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방을 나서서 계단으로 향하자 동생들이 제법 뒤로 밀려있었다.
하긴 이정도만 해도 대단한 거지.
아무리 신체능력이 올라갔다지만 역시 쪽수의 한계는 있었다.
그렇기에 준비한 비장의 무기.
나는 동생들 뒤로 다가가 말했다.
"자자. 다들 주목."
그러자 조직원들이 나를 바라보곤 경악하며 외쳤다.
"보. 보스!"
나는 나와 어깨동무를 한 김태호의 귀에 속삭였다.
"애들 물려."
그러자 김태호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물러나면 없던 일로 해주겠다."
"응? 이 아저씨 눈치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눈치 꽝이네?"
나는 자상한 표정으로 김태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우리 악수나 한번 할까?"
그러자 김태호가 기겁을 하며 말했다.
"아. 아니다."
"애들 물릴 거야?"
"......우릴 어떻게 할 셈이지?"
"죽이지는 않아. 그리고 내 별명 못 들었어?"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나 전도사잖아. 기도 시켜야지."
"......"
"고민하지 마. 기도를 하든 뭘 하든 당신 애들 안 물리면......알지?"
내 협박에 김태호가 이를 갈며 말했다.
"물러나라!"
"형님!"
"물러나라니까!"
그러자 한참을 주저하던 조직원 중 절반이 계단 밑으로 내려갔다.
"용수야."
내 말에 이용수가 바들바들 떨며 외쳤다.
"죽여 버릴 거다! 내가 죽어도 넌 죽이고 죽는다!"
이용수의 악에 나는 화사한 미소로 다가가 말했다.
"저런. 분노가 머리를 가득 채웠네. 내가 분노를 빼줄게."
나는 이용수의 양손을 잡아 포개며 말했다.
"자. 우리 기도하면서 분노를 빼볼까?"
나는 구겨진 양손을 기도하는 손 모양으로 힘껏 눌렀다.
"으아아아아아아! 놔아아아아아!"
"자. 우리 모두 기도합시다. 세상에 모든 번뇌와 짐은 내려놓고."
"으아아아! 제발! 놔! 물린다고! 물려!!"
"정말?"
나는 손을 풀고 말했다.
"자."
"으으으. 애들 물려!"
"하지만 형님!"
"나중에 구하러오면 되잖아!"
나는 이용수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맞아. 맞아. 나중에 구하러오면 되지. 다들 나중에 꼭 구하러 와야 돼? 그러려고 납치하는 거니까."
내 말에 사람들이 어이없어하던 말던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자. 시간이 없어요. 다들 자리에서 물러나주세요."
조직원들이 모두 계단 밑으로 이동하자 나는 이용수와 김태호 사이에서 어깨동무를 한 채 계단 밑으로 내려갔다.
김호봉과 내 동생들은 나를 중심으로 지키는 원형진을 유지한 채 조직원들의 포위를 받으며 조금씩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아무것도 못할텐데 그냥 비키라고 하면 안 돼?"
그때 한 조직원이 외쳤다.
"형님을 어디로 데려가는 거냐!"
"어. 나중에 따로 카톡 줄게."
"뭐?"
"카톡 준다고. 구하러와. 알았지?"
보스들이 인질로 잡혀있지 어찌할 바를 모르던 조직원들의 포위를 뚫고 차에 올라탄 우리는 유유히 식당을 벗어났다.
물론 조직원들도 황급히 차를 타고 추적해왔지만 그거 하나 예상 못했을까.
호봉파 조직원이 우리가 지나가자마자 미리 준비한 대포차로 길을 막아버렸다.
조직원들이 차로 대포차를 밀어재끼며 안간힘을 썼지만 그사이 이미 우리는 멀리 도망쳐 나왔다.
"간단하네."
내 말에 김호봉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네가 상식 밖인 거다."
"흐흐흐. 우리가 좀 세긴 하지?"
계획은 간단했다.
"이제 태호파와 칼날파에서 안간힘을 쓰고 보스를 구해내려 노력하겠지."
나를 노려보는 김태호와 이용수를 보며 말했다.
"아니면 포기하고 지들끼리 조직을 장악하던지."
"우리 애들이 그럴 리 없다!"
김태호의 외침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이래저래 상관없다고. 어차피 호봉파 사업장은 전부 은밀한 사업이라 입구가 좁거든? 그중 가장 중요한 몇 개 사업장에 우리 애들 한명씩만 배치해도 지원군 오는 시간정돈 충분히 벌 수 있어. 그렇게 계속 쌈 싸먹다 보면 게임 끝이지. 아니면 지들끼리 조직 장악하겠다고 내분이 일어나도 좋고. 난 정말 다 상관없다니까? 캬. 그나저나 호봉이 머리 좋네. 이런 계획도 세우고."
"......60명을 4명이서 막을 수 있다면 무슨 계획인들 안 통할까."
"히히. 그건 그래."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태호파와 칼날파가 어떤 선택을 내릴지 기대가 되는 걸?"
태호파와 칼날파의 반응은 격렬했다.
"보스를 구하자!"
당장 보스들이 어디에 갇혔는지 모르기에 그들의 목표는 명확했다.
"김호봉! 아니면 하다못해 행동대장들이라도 잡아들여!"
호봉파 간부들을 납치해 자신들의 보스와 교환을 한다.
그도 아니면 지속적으로 피해를 입혀 보스를 돌려주지 않으면 끝장을 볼 거라는 제스처라도 취해야했다.
"그리고 장지후!! 죽여 버려!"
뜬금없이 갑자기 튀어나와 이 모든 사태를 만들어낸 장지후에 대한 분노는 어마어마했다.
이렇듯 보스가 사라진 태호파와 칼날파는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으나 기실 그 속내는 달랐다.
불같은 성격이지만 자기 부하들을 아끼는 이용수의 칼날파는 진심으로 보스를 구하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강구했지만 태호파는 아니었다.
"흠. 칼날파가 호봉파 안마방들을 급습했다고?"
태호파의 2인자인 윤도식이 조직원의 보고를 받고 말했다.
"결과는?"
"5개의 안마방을 급습했지만 3개는 사실상 비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머지 2개는..."
"2개는?"
"그 천둥파란 놈들이 하나씩 배치되어있었는데 입구를 틀어막고 버티는데 칼을 들고 덤벼도 상대가 안됐다고 합니다."
윤도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겠지. 그놈들 실력은 내 두 눈으로 봤으니까."
윤도식 역시 보스들이 눈앞에서 납치되는 모습을 목격한 장본인이었다.
"그 덩치 큰 놈이랑 석호인가 뭔가 하는 놈은 물론이고 나머지도 하나같이 대단한 싸움꾼이었지."
"그렇게 입구에서 막혀 지지부진한 사이 장지후가 부하들을 이끌고 나타나 전부 때려눕혔습니다."
"대충 견적이 나오는군."
윤도식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놈들은 우리가 공격해오길 기다리고 있는 거다."
소수 정예 일수록 좁은 공간을 활용하는 건 전술의 기본.
천둥파의 월등한 개인 기량을 이용해 시간을 끌고 그사이 지원군을 호출해 전력을 깎아먹는다.
"칼날파의 피해는?"
"20명 정도가 잡혀갔다고 들었습니다."
"피해가 상당하군. 보스를 구하는 게 쉽지 않겠어."
윤도식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거 정말 보스에게 죄송하게 됐는걸?"
윤도식의 말에 보고를 하던 조직원 역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태호파는 나름 역사 있는 다른 조직과 다르게 평택 인근에 새로 생기는 신도시를 중심으로 급격하게 몸집을 부풀려온 조직이었다.
조직이 몸집을 불리는 가장 빠른 방법은 바로 다른 조직을 집어 삼키는 것.
윤도식은 태호파의 2인자이지만 동시에 태호파에 흡수된 조직의 보스였다.
"항장. 항복한 장수의 처지는 참 딱하지."
윤도식의 부하들을 달래기 위해 2인자 자리를 줬지만 실상 권한은 하나도 없는 허수아비 2인자.
조직의 넘버 3이자 김태호와 함께 조직의 개국공신인 이기호가 사실상 2인자의 권한을 모두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항장의 장점은 있지. 애들은 다 모였나?"
"물론입니다."
"몇 명이지?"
"......정말 믿을만한 놈으로 10명입니다."
조직 안에 다른 계파의 조직원이 있는 걸 반기는 보스는 세상에 없다.
당연히 윤도식과 함께 항복한 조직원들은 주기적으로 태호파의 다른 조직원들에게 회유를 당했고 사실상 윤도식계에 남은 건 10여명이 전부.
"그래. 10명이라도 남아준 게 어디냐."
윤도식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김태호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다."
이 기회를 놓치면 윤도식계 조직원의 이탈은 계속될 것이고 자신은 어느 순간 소리 소문 없이 은퇴를 할 게 분명했다.
"이기호는 뭐하고 있지?"
"칼날파처럼 부하들을 모아 구출 작전을 준비 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절대 방심하지마. 이기호도 경계하고 있을 거야."
"물론입니다."
"이기호가 부하들을 움직여 행동을 하는 그 순간. 바로 그 순간이 우리가 살아남을 유일한 길이다."
"우아아아!"
"죽어라!!"
길거리 한복판에서 칼날파 조직원들과 호봉파 조직원들 간의 싸움이 벌어졌다.
"죽어!!"
살벌한 싸움이 벌어지자 주변에서 지나가던 행인들이 고함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고 곧이어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경찰차가 다가오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칼날파와 호봉파 조직원들이 싸움을 멈추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국지전은 평택 전역을 대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놈들이 작전을 바꿨다."
김호봉이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말했다.
"우리 사업장을 치는 게 아니라 공개적으로 우리에게 싸움을 걸어오고 있어. 이렇게 시끄럽게 움직이면 경찰은 무조건 개입하게 되어있다. 한마디로 같이 공멸하기 싫으면 보스를 내놓아라 이거지."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럴 만도 하지."
칼날파가 세 번의 습격에 잃은 부하만 무려 40명.
그 40명은 현재 사지를 구속당한 채 폐공장에서 지진파와 함께 신성력 제조기로 충실히 일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칼날파는 그야말로 조직의 사활을 걸고 사업장 문까지 걸어 잠그며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원을 총동원해 국지전을 펼쳐왔다.
"이용수 부하들 의리가 끝내주는데?"
"나도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
경찰이 개입할 수도 있을 만한 수준의, 아니 아예 대놓고 개입하게 만드려는 듯 한 움직임을 보이니 골치가 아팠다.
"같이 죽자는 건데..."
"내가 경찰 쪽에 주기적으로 약을 쳐오긴 했지만 이정도 대규모 싸움까지 무마될 정도는 아니다."
"그렇겠지."
"어떻게 할 건가?"
"흠......일단 그건 고민해보고. 태호파는?"
내 말에 김호봉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태호파는 우리가 원한 딱 그 상태다."
태호파의 습격은 단 한차례.
그 한차례를 끝으로 태호파는 윤도식계와 이기호가 이끄는 김태호계로 내분이 벌어졌다.
습격을 하러 부하들을 보내 방어가 허술해진 틈을 타 윤도식이 부하들을 이끌고 이기호를 쳤지만 이기호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채 도망에 성공.
도망친 이기호는 남은 부하들을 수습하여 윤도식과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윤도식 아주 머리가 좋아. 이기호가 도망친 사이 과거 부하들을 다시 규합하고 부하들을 끌어 모아 이기호에게 밀리지 않는 세력으로 규모를 키웠다. 물론 이기호의 부하들 중 많은 수가 첫 습격에 너에게 당한 이유가 가장 크지만."
"흐흐. 20명 정도였던가? 아주 깔끔하게 뚝배기를 깨줬지. 아무튼 태호파는 당분간 신경 꺼도 되겠네."
"뭐. 당장은 그렇지."
"그나저나 칼날파가 귀찮게 한다는 게 문젠데."
전장이 넓으면 넓을수록 천둥파는 소수인 만큼 운신이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방어전을 유도하여 끌어들이는 싸움을 시작한 것 아닌가.
"흠."
어?
잠깐만.
그러고 보니 나는 어차피 정말로 태호파와 칼날파를 끝장내기 위해 싸움을 시작한 게 아니잖아?
"김태호랑 이용수가 잡혀온 지 얼마나 됐지?"
"5일됐다."
기도를 시작한지 5일이라.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 그다음은 나한테 맡겨. 지금까지가 건달들의 싸움이었다면 지금부턴 전도사식 싸움을 보여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