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화 >
“사. 상식아.”
상식이의 몸에 강림해버렸다.
차라리 모르는 사제라면 모를까 동생의 몸을 강탈하다니.
“...미안하다.”
상태창은 이미 내 손을 떠났다.
강림 스킬을 다시 사용할 방법이 없다는 말.
“상식아. 내가 내 몸 되찾고 반드시 다시 꺼내줄게. 나 믿지?”
물론 상식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하아.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상식이에게 미안한건 미안한 거고 일단 시급한 것부터 처리해야 한다.
바로 탈출.
상식이가 있는 곳은 아마도 런던 부근의 대피소일거다.
그것도 영국전체를 통괄하는 런던 최대의 피소.
“...대피소에만 최소 만 명이다. 최소.”
상식이가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지녔다지만 이제 사제도 아닌 일반인.
중급이나 상급이라면 모를까 나 혼자선 최상급 사제 하나도 버겁다.
“라오가 명령을 내리기 전에 빨리 도망치자.”
나는 다급히 방안을 샅샅이 뒤져 먹을 것을 찾았다.
“과자?”
침대 밑에 과자가 한 박스 나왔다.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 숨겨두고 몰래 먹었던 거야?”
세상에 종말이 닥치며 과자나 담배 같은 기호식품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상식이는 천둥교 최고 등급 사제인 주교.
당연히 상식이 역시 그 극소수에 포함되는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이 양은 너무 과하다.
“...니가 애냐?”
주교에겐 막대한 양의 식량이 배분된다.
아마 그 식량을 들고 장터에서 과자를 가지고온 생존자들과 물물교환을 한 게 분명했다.
이 과자들을 모아놓고 방에서 혼자 히죽 히죽 웃고 있었을 상식이의 모습이 연상됐다.
“...뭐 일단은 먹을 거니까.”
나는 가방에 과자들을 전부 때려 넣고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좋아.”
복도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나는 굳은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와. 이거 빡세네.”
사제로 가득한 대피소를 걸리지 않고 빠져나가려니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린다.
게다가 상식이의 힘은 결코 사제들 못지않았지만 나머지는 청각이나 후각은 아니었다.
“이렇게 불편했나?”
7배로 강화된 청력은 낙엽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고 강화된 시각은 바닥에 떨어진 바늘도 간단히 찾을 정도였다.
그런 감각에 익숙해져있던 내가 다시 일반인일 때 감각으로 돌아와 느껴지는 이질감은 내 행동을 더욱 굼뜨게 만들었다.
“끙.”
그렇게 살금살금 걸음을 옮기는데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상식 주교님.”
“헉!”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무방비 상태의 등 뒤를 타인에게 내어준 것이.
나는 황급히 뒤를 돌아 나를 부른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방에 계시지 않아서 한참을 찾았습니다.”
모르는 얼굴.
평소라면 상태창을 통해 단번에 이름과 계급을 알 수 있었지만 지금의 난 이 사제가 하급인지 중급인지 아니면 최상급인지 알 방법이 없다.
‘사. 상식이를 왜 찾는 거지? 벌써 들켰나?’
상태창을 자유자재로 다루던 나이기에 내가 상식이의 몸에 몰래 강림한 걸 라오가 금방 눈치체리라 생각은 했지만 너무 빠르다.
강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주교급 사제는 전 세계에 5,000명이 존재했다.
그런 주교급 사제를 하나하나 파악해야하니 못해도 한 두 시간 정도는 벌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
사제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김상식 주교님 왠지 당황해하시는 것 같은데... 이상하다.”
맞다!
상식이는 나와 동생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 앞에선 철저하게 무표정으로 대했었지!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사제를 내려다보았다.
“......”
무표정하고 과묵하게.
사제가 고개를 갸웃갸웃하더니 말했다.
“잘못 봤나?”
무슨 일인지 말해라.
라고 말하고 싶지만 상식이는 그렇게 길게 말하지도 상대방의 의문에 답을 주지도 않는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만 볼뿐.
“아무튼 뭐...김상식 주교님.”
“......”
“김석주 주교님께서 찾으십니다.”
석주...
나와 늘 함께 해왔던 석주.
하지만 석주는 완전히 교화된 주교급 사제.
상식이에게 했던 것처럼 내부의 신성력을 흡수하고 연결고리를 끊으면 괜찮아 질수도 있지 않을까?
“......”
잠시 고민을 했지만 역시 당장은 힘들다.
가능한지는 둘째 치고 석주하나 되돌려봐야 압도적인 전력비는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탈출하다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는 거 아닌가.
게다가 탈출하는 데에는 혼자가 편하다.
‘미안하다. 석주야. 내가 반드시 구하러 올게.’
“김상식 주교님?”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 안 가신다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 김상식 주교님이 김석주 주교님 초청을 거절해...?”
그것도 이상한거야??
“처음인데?”
나는 놀란 표정의 사제를 뒤로하고 빠르게 복도를 걸어 나갔다.
‘사제의 반응으로 보아 아직 걸린 건 아니다.’
만약 라오에게 걸렸다면 소환정도가 아니라 대피소 전체가 봉쇄됐을 테니까.
‘상식이의 계급을 이용해 빠르게 대피소를 탈출한다.’
석주 빼고 상식이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제는 이 대피소에 없으니까.
‘그나저나 김인호 반장은 무사할까.’
일부나마 힘을 되찾은 라오의 1순위 제거 대상이 나라면 2순위는 마스터키를 쥐고 있는 김인호다.
‘제발 무사하길.’
“어? 김상식 주교님.”
‘히익!’
약해진 감각 탓에 또 접근을 허용했다.
“오늘도 장터 가십니까?”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라오한테 몸을 빼앗겼을 때랑 움직일 수 있다는 거 빼고 달라진 게 없잖아?’
워낙 말수가 극히 적어 많이 말해야 한 두 마디 수준인 상식이다.
덕분에 방문을 나선 이후로 지금까지 단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그러시군요. 호위를 붙여드릴까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사제가 나를 보며 피식 웃고는 말했다.
“하긴 누가 천둥교 최강 김상식 주교님을 해하겠습니까.”
맞는 말이긴 하지.
합일을 사용한 김상식은 괴물 그 자체였으니까.
“얼마 전에 괴물 500마리를 단신으로 찢어죽이시던 모습이 잊혀지질 않습니다.”
뭐? 500마리를 혼자서?
“그것도 초인 장비 없이요.”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경악했다.
‘초인장비도 착용 안하고?’
역시 상식이가 괴물은 괴물이다.
‘난 그런 보고 못듣....아.’
최근엔 리틀이에 집중하느라 라오가 상태창 열 때를 빼고 의도적으로 전부 무시했었으니 모를 수도 있겠다.
“그나저나 이상하군요.”
사제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평소 느껴지던 주교님의 아우라가 좀 뭐랄까. 희미합니다.”
사제의 말에 나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씨발. 좆 됐다!’
이걸 간과했다니.
사제들은 천둥교란 큰 울타리에 묶여 서로가 서로의 형제임을 느낀다.
저 사제로선 평소 느끼던 존경심이 느껴지질 않으니 이상할 수밖에.
“이상하네.”
“......”
어떡하지?
일단 뚝배기 날려?
하지만 이 사제가 높은 계급의 사제라면 아무리 상식이라도 상대하기 벅차다.
그러는 사이 다른 사제들이 합류하여 제압되면 그걸로 끝.
내적갈등에 시달리는 사이 계속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던 사제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기분 탓이겠죠.”
뭐?
이렇게 쉽게 넘어간다고?
사제와 사제가 서로 간에 느끼는 이 형제애는 사제들을 똘똘 뭉치게 만드는 것은 물론 사칭하는 사람들을 구별해내는 방법이기도 했다.
“......”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대략 삼십분 만에 대피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와.”
말하면 안 된다는 것도 잊은 채 입이 떡하고 벌어진다.
“뭐냐 이거.”
대피소 정문 앞에 바글거리는 인파들.
“쌉니다! 싸요!”
“총알 삽니다! 총알!”
내가 알던 대피소 장터가 아니었다.
수백 개의 가판대가 널려있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물물교환을 하고 있다.
“...한국 본단 보다 북적이는데?”
말이 안 되는데.
한국 본단은 41개국 중에서도 가장 먼저 국토를 수복하고 장터를 연 최대 규모의 대피소다.
이곳 대피소도 영국 최대를 자랑하지만 천둥교의 수장인 내가 있던 대피소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런데 이곳 장터는 내 기억 속 한국 본단 장터보다 몇 배는 크고 몇 배는 활발하다.
“짚신 팝니다! 짚신!”
짚신.
영국에서 짚신을 보게 될 줄이야.
한 남자가 상인에게 다가가 말했다.
“짚신 하나에 얼마에요?”
“예. 권총탄 3발. 또는 소총탄 2발입니다.”
남자가 주머니에서 탄알을 꺼내 상인에게 내밀었다.
“많이 파세요.”
상인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상인도 손님도 가격에 대한 별다른 흥정이 없다.
대략적인 시세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있다는 말.
“...이건 말이 안 되는데.”
장터를 막 열었을 당시 워낙 거래량이 적고 화폐가 아닌 물물교환으로 거래를 하다 보니 물건 값은 사고파는 사람들 마음이었다.
그 후 장터가 커지고 대피소간의 거래도 성사되며 어느 정도 틀을 잡아가긴 했지만 여기 장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설마...”
그때 한 남자가 조용히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김상식 주교님.”
김삭식을 아는 사람인가?
남자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나오셨군요.”
“......”
남자가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물건은 준비해뒀습니다.”
물건? 뭔 물건?
남자는 내가 메고 있는 가방을 힐끔 보더니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도 두둑이 가지고 오셨군요.”
남자가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이쪽으로. 거래 장소를 마련해뒀습니다.”
“......”
뭐지.
흡사 마약이라도 거래하는 듯 한 이 비밀스런 접촉은.
원래라면 다 무시하고 도주를 했겠으나 나는 오히려 이게 기회란 생각이 들었다.
본단에서 많은 정보를 보고 받긴 했으나 여기 대피소에 생활 중인 사람만큼 이 근방에 대해 정확한 사람이 또 있을까.
게다가 은밀하게 접촉을 해온 걸로 보아 정상적인 거래는 아니겠지.
“...원래 정보는 저런 시정배들을 털어서 얻는 게 빠르지.”
나는 남자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남자를 따라 들어간 한 천막 안엔 3명의 남자가 나와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이쿠. 김상식 주교님!”
남자들이 나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입니다.”
저 인사에 가장 상식이 다운 반응은 뭘까.
“......”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살짝 고개만 끄덕였다.
“하하. 역시 김상식 주교님.”
나를 안내한 남자가 양손을 비비며 말했다.
“자. 이제 거래를 시작해볼까요?”
남자가 구석에 숨겨둔 상자를 꺼내 내밀었다.
“확인해 보시죠. 오늘 물건이 아주 좋습니다. 구하느라 아주 애먹었습니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상자를 받아 들어 뚜껑을 열었다.
“......?”
과자?
상자 안엔 과자 10봉지가 들어있었다.
“아시다시피 요즘 이 부근엔 더 이상 과자를 찾아보기가 힘들 지경이라서...멀리까지 나갔다왔습니다. 하하.”
과자를 무슨 암거래하듯 다루는 거야?
아무리 기호식품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나는 과장 봉지를 들어올렸다.
이거 유통기한도 지났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군요.”
남자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저희 물건 확인이 끝났으니 이제 김상식 주교님 차례입니다.”
그래.
도대체 상식이는 과자의 대가로 뭘 지급했길래 이렇게 신이들 나있어?
나는 메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내려다놓았다.
남자가 기대에 찬 표정으로 양손을 싹싹 비비며 말했다.
“자 확인해보겠습니다.”
그리고 가방을 열어 재낀 남자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어?”
안에는 당연히 과자밖에 없었다.
“환불.”
내 말에 남자가 당황해하며 말했다.
“화. 환불이라니요.”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한 번 말했다.
“환불.”
남자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때 교환한 고기가 지금까지 남아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고기?
과자랑 고기를 교환했다고?
“허...”
그나마 과자는 유통기한이라도 길어 유통이라도 되지만 고기는 아니었다.
사람들이 먹을 식량도 부족한데 가축에게 먹일 사료가 어디 있겠나.
강아지 사료도 장터에서 사람 식량으로 취급되는 마당에 대피소 내부에서 고위 사제용으로 소량만 생산하는 고기를 겨우 과자랑 거래한다고?
“아이고. 제가 이번엔 그냥 한번 드리겠습니다.”
남자가 나에게 상자를 내밀며 말했다.
“다음엔 꼭 고기를 가지고 오셔야합니다. 아셨죠?”
마치 나를 달래는 듯 이야기하는 남자.
“이제 좀 이해가 가네.”
내 입에서 긴 문장이 튀어나오자 남자들이 경악했다.
“기. 김상식 주교님이 저렇게 긴 말을?”
“이 새끼들이 애 순진한 거 어떻게 알아가지고 이용해먹던 거구나.”
나는 바닥에 침을 뱉으며 말했다.
“죽었다고 복창해라. 이 씹새들아.”
< 145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