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살려주세요!"
깊은 산속에 파여진 구덩이에서 임상출이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말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순간 대가리가 돌아버려서 소리를 질렀어요! 제발요!"
임상출의 애원에도 동생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모래를 퍼다 임상출 위에 뿌렸다.
이미 모래는 임상출의 허리춤까지 쌓여진 상태.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말했잖아. 오늘 뒤질 거라고."
"여자들 빚. 그거 보증서 전부 불태우겠습니다! 정말입니다!"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내가 병신으로 보이냐? 나 이 바닥 물 십년 넘게 먹은 놈이야. 너 그 빚보증서 다른 빚쟁이한테 사온걸거 아니야. 그렇지?"
"그. 그건."
당연하겠지.
"사실상 니 전 재산인데 그걸 처분하겠다고? 웃기는 소리하지 마. 그깟 종이 한 장 불태웠다고 없어질 빚이었으면 여자들이 그렇게 숨죽이고 살았을까?"
여자들이 임상출 손아귀까지 떨어지는 내용은 뻔하다.
돈을 빌리다 빌리다 대부업체에까지 손을 뻗는다.
대부업체는 여자에게 돈을 빌려주고 높은 이자를 받아 챙기다 여자가 이자를 연체하기 시작하면 본격적인 독촉이 시작된다.
원금이 어느 정도 회수됐고 여자에게 정상적인 방법으로 더 이상 뜯어낼 수 없다고 판단하면 자신들과 연계된 채권자에게 여자의 빚을 팔아넘긴다.
여자들의 빚을 헐값에 사들인 채권자들은 여자들을 협박해 은밀한 일을 하도록 종용한다.
못하겠다고?
여기서부터 협박과 폭력이 개입되는 거다.
그렇게 여자는 서서히 빚의 굴레에 빠져들고 어느 정도 단물을 빨아먹은 채권자는 또 다시 임상출 같은 놈들에게 채권을 팔아넘긴다.
문제는 이거다.
대부업체부터 채권자를 통해 임상출에게까지 넘어오는 거래과정과 흔적이 남아있다는 거다.
"너 고소할 거잖아. 물론 니가 여자들에게 지금처럼 하는 거 반의반도 회수 못할 거고 여자들이 파산신청하면 손가락만 쪽쪽 빨아야겠지만 어찌됐든 뒤가 찝찝하단 말이지. 어차피 구해주기로 한 거 뒤처리는 확실하게 해주는 편이 좋잖아?"
"안하겠습니다! 정말입니다!"
"개소리하네. 그냥 너 하나 죽으면 깔끔해. 바이바이."
"정말 아닙니다!"
"못 믿어. 바이바이."
"제발!!"
사실 나는 임상출을 파묻으면서도 지금 고민에 빠져있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여자들의 사정은 정말 딱하다.
다만 나도 폭력이외의 해결 방법은 딱히 없다.
경찰에게 넘긴다?
임상출에게 보호세를 받은 나 또한 수사범위에 포함된다.
‘정말 죽여?’
물론 죽이자면 못 죽일 건 없다.
내가 조직에서 일하며 배운 것 중엔 시체 청소도 포함이니까.
다만 살인은 조폭에게도 정말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윤리의 문제가 아니다.
그 후폭풍이 문제지.
이 놈이 사라지고 이 놈을 찾으러 돌아다니거나 신고하는 지인이 없을 거란 장담은 그 누구도 못한다.
수사가 시작되면 가장 마지막에 트러블이 있었던 내가 수사선상에 올라가는 건 자명한일.
이 새끼 하나 때문에 발목 잡히는 건 사양이다.
그때 불현 듯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오. 이것도 좋은 실험체 아니야?’
과연 사제 임명 스킬은 사람을 어디까지 변화시킬 수 있을까.
단순히 나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지는 것뿐인지 아니면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래도 나름 종교인데 교화 능력 같은 거 있을 수도 있잖아.’
수습 사제에 임명하고 계속 기도를 시켜 보는 거다.
아님 말고.
한 몇 달 해보고 안 되면 뚝배기 깨부수지 뭐.
꿩 먹고 알 먹고 딱 좋네.
"스탑!"
내 말에 삽으로 흙을 채워 넣던 동생들이 멈춰 섰다.
"야."
내 말에 임상출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예!"
"살고 싶어?"
"무. 물론입니다!"
"살고 싶고 돈도 되찾고 싶지?"
그러자 임상출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닙니다! 돈은 필요 없습니다."
"까고 있네. 야. 우리 둘 다 윈윈 할 만한 방법을 찾았다."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딱 6개월만 하면 여자들 채권 사온 돈 내가 줄게. 어때?"
숙소로 돌아오자 석주가 불만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형님. 걍 죽여 버리죠? 나 저런 새끼 딱 질색인데."
"임마. 형님이 다 생각이 있어서 그래. 나 못 믿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뭐..."
나는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
"여자들은?"
"돈 좀 쥐어주고 다 돌려보냈어요. 계속 불안해하던데요. 잡으러 오면 어떻게 하냐고."
"그럴만하지. 그동안 당한 게 있는데."
나는 깡패다.
법이 아닌 음지의 사람.
하지만 나름의 로망이 있다.
의리와 호탕함으로 뭉친 진정한 건달.
"이런 잡스러운 놈들이 대한민국에 얼마나 많을까?"
"수도 없이 많겠죠."
비록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찾아다니며 처리할 생각은 없지만 일단 눈에 띄면 가만두고 보지 못한다.
"앞으로 이런 일이 비일비재 하겠네."
평택을 평정하고 대한민국을 평정하며 나와바리가 커질수록 더 많은 개새끼들이 눈에 띌 거다.
그렇기에 난 임상출이 수습 사제 임명으로 변화가 생겨났으면 좋겠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 그러면 손에 피가 마를 날이 없을 거 같으니까."
"예?"
"아니야. 그냥 혼잣말이야. 신경 쓰지마. 그런데 석주야."
"네."
"우리 동네 말고 다른 동네에도 이런 개새끼들이랑 우리 같은 깡패 놈들이 있겠지?"
"있겠죠."
내가 너무 조급한 마음에 숲만 보고 나무를 보지 못했다.
"내가 왜 그랬을까.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했는데."
나는 고개를 갸웃갸웃하는 석주에게 말했다.
"석주야. 평택에 안중 말고 읍이랑 면이 몇 개나 되지?"
"에...열개는 안 될걸요? 왜요?"
순서가 잘못됐다.
너무 넘치는 자신감에 호봉파부터 건드렸고 결과적으로 잘 풀렸지만 이게 우선이었다.
"거기서 활동하는 건달놈들 다 합치면 몇 십 명은 되겠지?"
"대체적으로 이정도 동네 건달이면 많아야 열을 안 넘으니 그렇겠죠?"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 과실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가지를 좀 쳐야겠다."
"미친놈들이네."
오장수는 안중근처에 위치한 팽성읍에서 활동하는 깡패였다.
"장지후면 안중 놈 맞지?"
"예. 왜 그러십니까. 형님?"
오장수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놈들이 내일 쳐들어오겠다고 방금 전화 왔다. 지들이 천둥파라며."
"예? 천둥파? 풉."
"어이가 없네."
팽성읍은 미군부대가 자리를 잡으며 생겨난 동네였다.
군부대가 근처에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물장사가 아주 큰 규모로 생성되어있다는 뜻이었다.
당연히 물장사가 흥하는 곳엔 건달이 끼어들기 마련.
팽성읍은 인구수가 안중보단 작을지언정 유흥 규모는 몇 배나 큰 동네였다.
한마디로 건달입장에서 작지만 먹을 게 많은 알찬동네.
그만큼 이곳에 자리 잡은 오장수가 그 패거리의 숫자는 적지 않았다.
"걔네 겨우 8명인가 그러지 않았나?"
"그렇죠."
"웃기는 놈들이네. 내가 우습나? 어디서 잡놈들이 설치고 다녀?"
오장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애들 모아."
"전부 다요?"
"그래."
오장수의 패거리는 모두 15명.
호봉파처럼 조직원과 시다바리를 따로 나눌만한 규모는 아니었지만 동네 건달로서는 무시 못 할 숫자였다.
"잘근 잘근 밟아주지."
"근데 형님. 제가 이상한 소문을 들었는데..."
"무슨 소문?"
"그. 안중 촌놈들이랑 호봉파랑 다툼이 났다는 소문이 좀 있었거든요?"
"뭐? 호봉파랑?"
호봉파는 생겨난 지 십 수 년도 지난 정말 제대로 된 조직인 반면 장지후와 패거리는 말 그대로 양아치에 가까운 동네 깡패들.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어디서 헛소문을 듣고 와서 지랄이야?"
"저도 들은 소문이라서요..."
"그놈들이 호봉파랑 시비 걸릴 깜냥이나 되냐? 호봉파에서 손가락으로 살짝만 눌러도 터져나갈 텐데. 어? 잠깐."
잠시 생각하던 오장수가 말했다.
"혹시 이놈들 호봉파에 먹힌 거 아니야?"
"예?"
"지금 평택 두고 4개 조직이 대립중이잖아. 호봉파가 우리나 장지후 같은 놈들 잡아다 칼잡이로 쓰려는 거 아니냐고. 생각해보니 8명이서 기습도 아니고 선전포고를 했어. 무슨 자신감이겠어? 호봉파 얼굴마담 하는거 아니냐 이 말이야."
호봉파가 비밀리에 장지후와 그 패거리를 접수하고 장지후를 얼굴마담 세워 평택시의 작은 건달들을 끌어 모아 다른 조직 간의 전쟁에 활용하려는 게 아니냐는 의심.
"느낌이 안 좋은데."
오장수 패거리가 사무실로 사용하는 건물 안엔 연장으로 무장한 건달들이 가득차 있었다.
"오늘 온다고 했지?"
호봉파에게 먹혔다고 추정되는 장지후의 선전포고.
"몇 명이나 올까?"
불안한 마음에 모든 동생들을 소집하고 그도 모자라 동네 양아치들까지 총동원해 22명을 모았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호봉파가 마음만 먹으면 수 십 명 동원하는 거 일도 아닐 텐데."
"아닐겁니다. 형님."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렇지 않고서 그렇게 자신감 넘치게 전화할 리가 없잖아."
오장수 마음속에 장지후는 이미 호봉파의 앞잡이로 뒤바뀌어 있었다.
"시팔. 뭐가 아쉽다고 이 시골까지 진출하는 거야?"
안절부절 방안을 왔다갔다하던 오장수가 말했다.
"상납금 드리겠다고 설득해볼까?"
오장수가 이렇게 두려워할 만큼 동네 건달과 정규 조직 간의 전력차는 어마어마했다.
뛰어난 주먹일수록 큰물에서 놀고 싶어 하는 게 인지상정.
당연히 그런 주먹들이 모인 게 조직인 만큼 개인 실력부터 숫자까지 비교대상이 아니었다.
평택시 안의 모든 동네 건달을 다 끌어 모으면 호봉파에 숫자론 비벼볼 만해도 막상 싸우면 필패라는 게 오장수의 생각이었다.
"이철기랑 철구, 이상억까지..."
모두가 평택에서 손꼽히는 주먹들.
그렇게 불안에 떨고 있는데 사무실을 누군가가 거세게 두드렸다.
쿵쿵쿵.
"손님 왔다! 손님 받아라!"
이 사무실은 일수 사무실도 겸해서 사용하는 곳.
저렇게 당찬 손님이 올 리가 만무했다.
건달들이 연장을 움켜쥐며 준비를 하자 오장수가 만류하며 말했다.
"기다려!"
호봉파와 싸우면 필패.
대화가 가능하다면 가급적 대화로 풀고 싶은 게 오장수의 생각이었다.
"내가 신호 보내기 전까지 다들 자리에 앉아있어. 흠흠."
목소리를 다듬은 오장수가 사무실 문을 열었다.
"반가워. 그쪽이 오장수?"
내 인사에 오장수가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거렸다.
"오장수 아니야?"
내 말에 오장수가 계속 주변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래. 내가 오장수다."
"맞구만 왜 대답을 안 해. 반가워. 난 장지후. 얼굴은 처음보지?"
나는 양 주먹을 부딪히며 말했다.
"뚝배기 깨러왔어."
이제 달려들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오장수가 계속 나와 동생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이게 끝?"
뭔 소리야.
"그럼 끝이지."
"호봉파는?"
여기서 호봉파가 왜 나와?
"뭔 소리야 그게?"
"너네 호봉파한테 먹힌 거 아니었어?"
이 놈이 약을 잘못 먹었나.
"호봉파한테 우리가 왜 먹혀? 먹었으면 먹었지."
내 말에 오장수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냥 미친놈들이었어? 난 그것도 모르고 긴장하고 있었고?"
"좀 알아듣게 설명해라."
갑자기 오장수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졌다.
"이... 이 개새끼들이 나를 가지고 놀아?"
"우리가 언제 너를 가지고 놀았는데? 온다고 친절하게 전화까지 해줬잖아."
나는 사무실 안을 힐끗 보며 말했다.
"보니까 많이들 모여 있네. 딱 좋다."
오장수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했다.
"얘들아."
"예! 형님!"
"조져!"
오장수의 말에 건달들이 연장을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조져!"
"죽여버려!"
건달들이 달려들자 나는 자세를 잡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환영인사가 거창한데? 한번 놀아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