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화 >
“사. 살려. 살려주세요!!”
대피소가 생기고 장터가 활성화되기 이전에 생존자들이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전투와 생존 단 두 가지뿐 이었다.
특히나 김상식은 이 두 가지에 특화되어 있는 인물.
“닥쳐 이 새끼들아. 이제 시작이야.”
자고로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김상식은 언제나 앞장서서 괴물들을 박살내는 런던 대피소의 영웅이었다.
강인한 육체.
파괴적인 힘.
이 모든 것이 초인과 어우러져 김상식을 괴물조차 압도하는 괴물로 만들었다.
“기. 김상식 주교님.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남자들이 그런 김상식의 이상한 점을 발견한건 장터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장터 중앙에 무표정한 얼굴로 서서 사람들이 물물교환 하던 모습을 바라보던 김상식.
그 위풍당당한 모습에 사람들은 더욱 안심하며 거래를 이어나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거래하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던 김상식이 옥수수를 파는 상인에게 다가가 종말 전 사용했던 영국의 파운드 지폐를 내미는 게 아닌가.
상인과 사람들은 당연히 김상식이 장난을 친다고 생각해 다들 웃고 넘어가려했지만 김상식이 다른 상인에게도 다가가 지폐를 내밀었다.
사람들이 김상식의 기행에 점차 당황해 할 때 대피소에서 보고를 받은 김석주가 튀어나와 김상식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 이후로 김상식은 다시 상인들에게 지폐를 내미는 것을 멈췄지만 남자들은 그런 김상식에게서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떻게 안거냐?”
김상식에게 멱살을 잡힌 남자가 버둥거리며 말했다.
“그. 그게...”
“하아.”
옥수수가 그렇게 먹고 싶었나.
상식이는 아버지로부터 물건을 살 땐 돈을 건네야하고 그냥 가져오면 안 된다고 철저히 교육을 받았다.
그렇게 강제로 돈의 가치를 주입교육 시킨 덕분에 상식이는 사람들의 이목을 받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으니까.
아주 올바른 교육이다.
아니.
올발랐었다.
“내가 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석주가 잠시 방심한 사이에 벌어진 일.
충분히 단순 해프닝으로 끝날 일이었지만 이놈들의 눈치가 보통이 아니다.
“그. 그날부터 쭉 관찰하며 크게 눈에 띄지 않는 선에서 조금씩 실험을...”
나는 주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팍씨.”
“히이이익!!”
“내가 실험체야? 어디서 실험 실험 거려? 한번만 더 그 지랄하면 죽여 버린다.”
“죄. 죄송합니다.”
남자가 팅팅 부은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 아무튼 계속 관찰하다 어느 정도 확신이 섰을 때 접근했습니다.”
“그리고 꼬드겨서 과자랑 고기랑 교환했고?”
남자가 내 눈치를 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에라이씨. 세상이 이지경이 되어도 사기꾼 새끼들은 박멸이 안 돼 박멸이. 고기 다 어쨌어?”
“...파. 팔았습니다.”
“사기꾼 새끼.”
입이 성하게 움직이는 건 이놈 하나뿐.
나머지는 팔다리가 꺾이고 내 주먹에 모두 이빨이 나간 채 바닥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혼내주려 고는 했지만 사실 이 정도까지 팰 생각은 아니었다.
“힘 조절이 쉽지 않네.”
원래 몸일 때 지금보다도 힘이 더 강하긴 했지만 그때 내가 일반인을 상대로 주먹질을 할 일이 없지 않은가.
화를 못 참고 몇 대 쥐어박은 건데 저 꼴이 날줄이야.
내가 주먹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자 남자가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저. 저기.”
“뭐.” “한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싫은데.”
남자가 바닥에 넙죽 엎드리며 말했다.
“제발 교화형 만은 피하게 해주세요! 제가 어떻게든 갚겠습니다!”
아.
맞다.
범죄자는 모조리 교화형이었지.
“저에겐 노모와 여우같은 마누라 그리고 토끼 같은 자식까지...”
“어떻게 사기꾼들은 레파토리가 다 똑같냐. 야.”
나는 남자의 머리채를 잡고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내가 너 같은 놈 한두 번 본줄 알아? 위기 모면하려고 별수를 다 쓰네.”
“저. 정말입니다!”
“정말이든 아니든 그건 내 알바 아니고.”
그나저나 진짜 이놈들을 어떻게 해야 하지?
“흠.”
이놈들은 나.
그러니까 김상식이 이상하다는 걸 처음으로 알아챈 일반인임과 동시에 말문이 트인 걸 처음으로 알게 된 놈들이다.
라오의 추적을 따돌려야하는 입장에서 원래라면 이놈들을 모조리 쳐 죽여야 하는데.
“야.”
“예. 예.”
“살고 싶냐?”
“예. 예....예?”
남자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살고 싶다니요? 교. 교화형 아닙니까?”
“내가 해보니까 교화 그거 할 게 못되더라고.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나는 주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내가 아주 친절하게 골로 보내주마.”
“히이이익!!!”
나는 주먹을 들어 올린 채 남자에게 말했다.
“살고 싶냐.”
“사. 살고 싶습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가진 거 다 내놔.”
“이야.”
나는 천막 뒤에 숨겨져 있던 상자 여러 개를 확인하고 미소를 지었다.
“제법인데?”
상자 안에는 현재 화폐대신 가장 많이 쓰이는 총알이 가득 들어있었다.
유통기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유사시 전투에도 사용되는 만능 화폐.
나는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더 있어?”
“어. 없습니다.”
“구라치면 진짜 뒤진다.”
남자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 정말입니다!”
나는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다 말했다.
“일단은 믿어보지 뭐.”
계속해서 이어진 안전한 거래.
여러 명과 공동생활을 해야 하는 소형 대피소.
종말의 시대에 가진 재산을 보관하기 가장 용이한 곳은 바로 자신의 품이다.
따로 은신처를 둬 보관했을 수는 있으나 그것까지 털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야.”
남자가 주눅 든 표정으로 말했다.
“예...”
“기분 풀어. 사기치고 번 돈이잖아.”
내 말에 남자가 울컥하며 말했다.
“조금. 아주 조금 바가지를 씌우긴 했어도 사기꾼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닙니다!”
“조금이 어느 정돈데?”
내 말에 남자가 흠칫 놀라며 말했다.
“두. 두 배 정도?”
“두 배가 조금이냐 이 씹새야.”
“히익!!”
그런데 겨우 두 배라.
나가면 바로 확인될 텐데 이제 와서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 테고.
나는 일단 남자들을 통해 내가 그동안 보고받아 왔던 런던 대피소와 내 눈에 보이는 런던 대피소의 갭차이를 해소할 필요가 있었다.
“고기 값이 요즘 얼마나 하지?”
“100g에 총알 10발입니다.”
어?
그거 밖에 안 해?
“야. 혹시 대피소 말고도 가축 키우는 곳이 따로 있어?”
내 말에 남자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가축을 키운다고?” “예?”
당연한 걸 묻는 날 이상하게 보는 남자와 그 당연한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
“뭐지?”
나는 남자의 말을 듣고 경악했다.
“조. 종말 몇 년차라고?”
“4...4년차라고 말씀드렸는데...”
4년? 4년이나 지났다고?
내가 라오에게 몸을 빼앗긴 게 대략 1년 조금 지났을 땐데?
나는 자리에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그랬구나.”
시간이 흐른 거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 유수와 같이.
“...괘. 괜찮으십니까?”
“...너 사기꾼치고는 괜찮은 놈이구나. 사기꾼치고는.”
종말 전 없는 것도 있다고 뻥치며 팔아먹는 사기꾼들이 즐비했는데 사기 대상의 지능이 떨어진다는 것도 알면서 겨우 2배 띄기 그것도 실제로 물건 거래를 했다면 사기꾼치고 약한 거는 맞다.
그렇다고 사기꾼이 아닌 건 아니지만.
“사. 사기꾼치고 라니요.”
“야. 지금부터 아가리 닥치고 3년 동안 있었던 일 말해봐.”
“아. 알겠습니다.”
3년 동안 별다른 사건 사고는 없었다.
대피소를 만들고 영역을 넓히고.
그렇게 41개국은 완전히 국토를 수복한 걸 넘어 어설프게나마 외부와 차단하는 장벽 건설까지 시작됐고 수 십 여개의 국가도 예전 한국처럼 내부 괴물을 완전히 소탕하지는 못했지만 소형 대피소를 통해 대피 체계를 완전히 갖춘 채 농사를 하고 있는 수준.
“...라오 일 잘했네.”
딱 내가 하려던 건데.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모두가 라오님 덕분입니다.”
나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꿀밤을 날렸다.
“악!!!”
물론 김상식의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꿀밤이 보통꿀밤일리는 없지만.
“내 앞에서 라오 칭찬 하지마.”
그 개새끼랑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알아?
“먼저 라오님이 일 잘했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게 슬슬 대드네. 내가 니 친구냐?”
“히익!!” “아무튼 대충 상황 파악은 됐고.”
자. 그럼 이제부터 난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최종목표는 내 몸을 되찾는 거지.
“...방법을 모르겠네.”
일단 나오기는 나왔는데 무슨 수로 돌아가지.
게다가 돌아간다 해도 그때 느꼈던 라오의 막대한 힘을 상대할 자신이 없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고민하다 말했다.
“야.”
“예...”
“만약에 너한테 집이 있어. 태어날 때부터 살아온 아주 정든 집. 그런데 누군가...음. 그러니까 시위대 리더가 내 집으로 들어와 나보고 당장 꺼지래.”
남자가 말했다.
“아주 개념이 없는 놈이군요. 상도덕도 모르는 놈.”
“그렇지? 그런데 이 리더가 하는 말이 이 집 옆에 정부의 비밀 기관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거야. 그리고 자긴 그걸 막아야하고.”
“저런. 그런 기구한 스토리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 그런데 말이야. 집을 빌려달라는 것도 아니고 무작정 대의를 위해서라며 나를 내쫓으려하는데 이 새끼가 허언종자일수도 있는 거 아니야. 음모론자거나.”
“그렇죠. 너무 사람을 쉽게 믿으면 안 됩니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집은 무조건 되찾는다는 가정 하에.”
“어...”
남자가 고민하다 말했다.
“음모를 막은 뒤에 집을 되찾으면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음모를 막는데 막 20년 걸려. 한국에선 집소유자가 아니어도 한 장소에 20년 넘게 거주하면 거주권이라는 게 생겨서 집주인이 함부로 나가라고도 못해.”
남자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뭐가 그렇게 디테일하면서도 황당한 상황이 있습니까?”
“그런 게 있으니까 대답이나 해.”
남자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일단 도움을 요청해야겠죠. 지인이나 친구들에게.”
“지인...친구...”
김인호, 박종문.
그리고 진정한 종말을 예지했던 미국의 초능력 부대 대장 로이.
“20년 뒤에는 내쫓지 못한다면서요. 아무리 좋은 일을 위해서라지만 내 희생이 담보되어야 한다면 전 안합니다. 차라리 내가 직접하고 말지.”
“그렇지? 야. 너 생각보다 말 통한다, 야.”
“헤헤헤.”
“그래서 말인데...”
나는 남자의 목덜미를 집어 들며 말했다.
“넌 이제부터 내 입이다.”
“통신기요?”
종말 전 통신기술자로 일했던 상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통신기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곳은 없을 텐데.”
남자가 나를 힐끔 바라 보았다.
‘없으면 찾아야지.’
통신기를 구해 로이와 연락을 시도한다.
분명 로이는 무언가 알고 있다.
때가 되면 알거라며 직통 연결이 가능한 주파수까지 건네주지 않았나.
난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생각했다.
“...그. 그럼 찾아주거나 있는 장소를 알고 있는 사람 있습니까?”
내 의중을 단번에 파악한 남자가 상인에게 말했다.
“뭐라도 좋습니다. 꼭 필요합니다.”
“어...범위는요.”
남자가 나를 힐끔 바라 본다.
‘여기서 미국까지는 닿아야지.’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상인에게 말했다.
“아주 멀리. 아주 멀리까지 닿아야합니다.”
“그러니까 얼마나요. 10km? 50km?”
남자가 다시 나를 힐끔 바라 보았다.
‘여기서 미국까지. 음. 지구 반대편까지 닿는 통신기.’
“음...”
남자가 고민을 하며 말했다.
“바다건너...? 까지?”
이놈 눈치가 보통이 아니네.
“바다 건너요? 그럼 일반 통신기로는 어림도 없고 대피소 내 통신실이나 위성통신기 밖에 안 될 거 같은데요?”
그러고 보니 로이와 연결을 시켜주었던 마크도 위성 통신기를 사용했었다.
“어디 구할 곳 없나요?”
“그거 구할 곳이야 많죠.”
“오. 다행이네요.”
“천둥교 대피소마다 설치된 게 전부 위성 전화기인데.”
“......”
남자가 나를 힐끔 바라본다.
사제 그것도 고위사제인 니가 그것도 몰랐냐는 눈빛.
하지만 난 당당하다.
‘난 디테일까진 몰라.’
그저 시키고 전문가에게 일임했을 뿐.
아무튼 대피소에 설치된 게 전부 위성전화기라 이거지?
소형 대피소 하나 털어서 가져와야겠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네.
“그런데 그거 가져다 어디에 쓰시게요?”
“......친구가 미국에 있습니다.”
갑자기 시작된 남자의 급조된 레파토리.
“친구와 전 떨어지면서 혹시 연락이 닿지 않을 땐 정해둔 주파수로 연락을 하자고 굳게 다짐했죠. 그간 저 살기 바빠서 찾지 못했는데 이제 여유가 좀 생기니 친구 생각이 납니다.”
남자의 말에 상인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그런 사연이...”
“친구야. 조금만 기다려.”
잘한다. 잘해.
“그런 사연이라면 힘을 써드려야겠군요. 대피소 전화기로 친구와 사적인 대화를 하기 힘드실 거 아닙니까. 대부분의 위성전화기는 천둥교가 가져가가지만 제 친구에게 부탁하면 중간에 하나정도는 빼돌릴 수 있을 겁니다.”
완벽해.
소형 대피소를 털어 라오에게 내 위치를 뿌리는 것보다 백배는 좋은 상황이다.
남자가 상인 몰래 나에게 엄지를 들어올렸다.
‘이 자식...’
생각보다 쓸 만하다.
< 146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