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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물리치료사-198화 (198/205)

# 198

가족의 의미? (3)

"그건 아니죠, 큰아버지."

단호한 기적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큰아버지,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셔야죠. 아버지가 도장 찍어 주는 조건으로 큰아버지가 제사랑 집안 대소사 도맡아 하기로 하신 거잖아요."

노골적인 기적의 말에 이성훈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뭐? 뭐, 뭐, 뭐 뭐야? 지금 너……."

그러나 감정이 북받친 기적은 이성훈의 말을 단번에 잘라 버렸다.

"아니요. 아직 제 말 다 안 끝났어요. 큰아버지 그때 뭐라고 하셨어요? 도장 찍는 조건으로 제사랑 집안일은 물론 선산까지 사겠다고 하셨죠? 그래서 선산은 사셨어요? 왜 안 사세요? 거기 땅 사는 거보다 선산을 먼저 사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냥 구두로 한 약속이니 지키실 생각 없으신 거예요? 어디 한번 말해 보세요."

이성훈이 얼굴을 파르르 떨었다. 성미가 급한 그는 마음이 앞서 말을 심하게 더듬어 대기 시작했다.

"야! 임마! 아, 아,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 크, 큰아버지가 할아버지 모시고 살았다. 그런데도 그따위로 말할 수 있는 거냐?"

"모시고 살았다고요? 아까부터 자꾸 이상하게 말을 하시네요? 말은 바로 해야죠. 큰아버지가 할아버지를 모시고 산 게 아니라 할아버지가 큰아버지를 데리고 사신 거죠. 아무 능력도 없는 큰아버지가 할아버지 재산으로 먹고산 거 아니에요?"

"뭐, 뭐, 뭐? 이 빌어먹을 놈이…… 이 크, 크, 큰아비가 시골로 내려가서 할아버지랑 같이 농사지어서 여기까지 온 거다. 이 녀석아…… 네가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이는 거냐?"

"할아버지의 아들이 아니었으면 큰아버지는 일당 10만 원도 못 받고 일꾼으로 일해야 했어요. 그런데 같이 농사지었다고 그게 같이 일군 건가요? 애초에 다 할아버지 땅인데?"

"이……."

이성훈이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기적은 틈을 주지 않고 공세를 이어 나갔다.

"뭐, 좋아요. 백번 양보해서 같이 일궜다고 쳐요. 그래서 할아버지 재산 다 가지고 가셨잖아요. 아빠가 군말 없이 다 양보했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뭘 더 어쩌라고요? 그래서 조카인 저한테 찾아와서 5억을 내놓으라는 거예요? 대출까지 받아 가면서? 예전에 아빠한테 500만 원 빌려서 사신 땅 지금 얼마 되셨어요? 5억에 파셨잖아요? 그런데 아빠한테 500만 원 갚으셨다면서요? 저한테도 그러시려고요?"

기적은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들을 모조리 토해 냈다. 그동안 가슴에 쌓아 두었던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낸 것이다.

한편으로는 아버지에게 무슨 소리를 들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가슴이 후련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이성훈이 삿대질을 하며 언성을 높였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이…… 네 아버지가 그 따위로 하라고 가르치던?"

"제 얼굴에 침을 뱉으시네요. 부끄러운 줄 아세요. 아무튼 저는 오늘 이야기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다시는 찾아오지 마세요."

단호하게 말한 기적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저…… 저…… 너 거기 서라!' 하는 이성훈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기적은 조금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더 이상 어른으로 생각하지 않기로 한 마당이었다. 그런데 그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출 이유는 전혀 없었다.

이성훈과 담판을 치르고 돌아온 이후 기적은 하루 종일 저기압이었다. 잘잘못을 떠나서 집안의 어른과 한바탕 난리를 쳤으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일과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차 안에서 수정이 조심스레 물었다.

"아까 무슨 일 있었죠? 그…… 큰아버지? 하고."

기적은 슬쩍 수정의 얼굴을 바라본 뒤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티 많이 나나? 맞아. 일이 있었지. 아주 큰일이 있었지."

"무슨 일인데요?"

"집안일이라 조금 말하기 그런데……."

"말하기 많이 그런 이야기예요? 말하기 뭐하면 안 말해도 되는데…… 그래도 혼자 끙끙거리는 거보다는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도 좋을 텐데?"

침음을 삼킨 기적은 이내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정이라면 속 안의 답답한 것들을 털어놓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운전을 하며 그는 집안의 사정과 오늘 큰아버지와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말을 하는 기적의 목소리는 다소 격앙되어 있었다.

"아무튼…… 그때부터 큰아버지가 할아버지를 모셨는데…… 그 대가?로 할아버지 재산을 몽땅 차지하셨어……."

"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 아무리 그래도 그거는 아니지 않나요?"

"그런데 오늘 나한테 찾아와서 돈을 빌려달라는 거야. 거절했더니 부모님 이름을 들먹이면서 나무라더라고……."

"어머! 말도 안 돼! 어떻게 조카한테 그래요? 그래서 한바탕 쏘아붙인 거예요? 잘했어요, 진짜 잘했어."

수정은 그런 기적의 목소리에 맞춰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리액션을 하기도 하면서 상처받은 기적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것이 효과를 발휘한 것일까? 이야기를 마친 기적의 얼굴은 한결 밝아져 있었다.

"이야기하고 나니까 정말 마음이 힐링되는 기분이네. 털어놓길 잘했다."

"당연하죠. 잊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치료사거든요? 이야기 들어 주고 상담해 주는 데는 전문가라고요."

싱긋 웃은 수정이 검지를 들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버님도 참 대단해요. 돈 앞에서 그러기가 쉽지 않은데. 딱 도장 찍으시다니…… 처음에 오빠 보고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지? 생각했는데 오늘 이야기 듣고 완전히 이해했어요. 그런 아버님 밑에서 컸으니 오빠 같은 사람이 생겼죠."

"오빠 같은 사람이 뭔데?"

"바보? 아니면 호구?"

"뭐야?"

기적이 짐짓 인상을 써 보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수정이 마침 신호에 걸려 차를 멈춘 기적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바보면 어떻고, 호구면 어때요? 다 칭찬이에요. 그래서 내가 오빠 좋아 하잖아요. 각박한 세상에 오빠같이 바보 한 명 있으면 좋잖아요."

"나 참…… 사람을 완전히 바보 취급하는구먼. 나도 단호할 때는 완전 단호박이야. 말했잖아? 오전에 찾아온 오민석 팀장하고 큰아버지한테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누가 뭐래요? 좋다는 거라니까?"

기적이 눈을 흘기자 수정이 마찬가지로 눈을 흘기며 되받아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수정이 이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며 그녀가 말했다.

"아직 어려서 잘은 모르겠지만…… 가끔 뉴스 보면 남보다 못한 가족에 대해서 많이 나오잖아요. 소송 거는 사람들도 있고, 칼부림 나는 경우도 있고……. 그런 경우 보면 다들 돈 문제로 얽혔더라고요. 이야기를 들어 보면 가족인데 그 정도도 못해 준다고 하니 화가 나서 그랬다, 뭐 이렇게 변명을 하잖아요. 이거는 그냥 제 생각인데 가족이라고 해서 뭔가를 기대하면 안 되는 것 같아요. 말 그대로 가족이지 호구가 아니잖아요. 어려울 때 도와주면 고마운 거지만…… 뭔가를 기대하기보다는 그냥 좋은 이야기만 하고 좋은 모습만 보고 사는 게 좋은 것 같아요."

기적은 수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백퍼센트 동의해. 세상에 당연한 건 없으니까. 부모니까 당연히 자식에게 뭔가를 해 줘야 하고, 자식이니까 부모에게 당연히 뭔가를 해 줘야 하는 건 없는 거지. 형제지간에도 마찬가지고."

그렇게 말한 기적이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소송 이야기하니까 생각난 건데, 요즘 부모가 자식을 상대로 소송 거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고 하더라고."

수정이 그건 또 무슨 말이냐는 듯 에? 하고 물었다. 그러자 기적이 말을 이었다.

"내가 너를 이렇게 키우느라 지금 노후가 보장되지 않으니 너희들이 내 노후를 책임져라. 뭐 이런 취지로 다달이 얼마씩 생활비를 보내라 하는 소송을 건다고 하더라고."

"아? 정말요? 헐! 대박이네요 정말…… 부모님이 자식을 상대로 생활비 지급 소송을 걸다니……."

"슬프지만 그게 요즘 우리나라의 현실인 거지. 그리고 실제로 승소해서 생활비를 받는 경우도 많이 있대."

"아, 부모 봉양의 책임이 마냥 도의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거네요?"

"그렇지. 그런데 핵심은 이거야. 이렇게 부모님 쪽이 승소하는 사례를 보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하더라고. 부모가 정말 생활이 곤궁할 정도로 힘들게 살고 있고, 자식이 생활비를 보내도 먹고살 만큼의 경제 능력이 되어야 하고. 쉽게 말해 자식이 능력이 되면서도 부모를 나 몰라라 한다는 거지. 그러니까 예전처럼 부모는 자식에게 모든 걸 헌신해 키우고, 또 자식은 당연하게 부모를 봉양하고. 이런 시대는 이제 끝났다는 거야."

"그러네요. 그렇게 보면 가족의 의미가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네요.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많잖아요.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남편을 위해, 딸을 위해, 아버지를 위해. 모든 걸 다 내팽개치고 간호에 힘쓰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우리는 그걸 매일같이 보고 있고."

물론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앞서 말한 사례는 극히 일부일 뿐이고,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부모로서의, 자식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개를 끄덕인 기적이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 물리치료사들은 행복한 거지.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하니까. 우리 물리치료사들은 조금 더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어."

"이야기가 왜 그렇게 흘러가죠? 이상한 결론이네."

수정이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일순 기적의 스마트폰에 불이 들어오며 전화가 걸려 왔다.

화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빠'라고. 이를 본 기적은 완전히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었다. 전화를 받지 않고 머리만 긁적이는 그를 향해 수정이 말했다.

"안 받아요? 아버님이 퇴근하기 기다렸다가 전화하신 것 같은데요?"

"집에 도착해서 받으려고. 전화가 길어질 것 같아서."

"아…… 알겠어요."

이후로 두 사람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차는 곧 수정의 집에 도착했고, 차를 돌린 기적은 집에 도착하기 무섭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곧바로 아버지 이성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큰아버지가 센터에 찾아왔다는 게 정말이냐?

"예……."

-돈을 조금 빌려달라고 했다고? 그래서 네가 유산 상속 이야기까지 꺼냈다고?

"예……."

이성진이 술에 얼큰히 취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을 때만 하더라도 기적은 곧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야기가 조금 다르게 진행되었다.

-잘했다.

"예, 예?"

-잘했다고.

이성진이 조금 흥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보자 보자 하니까 내가 완전히 보자기로 보이는 거지. 어떻게 조카한테 와서 돈을 빌려달라고 하나? 자기는 뭐 자존심도 없나? 그래서 뭐 얼마나 빌려달라고 하던?

"5억요……."

-뭐어? 5, 5억? 정말 제정신이 아니구나. 그 양반이 완전히 미쳤어. 에라이 빌어먹을.

기적은 격앙된 이성진을 진정시키려 했다.

"아버지한테서는 더 큰돈도 가져갔는데, 뭘 5억 가지고 그러세요?"

그러나 이성진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 성을 냈다.

-그건 어디까지나 형제간의 문제니까 그럴 수 있지! 수십억이 아니라 수백억도 포기할 수 있어. 하지만 너한테까지 손을 뻗으면 안 되는 거지. 그러라고 아빠가 도장 찍어 준 거 아니냐. 이번에는 그 양반이 단단히 실수한 거야. 지금 네 엄마도 단단히 화가 나 있다. 네 엄마는 이제 그 양반 안 보겠다고 한다. 나도 안 보고 싶은 심정이다.

"아이고, 제가 단칼에 거절했어요. 그러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미안하다. 이 아비가 미안해.

평소 같았다면 하지 못했을 말을 이성진은 술기운을 빌려 하고 있었다. 이에 기적도 용기를 내 마음 속 깊이 담아 두었던 말을 꺼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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