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
체력은 국력이다 (5)
모처럼의 휴일 날, 유진은 시골에 계시는 아버지와 전화를 하고 있었다.
"얼마나요? 네? 처, 천만 원요? 제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 있어요…… 지금 동생들 생활비 대기도 바쁜데……."
전화기를 잡은 유진의 손아귀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마음 같아서야 100번이고 안 된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그녀의 마음이 너무 약했다.
"할머니 수술비라고 하니까는…… 최대한 마련해 볼게요. 그런데 진짜 1천만 원은 힘들어요…… 네, 알겠어요. 최대한 마련해 볼게요……."
전화를 끊은 유진은 '휴~'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무거운 마음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전화를 끊기 무섭게 통장 잔고를 확인해 보았다. 휴일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휴식만 할 정도로 힘들게 일하고 있지만 통장 잔고는 처량하기만 했다.
'잔고 1,753,130…….'
유진의 집에서 같이 살고 있는 동생들 때문이었다. 사업 실패 후 알코올 중독에 빠진 아빠를 따르지 않고, 서울에 남은 동생들의 숙식비를 책임지고 있는 그녀였다.
스마트폰을 움직이는데 방문이 열리며 중학교를 다니는 막냇동생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나! 나 용돈 좀 줄 수 있어? 친구랑 좀 놀러 가려고 하는데……."
"뭐? 너 저번에 용돈 받아 갔잖아?"
"아…… 그거는 다 썼지…… 미안해. 2만 원만 주면 안 될까?"
유진은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지갑을 꺼냈다.
"너 이거 아껴 써야 돼! 알았지?"
"어어! 누나 진짜 고마워!"
원하던 돈을 받아 낸 동생은 신이 나서 방을 나섰다.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쉰 유진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녀의 손가락이 움직임에 따라 화면에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생겨났다.
-혹시 돈 좀 빌려줄 수 있어?
원래는 전화를 하는 게 맞겠지만 도저히 목소리를 맞댈 염치가 없어 메시지로 대체한 것이었다.
목소리를 대고 해도 될까 말까인데 메시지가 효과를 발휘할 리 만무했다.
-미안, 나도 요즘 형편이 어려워서…….
-얼마나 필요한데? 50만 원 정도는 해 줄 수 있어.
-유진아 미안. 나 학자금 대출 갚느라 모아 둔 돈이 하나도 없어.
유진은 하루 종일 스마트폰을 붙잡고 있었지만 채 100만 원도 빌리지 못한 채 잠자리에 들고 말았다.
사회에 뛰어든 지 얼마 안 된 유진과 친구들에게 1천만 원은 너무나 큰돈이었다.
* * *
언제나처럼 아침 일찍 출근한 기적은 활기차게 하루를 시작했다. 함께 센터에 도착한 수정과 쉬는 날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제 주짓수 잘했어요? 할 만해요?"
"재미는 있는데 힘들어. 처음이라 그런가 봐. 어머님하고 쇼핑은 잘했고?"
"잘 봤죠. 엄마 옷 좀 사 드렸어요. 저도 신발 하나 샀고요. 아껴 신으려고요."
"효도한 거야, 자기만족 한 거야?"
그런데 그런 두 사람을 아주 부럽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사람이 1명 있었다.
바로 유진이었다. 쉬는 날 내내 돈을 빌리느라 애썼던 그녀는 기적과 수정이 나누는 일상적인 이야기가 마치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자신의 신발을 내려다본 유진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신발 하나 사야 하는데…….'
입사할 때 샀던 신발이 어느새 닳아서 헤져 있었다. 그러나 신발 하나를 사는 것도 걱정될 정도로 그녀는 사정이 좋지 못했다. 신발을 내려다보며 한숨만 내쉴 때였다.
"유진 샘! 유진 샘?"
그제야 누군가가 자신을 부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유진이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기적이 고개를 갸웃하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아, 네! 센터장님, 부르셨어요?"
"저 라떼 한 잔만 부탁해도 돼요?"
"아, 네! 바로 준비해 드릴게요."
황급히 커피 머신을 향해 가려는 유진을 기적이 멈춰 세웠다.
"유진 샘, 무슨 일 있어요? 그러고 보니까 얼굴이 안 좋은데?"
유진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어제 잠을 못 자서 그런가 봐요. 이상하게 잠이 안 오더라고요."
"그래요? 그럼 유진 샘도 커피 한 잔 해요. 제가 오랜만에 커피 쏠게요."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씩씩하게 대답한 유진이 커피 머신을 향해 이동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수정이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 유진 샘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아서. 얼굴도 안 좋고…… 아침부터 한참이나 멍 때리고 있더라고."
"그래요? 이상하네. 항상 활기찬 유진 선생님인데……. 제가 점심시간 때 살짝 물어볼까요? 혹시 센터장님은 부담스러워서 말 못 하는 걸 수도 있잖아요."
"그럴래? 그럼 오랜만에 정 팀장 역할 한번 해 봐요. 정 팀장님."
"정 팀장만 믿으세요, 센터장님."
힘주어 대답한 수정이 이내 할 일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마침내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수정은 유진과 함께 점심을 먹고 오겠다며 센터를 나섰고, 기적은 남은 사람들과 함께 센터에서 식사를 했다.
수정과 유진이 다시 나타난 것은 점심시간이 20분가량 남은 시점이었다.
자신의 베드에 앉아 전공 서적을 보고 있던 기적은 수정이 옆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는 서적을 덮었다.
"점심 맛있게 먹었어?"
"네. 맛있게 먹으면서 이야기 나눴어요."
"그래서 어떻게 좀 성과가 있었어?"
수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조금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네, 있기는 있었어요. 할머니가 좀 아프신가 봐요."
"할머니가?"
"네. 할머니가 수술을 받으셔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걱정에 어제 잠을 못 잤나 봐요."
"아, 그렇구나. 큰 수술은 아니지?"
"거기까지는…… 나도 모르죠. 남의 가정사라 꼬치꼬치 캐묻기가 좀 그렇더라고요."
"하긴…… 그렇겠네. 아무래도 내가 한번 이야기해 봐야겠다. 고생 많았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기적이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데스크 앞에 얼빠진 표정으로 앉아 있는 유진에게 다가갔다.
"유진 선생님, 저 잠깐 옆에 앉아도 되죠?"
"네? 네, 앉으세요."
자리를 잡고 앉은 기적은 편안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요즘 일하는 거는 어때요? 그래도 일손이 늘어서 좀 할 만한가요?"
"네, 네. 선생님이 빨리 적응해서 편해졌어요. 마음도 잘 맞아서 손발도 잘 맞고요."
"그거 다행이네요. 제가 바빠서 이래저래 신경을 못 썼는데 두 선생님이 잘 지낸다니 다행이네요."
그렇게 말한 기적이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저는 유진 선생님을 뽑은 게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이만큼 깔끔하게 일 처리를 해 주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어요."
유진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실수해서 세무조사까지 받았는데요. 그때 생각하면 아직도…… 어휴."
"에이, 실수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리고 세무조사 받았지만 결국 센터는 무탈했죠. 유진 샘이 실수를 안 했으니까 그럴 수 있었겠죠?"
유진은 멋쩍게 웃기만 했고, 기적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할머니가 많이 편찮으시다면서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유진이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기적이 저 멀리 앉아 있는 수정을 가리켰다.
"수정 팀장님한테 들었어요. 사실 오늘 점심 식사 계획된 거였어요. 유진 선생님이 하도 우울해 보여서."
기적은 그쯤에서 목소리를 낮췄다.
"유진 샘, 혹시 돈 필요해요?"
"……!"
유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기적은 그 표정에서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유진 선생님 이력서를 봤잖아요. 그래서 한번 물어본 건데 맞나 보네요?"
유진은 자포자기한 심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회원들로부터 용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사람의 속을 잘 들여다보는 기적의 능력을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죄지은 사람처럼 바닥만 바라보며 유진이 말했다.
"네, 사실은 할머니 수술비랑 병원비 때문에 걱정이에요. 아시다시피 아버지는 경제 능력이 없으시고…… 돈을 버는 사람은 저뿐인데……."
바로 그때 기적이 말했다.
"아니에요. 자세한 이야기는 저한테 할 필요 없고요. 그냥 돈이 얼마나 필요한지 편하게 말씀하세요. 제가 센터 명의로 무이자 대출해 드릴게요."
"센터장님?"
놀라서 되묻는 유진을 보며 기적이 계면쩍은 표정을 지었다.
"뭘 그렇게 놀라요? 제가 그 정도도 못 해 드리나요? 저는 유진 선생님이 우리 센터에서 오래 일해 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드리는 제안이에요. 대출 다 갚기 전까지는 못 그만둘 거 아니에요?"
"아…… 센터장님……."
유진이 완전히 감동받았다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자 기적이 다시 말했다.
"그래서 얼마가 필요해요? 말해 봐요."
유진은 안절부절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말했다.
"그럼…… 한…… 500만 원 정도만 대출해 주실 수 있나요?"
기적이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요? 정말 500이면 돼요? 저는 더 빌려드려도 괜찮은데? 눈치 보지 말고 말해 봐요. 저 눈치 백단인 거 아시잖아요?"
유진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사, 사실 1천만 원이 필요하긴 한데…… 너무 큰돈이라……."
물론 1천만 원은 적은 돈이 아니었다. 하지만 기적에게는 별것 아닌 돈이기도 했다.
모르는 사람에게 기부도 하는데 가까운 곳에서 매일 얼굴을 보고 지내는 유진의 사정을 봐주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면 1천만 원 대출해 드릴게요. 월급 받는 계좌로 넣어 드리면 되죠?"
"네…… 센터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 잊지 않을게요."
기분 탓일까? 그렇게 말하는 유진의 얼굴에서 더 이상의 그림자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밝게 빛나는 싱그러운 미소만이 있을 뿐. 그 미소 앞에서 기적은 따뜻한 미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은혜는요, 무슨. 그냥 드리는 것도 아니고 빌려드리는 건데요. 열심히 일하셔서 다 갚으셔야 해요. 다 갚기 전에는 아무데도 못 갑니다. 대신에 돈은 오늘 바로 넣어 드릴게요."
"네……."
유진은 당장이라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감정을 너무 절제하며 살아온 탓일까? 어쩐지 눈물이 흐르지가 않았다.
"음……."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런 둘을 구해준 것은 오후의 시작을 알리는 회원의 방문이었다.
오후 첫 예약 회원이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내가 너무 일찍 왔나요? 오다 보니 조금 일찍 도착했는데……."
언제 일어나면 좋을까 눈치를 보고 있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을 맞이했다.
"아니에요. 잘 오셨어요."
"이쪽으로 오세요. 바로 치료해 드릴게요."
두 사람은 겹쳐진 목소리에 당황스럽게 서로를 바라보다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야말로 미(美)소였다. 힐링 센터에 훈풍이 불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