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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패가 종말에 대비하는 법-147화 (148/188)

< 147화 >

“마음에 드십니까?”

나는 남자가 상인을 통해 구해온 위성 전화기를 이리저리 살피며 말했다.

“수고했다.”

“하하.”

눈물까지 훔치며 공짜로 구해줄 것처럼 말했던 상인이지만 그 역시 냉정한 종말 세상을 견뎌온 생존자.

연민은 연민이고 거래는 거래라며 제법 많은 양의 총알을 받고서야 위성 전화기를 팔아주었다.

“저...”

남자가 상자 안에 남은 총알을 힐끔 보며 말했다.

“남은 건 돌려주시는 건가요?”

나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식량도 사야 되고 무기도 사야 돼.”

“......”

나는 남자의 시무룩한 표정을 무시하고 위성 전화기의 주파수를 맞추어 나갔다.

“오케이.”

주파수를 맞춘 나는 전화기를 들어 올리며 긴장한 표정으로 로이와 연결되기만을 기다렸다.

“제발 받아라.”

로이와 초능력자 부대의 존재를 알게 된 후 수시로 연락을 시도했지만 단 한 번도 연락을 받은 적이 없던 로이.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던 그 순간.

-로이입니다.

“으아아아!!”

드디어 받았다!

“이게 얼마만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태연한 목소리로 내 말에 답하는 로이.

-오랜만입니다. 라오님.

“그래 내가...뭐?”

나는 지금 상식이의 몸에 강림해있고 내가 내는 목소리 역시 상식이의 목소리.

“역시 넌 뭔가 알고 있구나?”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로이가 웃음기 띈 목소리로 말했다.

-때를 기다리겠다고.

“그런데 나인지는 어떻게 알고 전화를 받은 거야?”

매번 연결을 거부당했었는데.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괴물이 나오기 전부터 종말을 준비해왔습니다. 위치 추적 기술쯤이야 간단하죠. 지금 계신 위치가 영국이더군요.

로이가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불과 며칠 전에 연락이 왔을 때만해도 한국이었는데 말이죠.

“제법 머리 좀 굴렸네. 아무튼 로이.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 좀 해봐.”

라오의 목적.

로이가 말하던 진정한 종말.

그리고 이 상황을 타계할 방법까지.

-우선 통화로 말씀드리기엔 너무 길고 위험합니다. 라오의 추적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건...그렇지.”

나만해도 라오에게 당하기 전 로이와 연락만 될 경우 바로 위치를 파악할 수 있도록 장치를 마련해뒀었다.

-우선 저희 쪽으로 오십시오.

“나도 그러고는 싶은데...너네 미국 아니야?”

-후후후. 라오님은 종말을 대비하실 때 몇몇 국가에만 준비하셨습니까?

“그건...아니지.”

설사 천둥교를 받아들이지 않은 나라에도 사제들을 투입시켜 종말을 대비해왔었다.

-물론 미국이 가장 많은 초능력자들을 보유하고 있지만 영국에도 저희 부대원들이 잠입해있습니다.

“오!!”

듣던 중 반가운 소리.

-부대원들의 도움을 받아 미국으로 오십시오. 가장 빠르고 안전한 방법은 웜홀을 통해서 미국으로 오는 겁니다.

“그건 나도 알지만...”

영국의 웜홀은 무려 5개의 방벽과 수천 명의 초인 부대가 철통처럼 지키고 있고 웜홀 너머에는 전초기지까지.

로이의 부대원들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나 그 전력을 뚫고 지나간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모든 건 준비되어 있습니다. 제가 종말에 대비했던 방법은 라오님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쪽으로 모시는 걸 전제로 계획되어 있었으니까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역할이 있다는 뜻이겠지?”

-역할 정도가 아닙니다. 이일은 라오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도움을 드릴뿐이지요.

그리고 애써 외면했지만 사람이란 존재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올 때 엄청난 상실감을 느낀다.

“나만이 해결할 수 있다...”

인류의 정점에 있다 모든 것, 심지어 몸까지 잃어버린 나에게 로이의 말은 원동력이나 다름없었다.

“좋아. 나 장지후 아직 죽지 않았다고! 부대원들이랑 접촉하는 방법은?”

-일단 현재 계신 곳이 런던입니까?

“응.”

-런던 대피소 북쪽 방향에 치퍼 필드라는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그쪽으로 부대원들을 보내겠습니다. 혹시 강림한 사제의 이름이 뭔지 알 수 있겠습니까?

“김상식.”

로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못 알아볼 리는 없겠군요.

“그렇겠지.”

-아무튼 빨리 움직이십시오.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야 도주 확률이 높아집니다.

“알았어. 살아서 보자고.”

통화를 마친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 그래도 다행이네.”

막막하기만 했던 상황에 한줄기 빛이 내려왔다.

“어서 식량을 구해서 이동...”

“라...”

“응?”

내가 통화하는 걸 옆에서 들은 남자가 경악한 표정으로 말했다.

“라오님?!”

“시끄러. 동네 소문낼 일 있어?”

“김상식 주교님에게 강림하셨던 겁니까? 그런데 소문으론 강림스킬은 5분이 한계라고 들었는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내가 그걸 너한테 설명해줘야 할 이유는 없지.”

“허...”

나는 총알이 들어있는 상자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따라와. 원정준비 해야 돼.”

남자가 울상이 된 표정으로 텅텅 빈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고맙다 잘 썼어.”

나는 남자의 총알로 상식이의 몸을 보호할 최소한의 방어구와 총기 그리고 몇 자루의 대검과 식량을 사 모았다.

“어떻게 정말 하나도 안남기고...”

“남은 게 왜 없어?”

나는 내 주머니에 가득 찬 총알을 보여주며 말했다.

“총알은 원래 쏘라고 있는 거야.”

“...하아.”

“가자.”

내 말에 남자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예?”

“가자고.”

“저요?”

“그럼 너 말고 누가 또 있어?”

남자가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제. 제가 왜 따라갑니까?”

“그럼 설마 내가 널 그냥 보내줄 거라고 생각했어?”

팔다리가 부러진 다른 놈들은 몰라도 이놈은 내가 라오라는 사실까지 알고 있다.

게다가 눈치도 빠른 게 데려가면 분명 쓸데가 있겠지.

“싫습니다!”

“거절은 거절이다.”

나는 싸움전문이지 생존 전문이 아니라고.

이놈처럼 종말 후 세상에 적응한 생존자의 지식과 경험이 필요하다.

나는 뒷걸음질 치는 남자의 목덜미를 붙잡고 말했다.

“다 이유가 있으니까 그냥 잔말 말고 따라와. 설명하기 귀찮아.”

그렇게 급하게 시작된 원정.

나는 지도를 보며 중얼거렸다.

“치퍼 필드까지 여기서 대략 100km. 한 이틀이면 주파할 수 있겠네.”

“이틀이요!?”

“어. 좀 빨리 가야해서.”

언제 라오가 눈치 채고 사제들을 파견할지 모른다.

“어디 자동차 구할 곳 없나? 오토바이나.”

내 말에 남자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걸 어디서 구합니까?”

“못 구해?”

자동차랑 트럭으로 물건도 실어 나르고 그랬었는데?

“멀쩡한 차량은 전부 천둥교가 가지고 있는데다 기름은 또 어디서 구하시게요?”

“주유소를 털거나 길가에 버려진 차에서 뽑아 쓰면 안 돼?”

좀비 영화 보니까 그렇게 하던데?

“그거야 처음에나 가능했지 벌써 몇 년이나 지났는데 사람들이 그걸 내버려뒀겠습니까?”

“그런가?”

“차량을 유지하고 사용하는 건 천둥교나 가능하지 저희 같은 일반인은 불가능 합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걸어가는 수밖에.”

나는 걸음을 재촉하며 말했다.

“가자. 부지런히 걸어.”

불만 섞인 표정으로 내 뒤를 따라오던 남자가 말했다.

“저기. 정말 라오님 인가요?”

“왜.”

“정말 라오님이라면 사제들 시켜서 자동차를 준비시키면 되지 않습니까? 왜 이렇게 몰래...”

“묻지 마.”

스토리가 좀 길어야지.

믿지도 않을 거고 굳이 설득할 이유도 없다.

“...아예.”

그렇게 또 한참을 말없이 걷던 남자가 말했다.

“혹시 암행을 나가시는 겁니까?”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새끼 말 존나게 많네. 그렇게 세상만사 하나하나 참견하단 제 명에 못산다는 거 못 배웠어?”

남자가 흠칫 놀라며 말했다.

“아니. 그냥 좀 궁금해서...”

“암행이든 뭐든 그게 너랑 뭔 상관인데?”

“혹시 암행이면 제가 옆에서 열심히 수행해드리려고 했죠.”

나는 어이없다는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를 수행해?”

“예. 비록 제가 잘못한건 맞지만 그거야 총알로 값을 치뤘지 않았습니까? 제가 암행에 도움이 되면 아주 작은 부탁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나 해서...”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하아. 뭔데 말이나 해봐.”

남자가 이때다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희 어머니를 초인으로 만들어주실 수 있습니까?”

본인도 아닌 어머니?

“너 효자 캐릭터였냐?”

“아. 아니. 그게 아니고 어머님이 좀 아프셔서.”

아.

노모 팔이는 진짜였나 보네.

“초인이 되면 건강해지지 않습니까. 어머니도 독실한 천둥교 신자니까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초인은 주로 전투가 가능한 젊은 남자들 위주로 임명되다보니 늘 순위에서 밀리셔서...”

“초인이라...”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거 별로 좋은 거 아니야.”

“예?”

“그런 게 있다.”

상태창에 귀속되어 노예처럼 살아가는 삶.

그게 사제와 초인의 진실이다.

설령 교화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라오가 현신하는 순간 모두 끝이다.

“잔소리 말고 따라와. 나 상벌 확실한건 알지? 잘하면 상 줄게.”

내 말에 남자가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조심하셔야 합니다.”

남자가 내 뒤를 따라 걸으며 말했다.

“대부분의 괴물을 박멸됐지만 가끔 멍청하게 집이나 건물에 갇혀있어 발견하지 못한 괴물들이 튀어나오는 경우가 있어서 말입니다. 아 물론.”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김상식 주교님에겐 한입꺼리지만 말입니다.”

“...괴물이라.”

나는 현재 초인이 아닌 일반인.

물론 상식이의 압도적인 육체와 무기가 있으니 몇 마리쯤은 가볍게 상대할 수 있지만 그게 전부다.

생각해보면 나는 사람들에게 간절함이 부족하다며 윽박질렀지만 사실 간절함이 가장 부족했던 건 나 아닐까.

안전한 대피소에서 풍족한 식사와 아늑한 잠자리를 누렸으며 밖으로 나가도 수만 명의 사제 군단과 위성 지원을 통해 완벽한 안전을 확보했다.

사실상 종말 이후 내 목숨이 위협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는 말.

“...조금 긴장되는데?”

생존자들이 늘 겪어온 생존의 위협.

이제 일상이나 다름없는 위협이지만 인류의 정점에 있던 난 오히려 이게 첫 생존 경험이다.

부족한 물자와 장비.

언제 나올지 알 수 없는 괴물의 위협까지.

“...사람들이 나와 공감해주지 않는다고 화를 냈지만 그 반대였을 수도 있겠다.”

난 그들이 느끼는 절박함과 공포를 경험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에이. 긴장이라니요. 천하에 김상식 주교님과 라오님이 힘을 합쳤는데 그깟 괴물 몇 마리가 대수겠습니까.”

태연한 남자의 말에 난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해라.”

괜히 말해줬다 겁에 질리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나는 손을 대검위에 얹으며 말했다.

“가자.”

일반인...이라기는 좀 그렇지만 일단 능력은 없으니 일반인이라고 치자.

아무튼 일반인 장지후의 종말 세상 첫 데뷔다.

“아. 그러고 보니 너 이름이 뭐냐?”

내 말에 남자가 놀란 눈으로 말했다.

“제 이름이요? 제가 알기로 신도리스...”

“닥쳐. 너가 아는 게 세상의 진실이라고 생각하지 마. 잔말 말고 이름.”

“아. 예. 크리스토퍼입니다. 친구들 사이에선 크리스라고 부릅니다.”

“그래. 크리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한번 살아남아보자.”

< 147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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