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화 >
라오는 자신이 종말을 막겠다고 말했다.
일단 그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둘째치고 라오의 행동에서 많이 보았던 누군가의 향수가 느껴졌다.
바로 나.
나였다.
종말을 막는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의 자율 의지를 박탈하고 오로지 목적만을 위해 사소한 희생은 감수한다.
라오와 나는 다를 바가 없었다.
단지 이번엔 그 희생자가 나일 뿐.
목적이 옳다고 해서 과정이 정당화 되지는 않는다.
난 소수의 희생으로 다수의 생존자를 구한다며 스스로 위안 삼아 왔지만 아니었다.
인류 전체를 놓고 보자면 맞는 말이지만 희생당한 소수에겐 그것이 그의 전부이자 모든 것이었다.
‘당해보니 내가 얼마나 나쁜 새끼였는지 알겠네.’
후회한다.
후회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다.
‘후회할 짓을 했으면 바로잡아야지.’
이대로 라오와 로이에게 모든걸 떠넘기고 가만히 있을 생각은 추후에도 없다.
‘라오. 넌 나에게 협조를 구해야 했어.’
모든 진실을 알리고 파트너로서 동반자로서 협조를 구했어야 한다.
‘종말? 막아도 내가 막아.’
나 깡패 장지후.
죽으면 죽었지 이렇게 이용만 당할 생각 없다.
발악.
사실 뭐.
발악이란 말도 웃기다.
멀뚱멀뚱 라오의 시선을 공유하며 속으로 공허한 외침만을 날린 것 뿐이니까.
아무튼 나는 발악 해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돼.’
상태창과 통제력을 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이제 여기도 어느 정도 수복 되었군.”
“모두 라오님의 덕입니다.”
사람들의 대화 지켜보는 것도 질린다.
‘명상이라도 해볼까.’
뭐. 내면을 관조하여 어쩌고 저쩌고.
무속인들이나 도인들 보면 막 눈감고 명상하다 깨달음을 얻고는 하지 않나.
물론 나도 허무맹랑한 소리인 거 안다.
하지만 사실 이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기도 하고.
게다가 처음 몸을 빼앗겼을 때만해도 패닉에 빠져있었지만 시간이 좀 지나니 평정을 되찾았다.
라오가 방을 나서는 김인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젠장. 이놈의 목줄만 없었어도...”
라오는 기계 장치에 발목 잡혀 별다른 짓도 못하고 있고 현신 스킬 또한 라오가 하는 짓을 보니 생각보다 많은 신성력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았다.
하긴 무려 신을 현신시키는데 겨우 레벨업 하는 거랑 같을까.
나는 조용히 평안한 마음을 유지시키고 명상을 시작했다.
‘아아. 후회로 점칠된 삶. 마음의 평안. 나는 행복합니다. 아아.’
티비에서 본건 있어서 아무 말이나 해보았다.
당연히 아무런 변화도 없다.
‘기도나 해볼까.’
당연히 내 몸을 차지한 라오가 아닌 날 위한 기도.
‘나는 라오다. 내가 라오다. 사람들을 구하고 힘을 준건 저 라오가 아닌 나야.’
역시나 변화는 없다.
‘에휴. 그래 이게 먹힐 리가 없지.’
애시당초 내가 가진 힘은 상태창 덕분이었으니까.
‘뭐라도 좋으니 해봐야...’
그런데 그때.
-꿈틀.
어?
‘뭔가 움직인다아아!!!!’
그냥 해본 거였다.
말 그대로 그냥.
그런데 명상과 기도를 했는데 내 몸 안에 무언가가 꿈틀하며 움직이는 게 느껴진다.
‘이게 뭐야?’
딱 무엇이라고 정의 내릴 수 없는 이상한 느낌이 느껴진다.
그냥 내 안에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는 느낌.
보이지도 않고 라오 역시 별다른 변화는 없지만 분명히 느껴진다.
‘나 혹시 신기 있었나?’
아니면 알게 모르게 내공이...아니 도대체 이게 뭐지?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꿈틀.
또 미약하게 움직이는 무언가가 느껴진다.
라오에게 몸을 빼앗긴 이후 처음이었다.
내 의지로 무언가를 움직인 것은.
‘영혼? 내공?’
그럴싸한걸 다 가져다 붙였지만 이게 뭔지 도통 감이 오질 않는다.
‘어차피 할 수 있는 일도 없는데 이게 뭔 지나 알아볼까?’
‘네 별명은 이제 꿈틀이다.’
-꿈틀.
내 의지에 따라 조금씩 꿈틀거리는 꿈틀이.
‘넌 도대체 정체가 뭐냐?’
왜 이런 게 나한테 있는 거지?
‘넌 할 줄 아는 게 뭐야?’
-꿈틀.
그저 꿈틀 거리는 느낌만 느껴진다.
‘신기하긴 한데.’
이런 게 나에게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장지후.”
또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라오.
“절망스럽나?”
‘어...’
처음엔 그랬는데 이젠 뭐랄까.
꿈틀이 가지고 노는데 재미 붙여서 생각보단 참을 만 해.
“절망스럽겠지.”
내 말이 안 들리나 보네.
“후후후. 위대한 신의 여정에 함께한다는 게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보여주지.”
그래.
지껄여라.
난 꿈틀이랑 놀란다.
-꿈틀.
‘그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물론 내 의지에 의해 움직인 거지만 나는 마치 꿈틀이가 살아있는 생명체인마냥 말을 걸었다.
‘톰 행크스가 이래서 배구공을 윌슨이라 붙이고 말을 걸면서 놀았나 보다.’
톰 행크스는 무인도 나는 내 몸 안.
말을 걸 사람도 없고 들어주는 사람도 없는 혼자만의 공간에 갇힌 건 똑같다.
계속해서 시간이 흘러간다.
대피소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견고해지고 사람들간의 교류도 늘어났다.
더 많은 땅이 수복되었고 미국을 비롯한 일부 국가들도 서서히 41개국처럼 대피소를 중심으로 인류의 문명을 회복해나가고 있었다.
물론 내가 아닌 라오에 의해.
‘흡!’
오늘도 난 꿈틀이를 움직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사실 할게 이것밖에 없어서기도 하고.
-꾸움틀.
‘오!’
평소보다 더 크게 움직이는 꿈틀이.
‘숙달된 건가? 뭔가 더 크게 움직이는데?’
발전 없는 수련만큼 재미없는 게 또 있을까.
슬슬 질려가던 차에 꿈틀이의 움직임이 더욱 커진 게 느껴지자 흥이 났다.
이 뭔지 모를 행위에도 발전이 있다는 뜻이니까.
‘흡!’
-꾸우움틀.
더 크게 움직이는 꿈틀이.
‘히야.’
내 의지에 응답이라도 해주는 듯한 기분이다.
‘넌 어떻게 생겼냐?’
혹시 징그럽게 생겼나? 아니면 귀엽게?
‘흐흐. 나도 정신을 반쯤 놨나 보네.’
그래도 꿈틀이 아니었으면 미쳐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망상만 하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당해본 사람만이 아니까.
‘그나저나 이용당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막상 내가 할 수 있는 건 꿈틀이를 움직이는 것 밖에 없네.’
바깥 세상 사람들은 지금도 라오를 나라고 생각하며 하루하루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가지만 나는 내 몸에 갇혀서 꿈틀이나 움직이며 시간을 보낸다.
한심하기는.
나는 다시 꿈틀이를 움직여 보았다.
-꿈틀, 꿈틀.
‘꿈틀아. 벌써 몇 달이나 지났어.’
세상은 나 없이도 잘만 돌아가고 있고.
‘난 도대체 뭐하고 있는 걸까? 꿈틀아. 넌 어떻게 생각해?’
-꿈틀.
그런데 꿈틀이가 평소보다 크게 요동치더니 꿈틀이의 일부가 뚝하고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흡!’
그리고 끊어진 일부가 나에게 흡수되며 이상한 고양감이 차 올랐다.
‘뭐. 뭐야?’
흡사 사제 임명을 했을 때 받는 고양감과 비슷한 느낌.
비록 그 강도가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약했지만 분명 무언가가 나에게 흡수되었다.
‘뭐지? 방금 그거 뭐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겠다.
‘다시 한번. 흡!’
그러자 다시 한번 크게 요동친 꿈틀이의 일부가 다시 떨어져 나와 나에게 흡수된다.
‘이것 봐라...’
뭔가가 일어나고 있다.
그것도 내 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꿈틀이를 흡수하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상조차 안되지만 할 수 있는 건 일단 해봐야 하지 않겠나.
‘흡!’
하루하루 꿈틀이를 흡수하는 양이 조금씩 늘어났다.
딱히 나에게 변화는 없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꿈틀이의 움직임이 커지고 흡수하는 양도 많아지는 게 느껴진다.
‘흡!’
꿈틀이를 움직인다.
-꿈틀.
꿈틀이가 움직이며 꿈틀이의 일부가 나에게 흡수된다.
그렇게 무한 반복.
어차피 난 이미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다.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는 거 꿈틀이를 흡수하는 것이 돌파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잡념조차 버리고 매일매일 꿈틀이를 흡수하는데 온 신경을 집중했다.
“교단 상태창.”
그때 라오가 교단 상태창을 띄웠다.
“계시.”
계시 스킬을 사용한 라오가 말했다.
“사제를 더 늘려라. 신성력이 더 많이 필요하다.”
나는 라오가 사제들에게 명령 내리는 것을 보며 생각했다.
‘거참 승질 더럽게 급하네.’
계시로 사제를 더 많이 만들라는 라오의 독촉은 매일매일 이어졌다.
‘사채업자보다 더 한데? 흡!’
라오를 관찰하는 한편 나는 끊임없이 꿈틀이를 흡수했다.
“장지후.”
‘어차피 내 말 듣지도 못하면서 왜 자꾸 부르는 거야?’
라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알겠지.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가끔씩 라오가 이런 식으로 말을 걸어오는데 하도 듣다 보니 지겨워서 하품이 날 정도였다.
계속 내가 절망 중 일거라며 아무것도 못한다며 깎아 내리는 라오.
‘흐음...’
이쯤 되니 뭔가 라오가 나를 경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마치 내가 얌전히 있기를 바래서 저렇게 끊임없이 말을 거는 듯한 느낌.
‘정말 뭔가 있나?’
나를 만나 희망이 생겼다 말했던 로이와 나에게 끊임없이 포기를 종용하는 라오.
‘내가 할 수 있는 건 꿈틀이 흡수하는 것 밖에 없는데.’
혹시 라오가 경계하는 게 내가 꿈틀이를 흡수하는 거?
뭔가 격 없어 보이는데...
“장지후. 나에게 복종해라.”
‘아. 시끄러워.’
나는 라오의 말에 신경을 끄고 꿈틀이를 흡수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흡!’
다시 한번 꿈틀이를 흡수하는 순간.
라오를 통해 상태창을 보고 있던 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뭐. 뭐야.’
꿈틀이를 흡수하자 상태창 위에 표기된 신성력의 양이 소량이지만 줄어드는 게 아닌가.
‘잘 못 본건가?’
“나를 따른다면 너에게 큰 보상을 내려주마. 초능력자? 초인? 그딴 것과 비교도 되지 않는 강대한 힘을!”
나는 라오가 거울을 통해 내 몸을 보고 있는 걸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다시 한번 꿈틀이를 흡수했다.
‘흡!’
그와 동시에 상태창에 표기된 신성력이 다시 조금 떨어지는걸 확인했다.
‘서. 설마.’
나는 내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꿈틀이를 느끼며 생각했다.
‘꾸. 꿈틀이 너 설마. 신성력이었어?’
신성력이 내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고?
다신 한번 꿈틀이를 흡수해 확인하려 했지만 라오가 상태창을 바라보기에 흡수를 멈췄다.
“흠.”
‘서. 설마 눈치 챘나?’
라오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현신하는 그날이 기대되는 군.”
‘눈치 못 챘어!’
이걸로 확신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라오는 내가 꿈틀이.
아니 신성력을 흡수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나를 계속 경계했던 거고!
그때 라오가 상태창을 끄고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말했다.
“음. 인간의 몸은 피곤하군.”
나는 라오가 상태창을 끈걸 확인한 뒤 다시 꿈틀이를 흡수했다.
희망이 보인다.
신성력을 흡수할 수 있어!
라오가 경계하는 이유가 뭐겠어.
자기한테 피해가 올 수도 있어서 그런 거 아니야!
이거다!
이게 답이다!
그리고 이날부터 라오와 나의 끝없는 눈치 싸움이 시작되었다.
< 139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