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
“가. 감사합니다.”
대통령이 피난했던 핵 벙커도 다른 미국 정부 기관 핵 벙커와 비슷하게 접근했다.
핵 벙커는 미국이 남긴 최첨단 과학 기술의 산물을 천둥교에게 지원하는 대신 천둥교는 핵 벙커의 자치를 인정하고 그들을 초인으로 만들어준다.
동시에 주변 일대 괴물들을 정리하고 식량 제공까지.
서로가 가진 것을 공유하는 윈윈 전략이었다.
“뭘. 서로 돕고 도와야지.”
“지당하신 말씀.”
나는 미소를 지으며 핵 벙커 대표에게 말했다.
“다른 정부기관 핵 벙커에는 내가 잘 말해줄게.”
이들이 다른 핵 벙커와의 연락을 끊은 건 바로 대통령 사망과 그로인해 발생한 내분 그리고 그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내가 직접 다른 핵 벙커에 이들의 사정을 알려주면 이들도 마음의 짐을 내려놓겠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야. 아니야.”
여기까진 다른 핵 벙커와 똑같은 과정.
“그나저나 전부 모인건가?”
중앙 홀에 모인 500명의 생존자들.
핵 벙커의 대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모두 모였습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야지.
“나는 라오다.”
나는 생존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들이 겪은 참담한 일은 참 안타깝게 생각한다. 우선 사망한 사람들에게 조의를 표하지.”
나는 살짝 묵념을 한 뒤 말했다.
“그럼 이제 본론이다. 너희들이 서로 죽이고 싸웠던 이유. 대통령이 비밀리 준비한 초능력자 부대라고 했지?”
“예.”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그들과 접촉하고 싶다.”
내 말에 핵 벙커 리더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유일하게 접선 방법을 알던 비서실장이...”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무려 5만 명을 비서실장이 혼자 모으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그들이 살아갈 비밀 기지와 보급품 공수 그리고 연락까지.
사람이 한명 살아가는데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옷을 수선해줄 세탁소, 음식을 만들어줄 주방장, 식량을 만들어줄 농부 등등.
그렇게 사람은 촘촘히 짜여진 사회에 일부로 살아간다.
초능력자 부대역시 마찬가지.
그들을 모집하고 소모품 공급 등 결국은 사람의 손이 닿을 수밖에 없다.
그 모든 걸 비서실장 혼자 했을 리 없지 않은가.
“대통령이 부리던 비밀 기관. 난 여기 사람들 중 그 비밀 기관 소속 요원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요원은 비서실장만이 알고 있다던 연락 방법을 알고 있을 수도 있고.”
내 말에 생존자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웅성거렸다.
“물론 모든 건 가설이야. 총격전에 휘말려 사망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애초부터 이 핵 벙커에 비밀기관 요원이 없었을 수도 있지. 그래도 한번 해보려고. 혹시 여기 있는 비밀요원 있으면 잘 들어.”
난 생존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초능력자들과 협력하고 싶다.”
나는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위엔 아직도 수많은 괴물들이 사람들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다. 비록 천둥교의 사제들과 우리에게 협력중인 초능력자들이 함께 힘을 합쳐 싸우곤 있지만 정말 어린아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정도야. 더 많은 전력이 있으면 더 빠르게 괴물들을 청소할 수 있다. 함께 평온했던 지구를 되찾는 거다.”
나는 500명의 생존자 하나하나를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결코 그들을 억압하지도 억류하지도 않는다. 현재도 우리와 함께 하는 10만의 초능력자들이 바로 그 증거다. 함께하자. 서로 힘을 합치는 거다!”
계속해서 웅성거리는 생존자들.
하지만 앞으로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의심하는 거 안다. 대번에 나오기엔 나와 너희 간에 쌓인 신뢰가 없지. 하지만 대화 정도는 해도 되잖아? 신뢰를 쌓아가려면 일단 만나야 할 거 아니야.”
여전히 아무도 나오지 않자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부끄러움이 많은 요원님이시네. 일단 오늘부터 이 핵 벙커 내 모든 기도를 금한다.”
내 말에 핵 벙커 대표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협박하거나 어떻게 하려는 거 아니야. 지금 요원님이 부끄러워서 못나오잖아. 나랑 소통할 방법은 만들어줘야지. 만약 자신이 요원이고 나와 대화할 확신이 섰을 때 나를 위해 기도를 올려라.”
기도 유무는 신도리스트의 기본 기능중 하나.
이걸 요원과의 끈으로 이용한다.
“그럼 내가 바로 알 수 있거든. 아무튼 생각정리 되면 기도하라고. 꼭 좀 연락 줘. 부탁 좀 할게!”
하루, 이틀, 삼일.
삼일동안 나는 덴버시를 중심으로 미국의 도시를 하나둘 탈환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는 와중에도 틈틈이 핵 벙커의 기도 유무를 체크했으나 기도를 올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흠.”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왜 기도를 안 하는 거지?”
설마 요원이 없나?
“쯧. 그럼 곤란한데.”
할 수 있는 제안이란 제안은 모두 했다.
최상급 초인으로 만들어주겠다 부터 안전한 대피소에서 평온한 휴식까지 보장.
지금 세상에 이보다 좋은 제안이 또 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요원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엔 미국 재건을 걸었는데도 안 나왔단 말이지.”
개인적 이익이 아닌 미국에 대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요원.
그런 요원에게 미국 재건만큼 확실하고 효과적인 카드가 또 있을까.
하지만 이것도 묵살.
“뭘까. 뭘 원하는 거지?”
개인적 이득도 아니고 미국 재건도 먹히지 않는다.
이쯤 되니 아예 처음부터 요원은 없었던 게 아닐까란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자. 내가 요원이야. 그것도 극비 조직의 요원. 그리고 중요한 카드를 쥐고 있어. 초인 같은 대가와도 맞바꿀만한 귀한 카드. 상대도 이걸 간절히 원하고 있고.”
나는 눈을 감고 고민하다 외쳤다.
“에이씨. 때려 쳐!”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괴물로부터 인류를 지키고 싶다면 초능력자 부대를 나와 연결시켜줬을 거고 개인적 이득이든 미국의 이익이든 나한테 정체를 드러내는 편이 맞는 거 아닌가?
“그냥 단순히 신뢰부족인가?”
내가 요원에게 제시한 조건을 지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근본적인 불신.
“그런 거라면 내가 어떻게 못하잖아. 좋아. 이번이 마지막이다.”
초능력자 전력이 탐나기는 하지만 필수는 아니다.
이번 제안도 먹히지 않는다면 깔끔하게 포기.
잡히지 않는 허상에 입맛만 다시고 있을 만큼 나는 한가하지 않으니까.
“폭렙을 보장하지.”
마지막 설득인 만큼 직접 핵 벙커에 강림하여 생존자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괴물들을 몰이사냥 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걸로 천둥교와 함께 손을 잡은 초능력자들 레벨을 어마어마하게 올렸지. 나는 초능력자 부대에게도 그 몰이사냥을 제안한다.”
초능력자 전용 장비.
참 탐난다.
하지만 초능력자든 초인이든 장비는 결국 보조일 뿐이다.
본신의 능력을 올리는 것만큼 매력적인 제안이 또 있을까.
“그전 제안도 모두 동일하다. 솔직히 이정도로 파격제안을 한건 처음이거든? 그래서 이번에도 거부하면 포기할 생각이다.”
내 말에 생존자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웅성거렸다.
“아. 이건 어디까지나 숨어있는 요원에게만 해당되는 제안이야. 여기 핵 벙커와 협력은 차질 없이 진행될 거다.”
나는 사람들을 안심시키며 말했다.
“아무튼 이게 마지막 제안이다. 수천 개에 달하는 대피소, 수백만의 사제들, 그리고 십수 억의 신도까지. 난 할 일이 아주 많은 사람이야. 한 가지에 이정도로 시간을 투자할 순 없다고.”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진심으로 종말을 막고 싶다. 단지 그것뿐이야. 그러니 나와라. 그리고 나와 협력하자.”
하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그래. 됐다. 됐어.”
더러워서 안 찾는다.
“초능력자 없으면 괴물 못 잡나? 됐어. 걔네들 없어도 잘만 해왔어.”
나는 계시를 사용해 핵 벙커 사람들에게 말했다.
“포기다 포기. 내가졌다. 그냥 거기 잘 틀어박혀서 살아. 사람들이 죽어나가던 말던 안락하게 생활하라고. 아주 등 따시고 행복하겠다. 그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그 정도로 했으면 나와서 얼굴이라도 비추던가. 징하다 징해. 아무튼 포기한다.”
그런데 아직도 아까운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으...아무튼 포기는 포긴데 생각 바뀌면 바로 기도 때려. 알았어? 내 문은 언제나 열려있다.”
나는 계시 스킬을 취소하고 머리를 박박 긁으며 말했다.
“아깝긴 하지만 뭐...”
싫다는데 어쩌겠나.
“다음 도시 탈환 계획이나 짜야겠다.”
그렇게 초능력자 부대에 대한 사실을 억지로 머릿속에서 지우고 나는 언제나 처럼 원정대를 지휘해 미국을 회복시켜나갔다.
원정대가 일정 지역의 괴물을 청소하고 그 지역에 움츠리고 있던 대피소를 활성화 시키고.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며 인류의 구원자라 찬양했다.
“좋아. 그동안 수고 많았다.”
대피소 리더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충 청소했으니까 당분간 활동하기 수월할 거야.”
“라오님 덕에 대피소는 만들었으나 외부 확장은 엄두도 못 내고 있었는데 이렇게 직접 여기까지 와주시다니. 천둥교의 신도인 걸 언제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대피소 리더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아니야. 너야말로 수고 했어. 사람들 모아서 인솔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내가 잘 알거든. 앞으로도 수고하고. 곤란한일 있으면 근처 대피소들과 연합해서 처리해. 알겠어?”
“알겠습니다.”
막사로 돌아온 나는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다른 일도 처리해볼까.”
한국 원정대를 포함 41개국 원정대가 웜홀을 통해 세계 각지로 나가 활발한 구호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여긴 안정적이고. 흠. 여기는 후진국에다 땅 덩이가 넓어서 식량 공급이 버겁다고?”
원정대는 맨손으로 현지 보급을 하는 수밖에 없다.
선진국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살던 도시가 있기에 식량을 구하기 비교적 수월하지만 후진국 특히 땅덩이가 넓고 인구가 적은 나라일수록 만 단위가 넘는 원정대의 식사를 해결하기가 몹시 힘들었다.
“그렇다고 원정대를 쪼갤 수도 없고.”
원정대를 쪼개면 괴물 군집에 대한 저항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미국은 운 좋게 곧바로 위성을 확보했지만 그러지 못한 나라가 더욱 많았고 위성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원정대는 몸으로 부딪혀가며 전진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나는 계시로 각 원정대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몸 사려가면서 싸워. 식량이 문제면 일부는 본국으로 돌아가고 나머지는 터를 잡아 방어에 치중해. 그리고 괴물들을 죽이는 것보다 근처 사람들을 흡수하는 방향으로 진행하도록.”
여러 원정대에게 지시를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끙! 끝났나?”
마지막 점검을 끝내고 쉬려던 찰나 내 머릿속에 핵 벙커가 스쳐지나갔다.
“아. 기도.”
이미 일말의 기대도 없지만 습관적으로 핵 벙커 생존자들 기도 유무를 살피던 나는 한 신도를 보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
“기도 했네?”
고대하고 고대하던 요원의 접촉 신호.
하지만 기도를 통해 접촉 신호를 보낸 사람의 이름이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마크?”
나에게 처음으로 초능력자 부대의 존재를 알려줬던 남자.
“뭐지? 혹시 뭐라도 알아냈나?”
“여.”
마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셨군요.”
“기도를 해서 오긴 했는데...”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왜 하필 너야?”
“하하하.”
“좋은 정보라도 있어? 저번에도 말했지만 이거 신성력 많이 소모된다. 별거 아닌 거면 각오해야 할 거야?”
“정보라기 보단 몇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기도를 했습니다.”
“뭐?”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나한테 질문하고 싶은 게 있어서 나를 불렀다고?”
“예.”
“......너 제정신이 아니구나?”
나는 이를 갈며 말했다.
“너 때문에 낭비한 신성력이면 초인을 만들어도 수십 명은 더 만들어. 그런데 뭐? 물어볼게 있어서 불렀다고?”
나는 화를 눌러 참으며 말했다.
“이 새끼가 좋게 좋게 얘기하니 내가 호구로 보이나.”
“잠시만. 라오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정말 중요한 질문입니다.”
나는 마크를 노려보며 말했다.
“좋아. 어디 들어나 보자. 얼마나 중요한 질문인지. 만약 개뿔 아무것도 아니라면...”
나는 주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진짜 가루가 되도록 쳐 맞을 줄 알어.”
마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하. 무서워서라도 이상한 질문을 하면 안 되겠군요.”
“그걸 말이라고...”
“라오님.”
마크가 돌연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어째서 초능력자를 찾는데 교화를 사용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 135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