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
가족의 의미? (4)
"에이, 아빠가 뭐가 미안하다고 그러세요. 다른 사람은 아빠를 뭐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나만큼은 아빠라는 사람을 완전히 이해해요. 아빠가 포기했던 것들, 그러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것들. 그걸 제가 왜 모르겠어요. 그래서 저는 아버지라는 사람을 다른 누구보다 존경하고 있습니다."
기적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이성진은 지난 십수 년간 마음을 답답하게 했던 무언가가 일시에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아들의 고백이 치료제가 되어 그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아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한 전화에서 되레 자신이 위로를 받고 있었다.
그 덕분에 이성진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어리게만 생각했던 아들이 어느새 훌쩍 커 버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 피곤하지?
기적은 어쩐지 이성진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전 피곤해요. 누구 때문에 저녁도 제대로 못 먹었어요. 배고파요."
물론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무뚝뚝한 이성진의 성정을 알기에.
그저 한 번, 어리광 아닌 어리광을 피워 봤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성진이 다시 한번 기대와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저녁도 아직 못 먹었느냐? 밥 한 끼 같이 먹으면 좋은데 거리가 멀어서 그러질 못하는구나. 네 엄마랑 아예 서울로 올라갈까?
그러자 옆에서 손성희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가긴 어딜 간다고 그래요. 이 집은 어떻게 하고 서울에 올라가? 술 취했어요?
-뭐야? 술 취하기는 누가 취했다고 그래. 저녁 혼자 먹어야 한다니까 안쓰러워서 하는 이야기지.
어느 순간부터 이성진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손성희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손성희가 전화기를 빼앗은 것이었다.
-아들, 네 아빠가 반주 한잔해서 이상한 소리 하신다. 신경 쓰지 말고 얼른 쉬어라.
기적은 희미하게 들려오는 이성진의 목소리에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엄마, 저 괜찮아요. 그리고 올라오실 생각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우리 집 넓어요. 부담되시면 엄마 아빠 사실 집 하나 마련해 드릴 수도 있고요. 그러니까 쓸쓸하시면 걱정 말고 올라오세요."
마음이 복잡했을까? 손성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연 것은 몇 초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래, 아들 고맙다. 진지하게 한번 생각해 볼게. 오늘 일 너무 마음 쓰지 말고. 알았지?
"네, 그럴게요. 쉬세요."
그것으로 통화 종료.
액정은 어느새 초기 화면으로 돌아가 있었지만 기적은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지 않고 있었다.
스마트폰에서 부모님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밤은 깊어 날씨는 쌀쌀해졌지만 기적은 조금도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 * *
"아빠, 이제 어떻게 해요? 작은아버지까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아들 이신적의 말에 이성훈은 약 1시간 전 있었던 동생과의 전화를 떠올렸다.
정말 상상도 못 했었다. 항상 예스라고 말하던 동생 이성진이 그렇게 격앙된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는.
-형, 좌우지간에 다시 한번 내 아들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소리 했다가는 내가 가만히 안 있을 줄 알아! 알아들어?
마치 성난 황소처럼 들이받는 이성진의 모습에 이성훈은 더는 말도 꺼내지 못하고 전화를 끊고 말았다.
"흠……."
거기까지 생각한 이성훈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언가를 생각할 때 나오는 그만의 습관이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이성훈이 고민을 끝내고 입을 열었다.
"이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자."
이신적이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네? 이 집을 담보로요? 다른 건 몰라도……. 이미 카페도 넘기고 부동산도 다 정리한 마당에……. 집만큼은 엄마가 허락 안 하실 텐데요?"
"이 녀석아, 목소리 낮춰라. 네 엄마 들을라. 그럼 이 좋은 기회를 그냥 날리냐? 뭐가 문제냐? 땅만 사면 곧 그린벨트 풀릴 거고, 그렇게만 되면 돈 갚는 거는 일도 아닌데. 적당히 올랐을 때 팔면 그만이지 않느냐?"
"그건 그런데……."
걱정이 앞선 이신적이 말꼬리를 흐리는데 일순 이성훈이 괘씸하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열받네."
"뭐가요?"
"아니, 그렇잖느냐. 그냥 달라는 것도 아니고 차용증 써 줄 테니 좀 빌려달라는 건데, 그걸 그렇게 매몰차게 거절해? 선산은 왜 안사냐고 따지면서? 그게 큰아버지에게 보일 태도냐?"
이신적은 험험 헛기침을 했다.
"그런데 작은아버지가 선산을 사는 조건으로 도장을 찍어 준 건 맞잖아요……."
그 말에 이성훈이 눈썹을 역팔자로 끌어 올렸다.
"이 녀석아, 그러니까 애초에 그따위 조건을 왜 들이대? 나랑 아버지가 일군 돈, 집안의 장남인 내가 물려받는 게 당연한 거지. 당연한 돈을 받는데 거기에 무슨 조건을 들이대느냐고! 내 말이 틀리냐?"
"그건 그런데……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니까……."
"내가 안 지키겠다는 것이 아니야. 그동안 이것저것 부동산 거래하다 보니 항상 돈이 달려서 그런 것 아니겠느냐? 이번 일만 잘 해결되면 선산 그 까짓 거 못 살 게 무어냐? 다 우리 같이 잘되자고 하는 일인데 조카 놈이 그걸 못 도와주겠다니 황당할 따름이지."
"……."
이신적은 더는 말을 하지 않고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성훈의 말에 설득당해서가 아니었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이었지만 괜히 말을 꺼냈다가 불호령이 떨어질까 싶어 그냥 입을 다문 것이었다.
조금만 있으면 백억 대의 땅이 자신의 소유가 될 텐데 괜히 입을 열어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를 필요는 전혀 없었다.
* * *
길었던 겨울이 완전히 끝나고 봄이 찾아왔다. 온 세상은 초록빛, 바람은 살랑살랑, 만발한 꽃은 절로 탄성이 나올 정도, 기분이 좋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할 정도의 완연한 봄이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흔히 사용하는 이 순서처럼 봄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계절이다.
학교에서는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고, 방송가는 개편을 하며, 회사에서는 지난 실적을 리셋하고 새로이 실적을 쌓기 시작한다.
그것은 힐링 센터라고 다르지 않았다. 힐링 센터 또한 봄을 맞이하여 새로운 시작을 했다.
성공적인 지난 1년을 뒤로하고 새로운 얼굴들과 함께 새로운 시작을 알린 것이다.
새로이 시작된 3월의 첫 휴무일.
기적은 전 직원들과 함께 야유회를 떠났다. 새해 들어 뉴 페이스들이 많이 합류했기에 서로 친해질 수 있는 시간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야유회 장소는 기차와 닭갈비가 유명한 춘천.
모처럼 바깥으로 나온 기적과 사람들은 관광지로 유명한 곳을 구경하기도 하고, 닭갈비를 먹기도 하면서 친분을 쌓아 나갔다. 여기저기서 즐거운 담소 소리가 들려왔다.
"춘천 너무 좋네요. 아까 레일바이크 꿀잼이었어요."
"뭐니 뭐니 해도 춘천은 역시 닭갈비죠. 엄청 비싼 닭갈비라 그런지 맛있네요."
"맞아요. 원래 춘천이 닭갈비 비싸기로 유명하잖아요."
"그래요? 춘천이 닭갈비가 맛있어서 유명한 게 아니라 비싸기로 유명한 거였어요? 그건 몰랐네. 뭐 상관없잖아요? 법카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죠."
이제 힐링 센터는 소규모 사업장이라 하기 힘들 정도로 규모가 커져 버렸다. 일단 직원의 숫자가 열 명을 훌쩍 뛰어넘었고, 수입도 지난 한 달 동안 벌어들인 돈이 억대를 가볍게 돌파할 만큼 파이가 커져 버렸다.
그 덕분에 기적은 힐링 센터를 개인사업장에서 법인 회사로 전환시켰다.
보다 낮은 법인세 혜택도 받고, 정부로부터 지원도 받고, 또 늘어난 직원들과 함께 늘어난 식비, 문화생활비 등 각종 경비도 절감시키기 위함이었다.
소득을 내 마음대로 운용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상관없었다. 연봉 자체를 높게 책정하기도 했고, 그만큼 사업체가 커 나가는 것이니 아쉬울 것은 없었던 것이다.
기적이 법인을 설립하고 받은 법인 카드, 일명 법카를 꺼내 들자 직원들이 환호성을 터뜨렸다.
"와아, 역시 우리 센터장님!"
"멋있으세요~ 센터장님! 그럼 걱정 없이 많이 먹겠습니다."
법인 카드가 나오기 전에도 기적은 직원들에게 쓰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식비로만 매달 35만 원씩을 지급할 정도로 직원들에게 아낌없이 돈을 투자했다.
그리고 그러한 경향은 법인 카드가 나온 이후로 더욱 강해졌다. 어차피 경비 처리가 되니 씀씀이가 더욱 늘어난 것이다.
법인 카드가 나온 이후 기적은 직원들의 동아리 활동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했고, 미리 만들어 둔 양식에 따라 보고서만 올리면 퇴근 이후의 문화 활동, 휴무일을 활용한 스포츠 레저 활동 등 다양한 동아리 활동을 위한 비용을 아낌없이 지원했다.
다만 조건은 있었다. 직원이 최소 두 명 이상 참여하고 인증 샷을 첨부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발생하는 요금의 70%만 지원한다는 것, 이렇게 두 가지였다. 악용하는 것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책이었다.
당연히 직원들은 대환영이었다. 기적이 동아리 활동을 하라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누구든 두 명만 모이면 특별히 돈 들이지 않고 취미 생활을 할 수 있게 됐으니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러니 힐링 센터에 다니는 직원들의 만족도는 높을 수밖에 없었다.
"저 힐링 센터에서 일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친구들도 완전 부러워해요. 완전 꿈의 직장이라고."
새로이 입사한 직원의 말에 기적은 민망한 미소를 흘렸다.
"꿈의 직장까지요? 너무 늦게 끝나서 조금 그렇지 않나요?"
옆자리에 있던 진욱이 아니라는 듯 검지를 좌우로 흔들어 보였다.
"대신에 돈을 많이 받잖아요. 야근 수당도 못 받고 일하는 직장인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에 비하면 우리는 정당한 대우를 받고 일하는 건데 누가 불만을 가지겠어요. 그걸로 불만 가지면 진짜 그 사람이 이상한 거죠."
"어…… 우리 물리치료사들은 거의 야근 안 하잖아요?"
"대신에 물리치료사들은 돈을 많이 못 벌잖아요. 우리를 물리치료사라는 범주에 넣으면 안 되죠. 우리는 물리치료사라기보다는 뭐랄까? 물리치료사 면허증을 가지고 있는 회사원, 정도랄까? 회사원치고 야근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수당이라도 받으면 다행이지."
"맞아요. 저희는 진짜 만족하면서 다니고 있어요."
"선생님들이 만족한다면 다행이고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뭔가 하고 고개를 돌려보니 수정이 기적을 바라보며 살짝 웃고 있었다. 살짝 치켜뜬 눈이 마치 이렇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기분 좋아 보이네요?'
수정이 알아들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기적은 눈빛을 통해 이렇게 대답했다.
'네, 정말 기분 좋습니다.'
이제는 정말 성공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불과 1, 2년 전만 해도 망할 날만 기다리던 힐링 센터가 이제는 모두가 만족하는 꿈의 직장으로 변모했다는 사실에서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었다.
'이대로만, 더도 덜도 말고 이대로만 나아가자.'
기적은 그렇게 주문을 걸며 잘 읽은 닭갈비를 입에 집어넣었다. 그 맛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