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이렇게 다들 모이기 쉽지 않은데."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모이니까 다들 좋지?"
처음으로 나에게 당한 뒤 수습 사제로 임명당한 김호봉.
"신기하긴 하군."
비록 허무하게 무너졌지만 김호봉 다음으로 오랜 시간 기도를 올린 지진파의 지동진.
"이렇게 4명이 모인건 거의 처음 아닌가?"
나에게 납치당하고 윤도식과의 내전까지 벌어지며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김태호.
"너 빼고 처음은 아니지."
마지막으로 합류한 칼날파의 이용수까지.
"그래. 식당에서 납치당할 때 우리 3명은 만났었으니까."
이렇게 평택시를 4등분하고 있던 4대 조직의 보스가 모두 모였다.
"에헤이. 그래도 우리 만남을 성사시켜줬던 장소잖아. 안 그래? 킥킥.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여기 모두 함께 모였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니겠어?"
나는 상석에 앉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 식구로서 말이야."
호봉파와 지진파는 완전히 장악했고 아직 장악이 덜된 태호파와 칼날파 일부는 손발이 묶인 채 폐공장에서 매일 기도를 올리는 중이었다.
"모두 불만은 없지?"
4명의 보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주 좋아."
정식 조직원만 100명이 넘고 시다바리들까지 합치면 무려 200이 넘는 중견 조직의 탄생이었다.
나와바리는 인구 50만의 평택시 전부.
물론 잔잔바리들이 곳곳에 있지만 그래봐야 크게 신경쓸만한 놈들은 아니다.
"아무튼 천둥파 식구가 된 걸 축하하며 박수!"
내 말에 4명의 보스가 경쾌하게 박수를 쳤다.
잠시 후 박수가 끝나자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앞으로도 천둥파 식구들은 자율에 의지해 운영된다."
처음엔 이런 조직들을 천둥파로 흡수해 덩치를 키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교단 상태창을 통해 하급 사제가 가진 수습 사제 장악력을 알게 되고 그 확고한 충성도에 확신이 서자 생각이 바뀌었다.
"또한 우리 서로간의 유대는 당분간 비밀이다."
꼭 덩치를 키울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보스들의 충성심은 확고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분산하는 쪽이 세간의 주목을 덜 받는 게 당연했다.
성수와 같은 비정상적인 귀물을 소유한 나다.
물론 정체는 수돗물일 뿐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신체능력을 강화시켜주는 비약으로 보일 터.
관심을 보일 곳은 당장 생각만 해도 수십 군데에 달한다.
작게는 다른 조직들과 연구단체 더 나아가선 군대와 정부까지.
종말을 대비하기 위해 빠른 속도로 확장을 거듭해야하는 내 입장 상 세간의 주목을 받으면 받을수록 시기와 견제 그리고 경계심만 높일 뿐이었다.
차라리 나와 동생들을 중심으로 한 정예들을 중심으로 산하조직을 꾸려나가는 편이 훨씬 합리적.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었다.
"태호야."
"...뭡니까?"
퉁명스럽지만 존댓말.
김태호의 나에 대한 태도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한 가지 명령을 내릴게 있어."
"듣고 있습니다."
"윤도식 옛날 친구가 아산시 도끼파 행동대장이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조만간에 태호파가 나서서 수고 좀 해줘야겠다."
바로 산하 조직과 나의 연결 끈을 감출 수 있다는 것.
우리는 법치 국가인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
앞으로도 많은 싸움이 벌어질 거고 수많은 불법을 저지를 거다.
만약 내가 천둥파 보스로서 이들을 모두 부하로 받아들이면 나는 수많은 범죄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지만 특정 조직에게 총대를 메게 한다면?
더군다나 그 조직 전원 나에 대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쳐있다면?
"혹시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지시한 걸로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정확해. 물론 걱정하지마 라오의 가호가 너를 지켜줄 거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미리 준비한 물을 꺼내 김태호에게 내밀었다.
"이건..."
"너네가 강제로 기도 당할 당시 마약이라며 난리쳤던 성수다."
"으음..."
"그런데 너 호봉파랑 싸울 때 호봉파 조직원들이 묘하게 강하다는 생각 안 해봤어?"
"했습니다."
"그게 전부 이거 덕분이야. 이걸 마시면 힘과 신체능력이 좋아진다고. 볼래?"
나는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김태호 눈앞에서 단 두 손가락으로 구부러뜨렸다.
교단 상태창이 생기기전의 나는 기교위주의 싸움꾼이었다.
당연히 깡패 기준에선 비교적 매끈한 몸을 가지고 있었고 그건 사제로 임명돼 신체능력이 향상된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런 내가 미친 듯한 근육을 자랑하는 보디빌더들이나 할법한 묘기를 선보이니 놀랄 수밖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김태호에게 구부러진 동전을 건네며 말했다.
"나도 당연히 마셨고. 이 성수를 마시면 몸이 건강해지고 강해질 수 있어. 자. 마셔."
물을 들고 잠시 고민하던 김태호가 단숨에 들이키는 순간 나는 김태호를 순식간에 +4까지 업그레이드 시켰다.
"흐으으으읍!!"
한 번도 아니고 동시에 4번이나 업그레이드 되자 김태호가 물병을 떨어뜨리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 말해주는 걸 깜빡했네. 그거 4잔 어치 농축해둔거야. 어때?"
그러자 잠시 부들부들 떨던 김태호가 희열에 찬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온몸에... 온몸에 힘이!!"
"그렇지? 라오의 가호를 받은 기분이 어때?"
"최고입니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좋아. 그럼 부탁 좀 할게."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평택을 넘어 이제 전국으로 뻗어나가야 할 거 아냐."
"라오..."
기도를 마친 팽성읍의 깡패 오장수가 분노를 터뜨리며 말했다.
"아오. 씨발 진짜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돼?"
장지후에게 쥐어터진 뒤 벌써 두 달이 넘게 기도를 올리며 신성력 생산 공장으로 일하고 있는 오장수와 그의 패거리들이었다.
그들의 심리변화가 없는 이유는 신성력이 아까워 장지후가 수습 사제로 임명하지 않았기 때문.
"안하면 귀신같이 알고 달려오지 않습니까."
동생의 말에 오장수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미친 새끼들."
꼭 그 미친놈들이 아니더라도 평택시의 상황이 아주 복잡했다.
호봉파와 지진파가 붙고 지진파가 흡수됐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갑자기 지진파가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왔고 태호파가 내분으로 갈라서 전쟁을 치루더니 갑자기 배신자인 윤도식이 멀쩡한 모습으로 김태호 옆에 붙어 다닌다.
이런 어지러운 시기일수록 오장수 같은 동네 깡패들은 머리를 숙이고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래도 요즘은 좀 조용해졌던데요?"
"그건 나도 들었어."
그렇게 한참을 엎치락뒤치락 하던 평택 4대 조직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갑자기 모든 전쟁 활동을 멈추고 본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 소문은 진짜일까요?"
"뭐가?"
"장지후가 4대 조직의 싸움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소문이요."
"그걸 믿냐?"
장지후는 최근 덕칠의 합류로 꼴랑 9명.
"그래도 소문이 꽤 구체적이던데요. 호봉파가 태호파랑 칼날파와 싸웠을 때 선봉에 있었다든지 태호파랑 칼날파 보스가 장지후에게 납치당했다든지."
자기 조직 보스가 납치되는 걸 눈앞에서 목격한 것만큼 조폭에게 수치스러운 일은 없다.
당연히 태호파와 칼날파는 이 사실을 함구했기에 이런 동네 깡패들로선 정확한 사실을 알 길이 없었다.
"그게 말이 되냐?"
당연히 일반적인 상식으론 있을 수 없는 일.
"그렇죠?"
"아무튼 간 이 개 같은 상황을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장지후가 따로 상납금이라든지 그런 걸 요구하지는 않지만 기분이 더러웠다.
자기를 위해 기도를 올리라니.
매일같이 그런 또라이에게 기도를 올릴 때마다 자괴감이 올라왔다.
"그런데 형님. 제가 알기로 저희처럼 당한 깡패가 한둘이 아닙니다."
"그래. 웬만한 읍은 전부 당했다며?"
"예. 그럼 말입니다 형님."
동생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이 기회에 저희도 확장을 하는 게 어떻습니까?"
"확장?"
"예. 그래도 4대 조직을 제외한 평택 깡패 중엔 저희가 제일 큰 편 아닙니까."
"그렇지."
"이 기회에 저희처럼 장지후에게 고통당하는 애들을 규합하는 겁니다."
동생의 말에 흥미가 생긴 오장수가 눈을 빛냈다.
"계속 해봐."
"예. 같은 처지 아닙니까. 두드려 맞고 매일 눈치 보며 기도를 올리는 신세. 여기서 저희가 모두를 불러 모아 연합을 구성하는 겁니다. 당연히 연합장은 가장 동생도 많고 제안을 한 형님이시겠죠."
"그렇지."
"그렇게 모이면 못해도 규모가 수십 명은 될 텐데 4대 조직 정도는 아니어도 그 정도면 어디 가서 콧방귀 뀔 정도는 됩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런 다음 장지후를 박살내는 거죠. 아무리 지들이 날고 기어봐야 9명 아닙니까. 장지후를 박살내고 연합을 유지하며 세를 키우는 겁니다."
"호오."
오장수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괜찮은데? 장지후란 주적이 있으니 다들 두손 들어 찬성할거고."
"그렇죠. 그렇게 연합은 고스란히 형님손아귀에 떨어지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4대 조직에 이은 평택의 5번째 조직."
동생의 말에 오장수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야. 그거 좋다."
"물론 알토란 같은 곳은 4대 조직이 다 먹었지만 요즘 신도시 많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 정도 숫자면 뭘 해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좋아. 한번 추진해 보자. 아. 그런데..."
오장수가 갑자기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우리끼리 뭉치는 거. 4대 조직에서 가만 두고 볼까?"
물론 조직력과 자금 등 모든 면에서 꿀리지만 어찌됐든 새로운 경쟁자의 탄생을 바라는 깡패는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그렇게 숫자를 모았다가 4대 조직에게 찍히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그렇지 않아도 최근까지 전쟁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있었을 텐데."
"음. 그건 그렇군요."
"괜히 장지후 때문에 긁어서 부스럼 만드는 거 아닐까?"
잠시 고민하던 동생이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그럼 형님. 제가 아는 친구한테 한번 부탁하는 게 어떨까요?"
"친구?"
"예. 제 고향 친구 중 한명이 칼날파에 있거든요. 서열이 한 중간쯤 될 텐데 그 친구한테 말해주는 거죠. 절대 오해하지 말라고."
"나머지 3개 조직은?"
"나머지 3개 조직에도 좀 아래급이긴 한데 아는 친구들이 있고 칼날파 친구도 아는 사람이 있을 테니 부탁하는 거예요. 대신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합차원에서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하면 그 친구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을까요?"
"좋아 좋아. 일단 한번 전화해봐."
오장수의 재촉에 동생이 핸드폰을 꺼내 고향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동안 전화음이 울리고 동생의 고향친구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야. 오랜만이네. 진기 맞지? 내 친구 진기?"
-진기 맞습니다만 누구시죠?
"나야 나. 너 고향 친구 민후."
-민후...민후...
한참을 생각하던 진기가 놀라며 말했다.
-아! 민후!
"그래! 이제 기억난 거야?"
-내 시다바리 민후? 이야. 너 많이 컸다? 나한테 전화도 하고.
스피커 폰으로 오장수와 함께 듣고 있던 민후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야. 시다바리는 무슨."
-야? 너 지금 나한테 야라고 했냐? 미쳤어?
오장수와 한차례 눈을 마주친 민후가 땀을 삐질 삐질 흘리며 말했다.
"하. 하. 하. 그. 그냥 넘어가주라."
-뭐. 그래도 오랜만이니 반갑긴 하네. 그래. 무슨 일인데?
"그러니까 말이지."
민후가 한참동안이나 오장수와 의논했던 연합 구성에 관해 진기에게 설명했다.
"어때? 우리 조금만 도와주면 나중에 우리도 도와줄게."
그런데 조용히 듣고만 있던 진기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서 다시 묻는다. 동네 깡패들이 지금 장지후에게 당했으니 모여서 복수하겠다. 뭐 이런 거야?
"그렇지. 그렇지."
-너 미쳤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