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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물리치료사-193화 (193/205)

# 193

체력은 국력이다 (6)

최근 기적이 가장 많은 신경을 쓰고 있는 환자는 역시나 석한이었다. 인연이 있는 사이이기 때문인지 알게 모르게 한 번 더 손이 가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석한의 회복세는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고 있었다. 요원하기만 했던 요추 4번 레벨의 운동 신경이 회복되면서 이제 제법 능숙하게 스탠딩 포지션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몸이 회복됨에 따라 석한과 기적의 관계 또한 상당 부분 회복되었다.

석한은 이제 개인사까지도 서슴없이 털어놓을 만큼 기적을 믿고 의지하고 있었다.

"만약에 몸이 좋아지면 나도 너처럼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싶다. 전에는 정말 나밖에 모르고 살았는데, 네 덕분에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거든."

석한의 다리에 보조기를 착용시키며 기적이 대답했다.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게 있어?"

"있고 말고. 내가 이래 봬도 의사잖아? 그래서 일단은 해외 빈민국들을 다니면서 의료 혜택을 못 받는 사람들에게 의술을 베풀고 싶다. 할머니에게 좀 도움을 받을 생각이다."

"그거 좋은 생각이네."

고개를 끄덕인 기적이 석한의 다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자, 일어나 보자. 이야기는 일어나서 이어 가는 걸로."

그 말에 석한이 끄응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내 중심을 잡은 석한이 잠시 멈췄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한 사람이 나뿐만이 아닌가 보더라."

"어, 뭐가?"

그건 또 무슨 소리냐는 듯 기적이 물었다. 그러자 석한이 용무가 있는 지은을 대신해 찾아온 명의진과 김귀연을 슬쩍 보며 말했다.

"아빠야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그렇다 치고……. 우리 할머니 말이야. 엄청 크게 기부를 하신 모양이야. 오죽했으면 인터넷에 기사까지 실렸다니까?"

"정말?"

"그렇다니까. 한 10억 정도 하신 모양이야. 기사 제목이 아마 부동산계의 큰손, 통 큰 사회 환원이었나? 인터뷰까지 실렸어."

"에, 정말? 그 까칠한 이사장님이 인터뷰까지 하셨다고? 으으, 진짜 상상이 안 되네."

기적이 상상이 안 된다는 듯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의 귓전으로 석한의 의미심장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기사 한번 검색해서 봐 봐. 되게 재미있어."

"그래. 이따가 한번 볼게."

"아니, 지금 한번 봐 봐. 나 잠깐 앉아서 쉬는 동안."

"뭐 어떻기에 자꾸 그래? 알았어. 일단 자리에 앉아 봐."

석한을 자리에 앉힌 기적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부동산계의 큰손, 통 큰 사회 환원'이라는 검색어를 적어 넣었다. 그러자 정말로 동영상이 첨부된 기사가 몇 개 떠올랐다.

"이거 맞아?"

화면을 보이며 묻자 석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맨 위에 걸로 보면 돼. 그게 풀버전이야."

"알겠어."

기사를 클릭한 기적이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이에 따라 화면 가득 클로즈업된 김귀연의 얼굴이 나타났다.

화면 하단에 질문이 자막으로 나타났고, 김귀연이 이에 대답하는 장면이 영상으로 편집되어 있었다.

-이 돈이 어떻게 쓰이길 바라십니까?

-세상에 많은 병들이 존재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돈이 없어 수술을 받지 못하는 이들, 또 돈이 없어 치료를 뒤로 미루는 이들이 더 이상은 없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중 유독 기적의 관심을 끄는 질문과 답변이 있었다. 화면 하단에 질문이 나타났다.

-미라클 재단을 설립하고, 이를 통해 10억이라는 큰돈을 기부하셨는데요. 이렇게 큰돈을 기부하게 된 계기가 있으십니까?

-사실 얼마 전에 손자가 교통사고로 스파이널 코드가 손상되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다시는 걸을 수 없다는 말도 들었죠. 정말 그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절망의 터널 끝에서 그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에게 영향을 받아 이렇게 기부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누구인가요?

김귀연은 곰곰이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지금 제 손자를 치료하고 있는 물리치료사입니다.

-그 물리치료사가 어떻게 영향을 주었나요?

이번에는 곧바로 대답이 이어졌다.

-정말이지 바보 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변을 항상 따뜻하게 만들어 버리는 힘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 얘기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사실 제 손자와 이 물리치료사는 그렇게 사이가 좋지 못했습니다. 제 손자가 이 물리치료사에게 나쁜 짓을 많이 했었습니다. 저도 거기에 일조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물리치료사는 모든 것을 포용하고 제 손자를 치료해 줬습니다. 정말 부끄럽더군요. 지난 시간들이…… 내가 한 행동들이…… 해서 앞으로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기부는 그 일환으로 한 일입니다. 앞으로도 미라클 재단을 통해 지속적으로 기부를 하고, 또 좋은 일을 해 나가겠습니다.

동영상이 거기까지 재생되었을 때 기적의 표정은 놀람을 넘어서 아연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클라이맥스는 아직이었다.

-이 인터뷰를 통해서 그 물리치료사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또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손자를 치료해 주어서, 또 인간 김귀연을 바른 길로 인도해 주어서 너무나 고맙다고 말입니다.

동영상은 김귀연이 깊숙하게 허리를 숙이는 것으로 끝이 나고 있었다. 재생이 끝나기 무섭게 석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이 동영상, 할머니가 너에게 보여 주라고 한 거야. 이렇게라도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다고. 그리고 나한테 물어보라고 하더라. 미라클 재단에다 네 이름을 올려도 되겠느냐고.

기적은 곧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석한의 말이 현실로 와 닫지가 않아서였다.

그러자 이를 눈치챈 석한이 다시 말했다.

"농담 아니고 진짜야. 할머니가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하셨어. 물론 걱정할 필요는 없어. 이름만 네 이름으로 하는 거고 실무는 사람을 고용해서 하게 될 테니까."

"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재단에 내 이름을 올리겠다고? 이사장님 돈을 내 이름으로 쓰겠다는 거야, 지금?"

기적은 여전히 이해가 잘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사실 이해가 된다고 해도 딱히 뭐라 말하기가 힘든 상황이었고.

석한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자세한 거는 할머니랑 직접 이야기해 봐라. 할머니 딴에는 나름대로 너한테 보상을 해 주고 싶은 모양인데, 평양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는데 싫으면 안 하는 거지, 뭐."

이후로는 다시 치료가 이어졌다. 기적은 다시 석한을 일으켜 세웠고, 스탠딩 포지션에서 갖가지 동작을 가져가며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예정되어 있던 30분이 지나갔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보조기는 네가 풀 수 있지?"

"할 수 있지."

그렇게 말한 기적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명의진과 김귀연이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기적이 인사를 건네자 명의진이 예의 젠틀한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오랜만이네요. 별일 없지요?"

"예, 예. 원장님도 별일 없으시죠?"

"물론입니다. 저 며칠 전에 병원에도 복귀했습니다."

"아, 요즘 병원이 어렵다는 소식 들었는데 이제 원장님이 복귀하셨으니 금방 제자리를 찾겠습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금방 안다는 말이 있다. 명의진의 휴직 이후 명성 병원은 급격한 내리막길을 걸었고, 그 결과 위기라는 말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적자 행진을 거듭하고 있었다.

사실 거기에는 기적의 퇴사가 크게 한몫했지만 만약 명의진이 있었다면 기적의 퇴사도 없었을 테니 이것도 크게 보면 명의진의 휴직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명의진이 사람 좋게 웃었다.

"허허허, 소문이 벌써 여기까지 퍼졌습니까? 열심히 일해서 빨리 제자리로 돌려놔야겠습니다."

"원장님이 복귀하시면 병원도 금방 제자리를 찾을 겁니다. 원장님의 묵묵한 카리스마와 행동하는 리더십을 보면 열심히 일하지 않을 수가 없거든요."

두 사람이 그렇게 덕담을 주고받는 사이, 석한과 김귀연은 치열하게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다.

'미라클 재단에 대해서 이야기했니?'

'이야기 했는데 아직 대답이 없어. 아무래도 할머니가 직접 이야기해 봐야 할 것 같아.'

'나보고? 나는 못 한다.'

'못 한다고? 왜 못 해? 내가 하게 만들어 줄게.'

눈으로 말해요는 거기까지였다. 안면을 몰수한 석한이 적당한 타이밍에 입을 열었다.

"야, 기적아. 할머니가 너한테 할 말 있다는데?"

말을 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김귀연을 위해 판을 깔아 준 것이었다.

기적은 설마설마하는 표정으로 김귀연을 바라보았고, 김귀연은 몇 번이나 입을 꿈틀거린 후에 입을 열었다.

"내가 자네한테 뭔가 부탁할 입장이 아니라는 건 잘 알지만…… 늙은이 특유의 뻔뻔함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주게나."

기적이 알겠다고 대답하자 김귀연이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동영상을 봤으면 알겠지만 내 자네한테 정말 많이 배웠어. 많이 늦었지만 나도 여생 동안 남을 도우면서 살고 싶은데 자네한테 도움을 많이 받았으면 해서. 우리 재단에 감사로 자네를 영입하고 싶은데 말이야. 좀 도와주겠나?"

재단의 감사라면 재단의 자금과 관련한 감시를 맡는 역할이다. 돈이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 빠져나가는 돈은 없는지를 감시하는 것이다.

자금의 흐름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요직에 기적을 두겠다는 것은 비자금 조성과 같은 나쁜 의도 없이 순수하게 사회 공헌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반신반의했는데 김귀연은 정말 변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런 기적의 생각은 이어지는 김귀연의 말을 통해 확신을 얻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된 것도 자네 때문이야. 그러니 자네에게도 나를 도와줄 책임이 일정 부분 있는 셈이지. 내 말을 늙은이의 아집이라고 생각한다면 도와주지 않아도 좋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자네가 꼭 도와줬으면 좋겠어."

기적은 그 말 앞에서 차마 고개를 저을 수가 없었다.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김귀연의 말 때문이었다.

좋은 일을 하겠다는데 그걸 거부할 정도로 기적은 매몰찬 사람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이사장님의 돈이 엄한 곳으로 세지 않도록 제가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저를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귀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내가 자네에게 고마워야지. 칠십이 넘도록 잘못 살고 있던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해 줬으니 말이야. 자네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을 안고 살아가겠네. 그리고 우리 석한이 잘 부탁하네."

"걱정 마십시오. 석한이는 반드시 다시 걸을 수 있을 겁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요. 분명 그런 날이 올 겁니다."

기적은 확신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김귀연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의미로 잘 부탁하네. 이 센터장, 그리고 이 감사관."

힐링 센터의 센터장, 세원 대학교 교수, 대한 물리치료사 협회 부회장에 이어 미라클 재단의 감사직까지.

낭중지추라 했던가? 원하지 않았지만 기적의 감투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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