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화 >
모든 게 순조롭다.
가장 먼저 종말을 대비해온 41개국의 대피소들은 각각 도시국가 형태를 이루었고 조금씩 활력을 되찾아 갔다.
“옥수수 팝니다!”
대피소 인근에 생겨난 장터.
기본적으로 농작물은 모두 대피소 소유지만 배급 받은 식량과 주운 물건을 어떻게 소비할지는 생존자들 개인의 자유였다.
한 남자가 다가와 말했다.
“옥수수네.”
“예. 강원도 대피소에서 가져온 옥수수입니다. 여기 대피소는 쌀밖에 생산하지 않으니 별미일겁니다.”
남자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아. 이거 쪄먹으면 맛있을 텐데.”
옥수수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남자가 결심이 선 듯 말했다.
“두 개만 살게요. 와이프랑 하나씩 쪄먹어야겠다.”
그리곤 남자가 뒤에 있던 가방에서 여러 가지 물건을 꺼내 내밀었다.
“라이터, 건전지, 식칼...”
모두 폐허가 된 건물을 뒤져 찾아낸 물건들.
하지만 남자가 물건을 꺼낼수록 옥수수를 파는 상인의 표정이 심드렁하게 변해갔다.
상인이 관심 없어하자 잠시 주저하던 남자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여기요.”
남자가 내민 것은 바로 탄알.
그제야 상인의 표정이 변했다.
“보자. 권총 탄알 7발이군요.”
“예. 경찰서를 뒤지다 발견했습니다.”
“좋습니다. 이 정도라면 두 개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상인이 탄알을 향해 손을 뻗자 남자가 다시 탄알을 회수하며 말했다.
“전부다랑 바꾸자 고요? 제가 바봅니까?”
“한국 내 괴물이 씨가 말라서 탄알 가치 많이 떨어진 거 몰라요?”
상인의 말에도 남자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다고 괴물이 없는 건 아니죠.”
둘은 서로를 노려보며 기 싸움을 시작했다.
“탄알 4개에 옥수수 두 개.”
“에헤이. 이 양반 이거 순전히 날강도네. 좋아 인심 썼다. 6개에 두 개.”
“너무한 거 아닙니까? 옥수수야 먹으면 사라지는 거지만 탄알은 아니잖아요.”
아주 기초적인 물물교환이지만 그렇게 사람들은 조금씩 발전해 나가고 있었다.
“사고치는 놈 없지?”
미국의 주요 시설 확보를 완료한 나는 원정대를 떠나 웜홀을 통해 다시 한국으로 넘어왔다.
“예. 없습니다.”
“치안 유지 잘해. 장터가 유지된다는 건 우리 치안력을 믿어서 가능한 거니까.”
안전 거래조차 보장이 안 되는 장터에 누가 마음 놓고 장사를 하겠나.
“걱정 마십시오. 감히 라오님의 명령을 어길 사람은 없습니다.”
대피소의 규율은 단 두 가지.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마라.
라오의 말에 절대 복종하라.
그리고 이 규율을 어길 시 내려지는 벌은 단 한가지였다.
교화.
“사형 제도가 있을 때도 범죄자는 있었어. 방심하지마.”
“예. 라오님.”
“식량 수급은 어때?”
“대체적으로 양호한 편입니다.”
물론 나에게 보고하는 사제가 말한 양호란 표현은 종말 전 기준이 아닌 현재 기준의 양호였다.
즉 농작물 생산량이 대피소가 보호중인 생존자들을 굶기지는 않을 정도란 뜻이었다.
“괴물은?”
“지금도 놓친 괴물에 의해 사망자가 나오고는 있으나 소수에 불과하고 사람을 죽인 괴물은 발견즉시 추적해 섬멸 중입니다.”
처음 괴물로 뒤덮혔을 때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괜찮네. 다가오는 군집은 없어?”
내 말에 사제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보고 드리려 했습니다. 동해로 접근중인 괴물 군집이 발견되었습니다. 높은 확률로 한반도에 상륙할 듯 합니다.”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숫자는?”
“대략 20만 마리로 추정됩니다.”
“20만 마리라.”
원래라면 웜홀 방벽을 이용해 몰살시켰겠지만 현재 한국을 비롯한 대피소의 잉여전력은 전부 원정을 떠난 상황.
“괴물 경로에 따라 사람들을 대피시켜.”
괴물이 다가오면 대피소에 숨고 지나가면 다시 나오고.
나는 턱을 괴며 말했다.
“한반도 관통해서 지나갈 때까지 예의 주시해.”
“알겠습니다.”
사제를 돌려보내고 난 서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무뎌졌나.”
괴물 군집이 온다는 말에도 별다른 걱정이 들지 않는다.
마치 태풍 같은 자연재해를 대하는 느낌.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맞네. 태풍. 몰아치면 숨어서 지나가기만 기다리는 거.”
무뎌질 만도 하다.
그 동안 죽여온 괴물이 몇 마리이며 아직도 얼마나 많은 괴물이 지구상에 남아있나.
무슨 일이든 반복하다 보면 적응하는 게 사람이다.
“하아. 머리 아프네.”
그보단 그 놈의 진정한 종말이 걱정이다.
“마크도 죽었고 로이놈은 연락도 안받고.”
마크가 알려준 주파수로 끊임없이 연락을 시도했지만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나는 잠시 주저하다 중얼거렸다.
“마크는 왜 자살이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걸까.”
무엇으로부터 초능력자 부대를 지키기 위해.
“라오도 로이도 모두 진정한 종말을 말했어. 그렇다면 둘 다 목적이 같다고 봐도 되는 건가.”
하지만 라오는 신 역시 거짓말을 할 수 있다 말했다.
로이도 마찬가지.
어쩌면 둘 중 하나는 나를 속이고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둘 다 나를 속이고 있는 걸 수도 있고.”
나는 눈을 감고 고민하다 말했다.
“레벨을 올려야 하나.”
그렇지 않아도 의심스러운 라오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더욱 의심스러워졌다.
하지만 문제는 레벨을 올리지 않으면 교화를 취소시킬 수 없고 무엇보다 로이나 마크나 나에게 레벨을 올리지 말란 조언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종말이 라오와 관련 있고 레벨업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면 로이는 간단하게 한마디만 했으면 된다.
레벨을 올리지 말라고.
“골 때리네.”
이제 며칠 뒤면 레벨업에 필요한 신성력이 모두 모인다.
내가 교화 취소에 혈안이 된 건 나에 의해 교화가 된 사람들도 사람들이지만 무엇보다 내 동생들 때문이기도 했다.
나와 함께 동거동락 했고 가장먼저 사제가 되어 교화된 내 동생들.
동생들에게도 자유를 주고 싶다.
그래야만 내가 원하던 평온한 과거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물론 동생들은 나와 같은 동급의 사제이기에 겉으로 보기엔 과거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난 나와 동생들 사이에 이 교단 상태창 영향이 조금이라도 있다는 게 싫다.
마치 나와 동생들간의 의리를 부정 당하는 느낌.
“딱 한번만 더 올리자.”
교화 취소만 확실히 확보하고 다음 레벨은 올리지 않는 거다.
“그래. 로이도 딱히 말릴 생각도 없어 보였으니 한번 정도는 괜찮을 거야.”
“라오님.”
김인호 반장.
아니 이제는 초능력 부대 대장 김인호가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지금이라도 목에 기계장치 풀어드릴까요?”
김인호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왜. 풀어달라고 하면 터뜨려버리게?”
김인호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라오님 맞으시군요.”
“당연히 나지.”
만약을 대비해 내 목에 채운 기계 장치는 여전히 내 목을 감싸고 있었다.
“잘하고 있어. 그렇게 계속 경계해.”
“하하. 라오님도 참 끈질기십니다.”
“끈질길 게 뭐 있어. 나만 뻘 짓 안 하면 아무 문제 없는데.”
잠시 김인호와 대화를 나누던 나는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삼일 뒤 레벨업을 할거야.”
내 말에 김인호 역시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다시 해야 되는 겁니까?”
“해야지.”
라오가 전능하지 못하다고 확신은 했지만 사람 일이란 건 모르는 거니까.
“원정대는 어쩔 수 없지만 나머지 사제들을 대피소로 불러들여. 참. 훈련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이제 제법 태가 삽니다. 원래도 남자들은 군필자들이 많아서 훨씬 수월하기도 했고요.”
사제에게만 의존하지 않도록 생존자들에게 시킨 전투 훈련.
생포한 괴물들로 싸움 경험도 쌓도록 해주며 생존자들을 사제 없이도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만드는 중이었다.
“생존자로 경비대를 창설해서 방어 임무 맡겨.”
“그건 좀 시기상조가 아닐지.”
“시기 상조는 무슨. 요즘 겁도 없이 파티 꾸려서 빈집 털러 다니는 생존자들이 어디 한둘이야?” 내부 청소가 거의 완료되자 생존자들은 장터에서 물물 교환할 물건을 구하기 위해 총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어차피 수백 이상의 군집은 보이자마자 타격대가 출동해 몰살시킨다.
생존자들이 상대할 괴물은 많아야 수십 마리.
중요한 거래품목인 탄약까지 소비해가며 그들이 밖으로 나가는 건 대박을 위해서였다.
라면 박스나 보존식 몇 개만 건져도 소비한 탄알 정도는 금새 보충할 수 있었으니까.
그 중에서도 최고 대박은 천둥교가 종말 직전 비행기와 헬기로 투하했던 탄약 박스였다.
“보상만 확실하면 다 하게 되어있어.”
“알겠습니다. 그럼 생존자만으로 이루어진 경비대를 조직하겠습니다.”
“그래. 앞으로 3일이다. 움직여.”
생존자들의 지원을 받아 경비대가 창설됐다.
사제들이 강력한 힘으로 괴물을 압살한다면 경비대의 무기는 숫자.
그렇게 창설된 경비대가 사제들과 임무교대를 하고 사제들은 대피소로 모여들었다.
“다 들어왔나?”
“예.”
대처 방법은 그전과 같다.
나를 비롯한 사제들은 대피소 안에 대기하고 김인호가 밖에서 대피소 봉쇄 키와 내 목의 자폭 장치 키를 가지고 대기한다.
그리고 나나 사제들이 이상행동을 하는 순간.
김인호가 두 버튼을 누른다.
“후.”
저번보다 더 긴장된다.
과연 이게 옳은 선택일까.
“......”
딱 다섯 자만 입에서 내뱉으면 끝이다.
교단 레벨업.
그러면 교단 상태창이 레벨업 하고 스킬에 교화 취소가 있는 지만 확인되면 모든 게 완벽하다.
하지만 자꾸 망설여진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라오 듣고 있나?”
나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또 개수작부리거나 나한테 거짓말 한 거라면.....”
나는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너는 실수한 거야. 내가 지옥 끝까지 쫓아간다. 알았어?”
불안한 마음에 계속해서 라오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편안하게 좀 가자. 교화 취소 딱 주면 어? 내가 존나 열심히 종말 막을게. 그럼 서로 좋잖아?”
제발 순탄하게.
응?
“아무튼 난 경고 했어?”
나는 심호흡을 한 뒤 말했다.
“교단 레벨업.”
“괜찮으실 라나.”
김인호가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대피소 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으시겠지. 라오님이시니까.”
홀로 종말에서 수많은 사람을 구해낸 장본인.
사람들의 무시와 멸시도 버텨내 자기가 한 말이 진실임을 증명한 사람.
스스로를 신이라 부르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신 또는 신의 화신이라 믿는 지구의 구원자.
라오에 대한 김인호의 믿음은 굳건했다.
그때 대피소 문에서 라오의 모습이 보였다.
“라오님!”
대피소 정문 통과 직전 멈춰선 라오.
“끝나셨습니까?”
라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끝났어.”
“휴. 다행입니다. 별일 없으신 거 맞지요?”
“물론이지.”
“얻고자 하신 건...?”
라오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얻었다. 교화 취소.”
라오의 말에 김인호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드디어!”
가장 필요하고 가장 중요한 스킬을 얻는데 성공했다는 말에 김인호가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
“축하 드립니다!”
“아니야. 근데 완벽하진 않네. 소모 신성력이 너무 높아. 당분간은 지금처럼 계속 해야겠어. 교화 취소는 모든 괴물을 몰살시킨 뒤 진행한다.”
김인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라오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아.”
김인호가 장난기 섞인 얼굴로 키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목의 기계 장치. 해체시켜 드릴까요?”
그러자 라오가 자신의 목에 걸린 기계장치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거?”
“예.”
라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해체 시켜달라고 하면 폭파시키려고?”
“하하하. 당연하신 말씀.”
“걱정하지마. 나 라오야. 이제 사제들 다시 현장 투입시켜. 생존자 만으로는 아무래도 불안해서.”
김인호가 경례를 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지시를 이행하러 떠나는 김인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라오의 표정이 조금씩 싸늘하게 식어갔다.
“흠. 이 기계장치. 거슬리는 군.”
그리고 라오가 손가락을 튕기자 한 사제가 다가왔다.
“이 기계장치 푸는 방법 연구해.”
“알겠습니다.”
“아. 물론 김인호를 포함 일반인들 몰래.”
“예!”
사제에게 명령을 내린 라오가 크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흠! 하. 얼마 만에 맡아보는 공기인가.”
그리곤 환희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돌아왔다. 지구여.”
< 137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