해 발설할 수도 있으니까요.”
“...정말 교화가 아니구나.”
“물론입니다.”
자발적인 희생.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까지 하도록 만들었을까.
로이는 대체 무엇을 이들에게 보여준 거고.
“시간이 많이 지체됐습니다. 이제 가셔야 합니다. 차량 안엔 차량용 무전기가 있으니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그걸로 하시면 됩니다.”
“...알겠다.”
나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 멀뚱멀뚱 서 있던 크리스에게 말했다.
“크리스.”
“아. 예.”
“넌 어떻게 할래.”
내 말에 크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어떻게 할 거냐니요?”
“안내역이 필요하기도 하고 내가 라오라는 것도 알아서 일단 데리고는 왔는데 이젠 돌아가도 좋아.”
크리스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 임무가 끝난 건가요?”
“어... 일단은?”
근데 이놈 돌아가면 무사하기는 할라나?
나랑 함께 있었단 사실이 들통나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텐데.
“흠. 어이. 거기.”
나는 로이의 부하에게 말했다.
“런던 대피소에도 너네 친구 있지?”
“예. 있습니다.”
“이놈이랑 이놈 가족들 좀 숨겨줄 수 있어?”
내 말에 로이의 부하가 난색을 표하며 말했다.
“그건 좀 곤란합니다. 천둥교 신도들은 각자의 위치가 모두 파악되기 때문에...”
“이놈은 깨끗해. 내가 다 청소했어. 아마 위치 추적은 안 될 거야.”
“하지만 이분의 가족들은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하. 이거 골치 아프네.”
안내역이 필요해서 잠시 데리고 왔는데 이제 이놈을 어떻게 하는지가 문제다.
나랑 같이 있었던 걸 알면 분명 라오와 그의 사제들이 가만두지 않을...
아니지.
어차피 지금 라오는 초능력자들과 김인호 눈치 때문에 맘대로 움직이지 못하잖아?
“크리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일단 대피소로 돌아가서...”
크리스에게 마지막 지시를 내리고 나와 로이의 부대원들이 탄 5대의 차가 웜홀을 향해 힘차게 출발했다.
“그나저나 웜홀 방벽은 어떻게 뚫어?”
차량용 무전기에 대고 말을 하자 부대원의 리더가 대답했다.
-그건 저희도 모릅니다.
“모른다고?”
-예. 그쪽에 도착하면 그쪽 부대원이 설명해줄 겁니다. 저희는 다음 계획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고문을 대비해 부대원 간 정보 공유를 차단한 건가.
-다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뭔데.”
-저희 모두를 희생하는 한이 있어도 무조건 라오님을 미국으로 보내야 한다는 것.
한국 본단 대피소 라오의 방에선 라오가 이를 갈며 화를 내고 있었다.
“장지후 이 새끼...”
그렇게 한참을 씩씩거리던 라오가 머리를 움켜쥐며 말했다.
“화내는 것조차 눈치를 봐야 한다니.”
여전히 라오의 목에 달려있는 기계장치가 라오의 움직임을 막고 있었다.
그때 한 사제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들어와 말했다.
“라오님.”
라오가 고개를 번쩍 들어올리며 말했다.
“찾았어?”
“예. 런던 대피소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당장 추적해. 절대 죽이면 안 된다. 생포해서 내 앞에 데려와!”
“예. 그런데 초능력자와 시민들 때문에 함부로 움직이기가...”
라오가 이를 갈며 말했다.
“젠장! 젠장!!”
장지후와 김인호는 치밀했다.
전 세계의 대형 대피소엔 모두 초능력자들이 배치되어 있어 만약 대피소 내 이상한 움직임이 포착되면 바로 김인호에게 알리도록 시스템을 구축해둔 것이다.
그렇기에 라오는 비밀리 대피소의 사제들을 최대한도로 동원했지만 그 수는 평시에 몇 배가 고작.
전 사제를 추적대에 합류시켜도 모자랄 판국에 겨우 평시 순찰 도는 사제의 몇 배가 고작이라니.
게다가 연락을 주고받는 것조차 비밀리 저녁에만 이루어지니 명령의 전달도 늦어진다.
“상태창.”
라오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상태창을 바라보았다.
“상태창이라도 멀쩡했다면...”
라오의 눈에 비친 상태창은 노이즈로 가득했다.
“어떻게든 잡아 와. 절대 놓쳐서는 안 돼!”
< 149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