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
“아무도 없어?”
내 말에 겁에 질린 초능력자들이 뒷걸음질 쳤다.
“저길 또 들어가라고?”
“못가. 아니 때려죽여도 안가!”
나는 초능력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했다.
“이해한다. 너희들 심정. 두렵고 무섭겠지.”
나는 방벽에서 웜홀과 괴물의 시체가 즐비한 아래로 뛰어내렸다.
“라오님!!!”
초인 부대원들이 경악하며 잇달아 뛰어내렸다.
나는 웜홀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만 한다.”
그때 웜홀에서 괴물이 한 마리 튀어나왔다.
그리고 나를 호위하기 위해 같이 뛰어내린 초인 부대원들의 총에 순식간에 죽어버린 괴물.
“모두들 알고 있듯 초인은 웜홀을 넘어갈 수 없다.”
그리고 드디어 난 웜홀 앞에 도달했다.
“그리고 나 역시 초인. 그렇기에 부탁하는 거다. 만약 내가 할 수 있었다면 진즉에 했을 거다.”
나는 웜홀을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보아라. 내가 할수......”
웜홀에 손이 닿는 순간.
번쩍이는 빛과 함께 이동됐다.
“엥?”
붉은 하늘과 흑갈색 대지.
그리고 어슬렁 어슬렁 주변을 돌아다니는 괴물들까지.
나는 맨몸으로 변한 내 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뭐. 뭐야. 여기 웜홀 너머잖아.”
못 넘어오는 거 아니었어?
상황파악이 안돼 멍하니 서있는 사이 웜홀에서 연이어 벌거벗은 초인들이 튀어나왔다.
“라오님! 위험합니다!!”
나는 알몸으로 내 주위를 둘러싼 초인들 사이에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뭔데? 왜? 아니...엉?”
다시 지구로 돌아온 나는 연이어 초인들을 웜홀로 들어가 보게 지시했다.
“왜 들어가지지? 왜?”
분명 안 들어가졌었는데?
그때 나는 수천 명의 시선을 느끼고 뒤를 돌았다.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초능력자들.
“아니. 와. 이거 개 억울하네.”
마치 초인도 들어갈 수 있다는 걸 속였던 거 아니냐는 눈빛.
“이 자식들아! 내가 들어가질 줄 알았으면 여기에 손을 뻗었겠냐! 그리고 웜홀 초인이 통과 못한다는 건 나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모두 검증된 거잖아!!”
내 말에 그제야 납득한 초능력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정말 몰랐으니까 그랬겠지.”
“저 황당해하는 표정이 거짓이라면 라오는 연기의 신일 거야.”
와씨. 가오 떨어지게.
그나저나 내가 왜 변명을 하고 있는 거지?
나는 민망한 마음에 괜히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초인 부대 대장이랑 김인호! 작전 회의다!”
“식량이...”
식량이 바닥났다.
가족들과 함께 별장에 숨은 하제범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보. 이제 어떻게 해?”
“...내가 어떻게든 구해볼게.”
아내가 하제범을 말리며 말했다.
“여보 밖으로 나가려는 건 아니지?”
“......”
“그러지 말고 여보. 우리 일단은 계속 기도하면서 초인이 된 다음 나가자.” “언제 될 줄 알고. 이제 먹을 거라곤 초콜릿 바 하나밖에 안 남았어. 우리야 좀 참으면 되지만 애들은 어떻게 하고.”
아내가 울먹이며 말했다.
“당신까지 죽으면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하제범이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라오님에게 받은 총도 있고 위험하면 바로 도망칠게. 게다가 여긴 시골이잖아. 밭이라 시야확보도 잘 될거고 농작물 조금만 뜯어 와도 우리가족 한동안 먹을 수 있을 거야.”
아내가 한참을 주저하다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말했다.
“약속해. 무조건 안전하게 돌아오겠다고.”
하제범이 아내의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걸며 말했다.
“걱정 마. 당신 남편 절대 안 죽어.”
“휴.”
하제범이 칼빈 소총을 꼭 쥐고 주변을 살폈다.
“좋아.”
괴물이 없음을 확인한 하제범이 근처 농가를 향해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분명 그 집 텃밭에 무를 심었다고 했지?”
제법 튼실한 무 몇 개만 건져도 며칠치 식량으론 충분했다.
그렇게 조심조심 농가로 다가간 하제범이 얼굴을 빼꼼 내밀고 담벼락 안을 살폈다.
괴물에게 습격을 받았는지 집은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살아계실까?”
여기 살던 노부부는 자신들의 집이 오래되고 낡아 괴물에게 버틸 수 없을 거 같다며 시내에 사는 아들 아파트로 향했다고 했다.
“...무가 남아있으면 좋을 텐데.”
노부부가 아들집으로 도망가며 농작물까지 모두 가져갔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제범은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농가 안으로 들어갔다.
“휴...”
하제범은 앞뒤 좌우를 살피며 농가 뒤 텃밭으로 향했다.
“아...”
역시나는 역시나 일까.
노부부는 아들 아파트로 대피하며 모든 농작물을 수거해간 상태였다.
“젠장. 다음 농가까지 가려면 10분이나 걸어야 하는데.”
그 사이 괴물과 마주치면 어쩌지.
“농작물까지 알뜰하게 챙겨갔으니 집안이야 보지 않아도 뻔하고.”
한숨을 내쉬고 뒤를 도는 그 순간.
“키륵?”
하제범의 눈앞에 괴물이 서있었다.
“히이이익!!!”
소리 없이 다가온 괴물에 놀란 하제범이 칼빈으로 괴물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는 총.
“이 고물 쓰레기가!!”
괴물이 앞발을 높이 들어올렸다.
하제범이 눈을 감으며 말했다.
“여보 미안해.”
그때 그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요. 바람이라도 폈습니까?”
그리고 나타난 강화복을 입은 초인이 단숨에 괴물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어..어?”
초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구해드리러 왔습니다.”
-괴물들이 전 세계로 퍼져나간 덕분에 괴물 밀집도가 많이 떨어졌음을 확인한 천둥교는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구조 활동에 나서기로 결정했습니다.
화면이 전환되며 오늘 구조된 하제범과 그의 가족들이 비춰졌다.
하제범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라오님께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살았다!! 드디어 구조대가 움직이기 시작했어!”
아파트 주민들이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외쳤다.
“라오님! 만세! 만세!”
그리곤 한걸음에 사제에게 다가가 그의 양손을 붙잡고 말했다.
“사제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천만에 말씀을. 모두 라오님을 믿고 따른 여러분의 노력덕분입니다. 음?”
갑자기 눈을 지그시 감은 사제가 말했다.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사제가 눈을 뜨고 말했다. “계시가 내려왔습니다.”
아파트 주민들이 사제의 입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저희 도시는 앞으로 3일 뒤 탈환작전을 실시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만세!!! 라오님 만세!!!”
나는 지구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저쪽 500m 앞에 신도 15명. 임한백.”
나는 천리안 능력자 임한백에게 말했다.
“확인해봐.”
“예. 천리안!”
내가 가리킨 방향을 쭉 훑어본 임한백이 말했다.
“건물이 하나 있는데 방어벽이 설치되어있습니다. 방어벽이 온전한 걸로 보아 그 안에 숨어있는 듯합니다.”
“괴물은?”
“가는 길에 대략 30마리. 그 건물을 중심으로 60여 마리 정도 보입니다.”
나는 사제들에게 말했다.
“100인대 출동.”
내 지시에 상급 사제 하나를 중심으로 중급 10명 하급 30명 수습 60명으로 이루어진 백인대가 무장을 한 채 출발했다.
“이쪽 1km 앞에 30명. 괴물은?”
“이쪽은 오히려 적습니다. 아!”
임한백이 놀라며 말했다.
“그 뒤쪽에 수백 마리로 이루어진 군집이 대각선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수백 마리? 음...일단 피해서 돌아간다. 헬기 파견해서 건물위에 식량이나 조금 떨궈줘.”
나는 본단에서 출발한 7,000명의 사제를 대동하고 구조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이곳뿐만 아니라 한국을 포함 41개국의 대피소들은 자신들을 중심으로 괴물을 토벌하는 한편 생존자 구출을 시작했다.
“군수공장 쪽은 어떻게 되고 있지?”
사제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초인 부대 1만 명이 초능력자들과 함께 군수공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위성탐지결과 중간에 괴물 군집 4개정도를 발견했지만 각각 규모는 천이 넘질 않습니다.”
“그냥 밀어버리라고 해.”
본단의 사제들이야 강화복도 없이 그냥 총으로만 무장했지만 웜홀을 지키고 있던 초인 부대는 강화복부터 최신 무기로 무장한 천둥교의 최고 전력.
그 정도 괴물은 가뿐했다.
“계속 죽여. 닥치는 대로 죽이면 줄어들게 되어있어.”
연구결과 괴물에게는 생식기관이 없었다.
어떻게 탄생된 건지 아무도 모르지만 지금 판국에 중요한건 그게 아니니까.
일단 모든 웜홀을 틀어막으면 괴물의 숫자는 고정된다.
“일단 군수공장을 확보하고 그다음은 국방연구소 순으로 장악해. 방어병력 배치하고 자재가 확보되는 대로 공장 돌려.”
어차피 물위를 둥둥 떠다니는 괴물들이니 국경은 의미가 없다.
콘크리트나 철벽으로 일정구역을 모두 틀어막아 안쪽 괴물을 모두 박멸한 뒤 안전지대로 만드는 방법도 있지만 5m나 되는 장벽을 한 지역단위로 만들기엔 자재도 인력도 시간도 모두 부족하다.
그래서 나온 차선책이 바로 각 대피소의 도시국가화.
대피소를 중심으로 생존자들을 모아 조금씩 주위로 영역을 넓히며 개간한다.
비록 대피소와 대피소 사이엔 수많은 괴물들이 즐비해 교류가 제한적이겠지만 일단 생존자들에게 살아갈 터전을 제공하는 게 우선이다.
“모두들 힘내. 우리가 하루 빨리 움직이면 하루만큼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다.”
“예!!”
나는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해 발걸음을 내딛으며 말했다.
“가자. 미래는 우리 손으로 만든다.”
“흠.”
3배 초인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구조작전이 시작됐다고?”
“헤헤헤.”
1.2배 초인이 양손을 싹싹 비비며 말했다.
“그래도 잘된 거 아닐까요. 안전해지는 거 아닙니까.”
“쯧. 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냐. 우리가 지금 여기서나 이러고 살지 천둥교에 합류하면 흔하디흔한 초인이라고. 게다가 위로 상사들이 한 트럭이고.”
3배 초인이 자기 옆에 알몸으로 누워있는 여자의 엉덩이를 때리며 말했다.
“게다가 얘네들이 라오한테 꼰지르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
3배 초인의 말에 여자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개자식. 라오님이 절대 용서하지 않으실 거다.”
3배 초인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왜이래. 같이 즐겨놓고. 신음소리가 아주 끝내주던데?”
“죽어!!”
여자가 달려들었지만 3배 초인은 가볍게 여자를 제압했다.
“이 씨발년이 나한테 안긴 걸 영광으로 알아야지. 야.”
3배 초인이 여자를 1.2배 초인들에게 던져주며 말했다. “너네 가져.”
“헤헤. 감사합니다.”
“안 돼! 싫어!!”
여자가 1.2배 초인들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보며 3배 초인이 중얼거렸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과거 무력했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다르다.
그리고 이 정복감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라오는 종말을 막겠다며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자신은 이 세상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3배 초인의 이름은 곽도운.
종말이 오기 전 동네 양아치 짓을 하던 불한당이었다.
“총과 칼만 있으면 괴물 몇 마리쯤이야 가뿐하니 식량 공급도 제법 수월해졌고...”
초인들과 함께 밖으로 나가 라오가 알려준 식용식물이나 가정집을 털어 식량을 모았다.
가정집 중엔 괴물을 피해 숨어있던 사람들이 많았고 아까 여자도 그런 생존자들 중 하나였다.
괴물이 적으면 초인들과 함께 잡고 많으면 합일을 사용하는 식으로 움직이니 괴물이 흩어진 현 상황에서도 그럭저럭 살아갈만했다.
“...초인들끼리 힘을 합칠까?”
곽도운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나랑 비슷한 놈들을 모으는 거야.”
초인은 뭉치면 뭉칠수록 강하다.
“좋아. 결정했다.”
라오는 사제들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아무리 라오라도 그 수많은 사람들을 모두 통제하기란 불가능하다.
곽도운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무법시대엔 무법시대에 맞는 생존법이 있는 거지.”
< 115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