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
체력은 국력이다 (3)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선동이가 졌어?"
어느새 모여들어 대련을 지켜보던 회원들이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무리도 아니었다. 자신들과 같이 1년을 수련한 임선동이 오늘 처음 주짓수를 한다는 신규 회원에게 졌으니 말이다.
더구나 임선동은 이 체육관에서만 1년이지 이전에도 주짓수를 수련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러게. 선동이는 1년 동안 뭘 배운 거야? 어떻게 신규 회원 한 명 못 이겨?"
결국 그 불똥은 관장인 박천웅에게로 튀었다. 1년이나 배운 임선동이 초심자에게 졌으니 관장의 지도 능력에 의구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경기를 뛴 것도 아닌데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는 박천웅이 다급히 항변했다.
"선동이가 약한 게 아니라…… 저 신규 회원님이 잘하는 거예요. 아마 저분 처음이 아닐 거예요."
그렇게 말한 박천웅이 기적을 향해 말했다.
"회원님, 솔직히 말해 보세요. 주짓수 처음 아니시죠? 주짓수 처음하시는 분이 어떻게 그렇게 완벽하게 트라이앵글 초크를 겁니까?"
기적은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진짜 처음인데요. 트라이앵글 초크는 TV로 본 게 있어서 그냥 따라해 본 건데……."
"아니, 이분 끝까지 이러시네. 보기만 한 걸로 다 따라하면 그건 천재죠, 천재. 그런 분은 옥타곤에 계셔야지요. 더는 거짓말하시면 안 돼요. 제가 입장이 곤란해집니다."
박천웅이 나무라듯 말했다. 졸지에 거짓말쟁이가 되어 버린 기적의 얼굴에 불쾌감이 떠올랐다.
"아니, 진짜 처음이에요. 말을 좀 이상하게 하시네요?"
한숨을 내쉰 박천웅이 뭐라 말하려 할 때였다. 겨우 호흡을 회복한 임선동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관장님, 저분 처음 하는 거 맞아요. 그거는 직접 겨뤄 본 제가 보증합니다."
물론 박천웅이라고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기적의 움직임은 분명 초보자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걸 인정할 수는 없었다. 마음을 먹은 박천웅이 강하게 쏘아붙였다.
"야! 그게 뭔 소리야? 네가 처음 하는 애한테 졌다고?"
얼마나 당황했는지 박천웅은 기적을 애로 지칭하고 있었다. 임선동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보셨으면 아시잖아요. 제가 진 거는 기술 때문에 진 게 아니라는 거. 이분 힘이 엄청 세요. 약간 힘이 관장님이랑 붙는 느낌이었어요. 못 믿겠으면 저분하고 팔씨름 한번 해 보세요. 해 보면 무슨 말인지 아실 거예요."
"뭐, 팔씨름? 나보고 팔씨름을 하라고?"
박천웅이 무슨 같잖은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 무슨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도 아니고 헤비급인 자신을 보고 호리호리한 기적과 팔씨름을 하라니. 이건 답이 이미 나와 있는 매치였다. 막 고개를 흔들려는데 임선동이 툭 하고 말을 던졌다.
"어쩌면 관장님이 질 수도 있어요. 아닌가? 아무튼 쉽게는 못 이기실 거예요."
'하, 이 새끼가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야?'
그러나 박천웅은 결과적으로 고개를 흔들지 못했다.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회원들 때문이었다.
"팔씨름…… 한번 해 볼래요? 물론 내키지 않으면……."
박천웅은 내키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좋다고 사족을 달려 했다. 그런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적으로부터 대답이 돌아왔다.
"좋습니다."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과 대답에 박천웅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완전히 얕보였다는 생각에 화가 치민 것이다.
반면 상황을 지켜보는 회원들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웃음이 떠올랐다. 그들은 다윗과 골리앗처럼 보이는 두 사람의 대결을 흥미롭게 지켜볼 생각인 듯했다.
물론 사람들의 마음은 약자인 다윗 쪽으로 기울었다. 그동안 본 세월이 있어 대놓고 기적을 응원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옆 사람과 귀엣말을 주고받으며 기적의 선전을 기원했다.
"저 사람이 이기면 재미있겠다. 그치?"
"그니까. 임선동이가 저러는 거 보면 진짜 힘 좀 쓰는 모양인데 이겨 버리면 진짜 재미있을 것 같아."
"그래도 쉽지는 않을 거야. 관장이 매일 봐서 그렇지 한 때는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 결정전까지 갔던 사람이라고."
"그거는 그렇지. 그래도 팔씨름은 덩치로 하는 게 아니야. 물론 덩치가 크면 유리하겠지만 가끔씩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을 이기기도 한다고."
"그건 그렇지만…… 아무튼 지켜보자고."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기적과 박천웅 두 사람은 테이블을 마주보고 자리했다.
"그럼 해 볼까요?"
"그럴까요?"
두 사람이 손을 내밀자 임선동이 심판을 자처했다.
"양손 잡으세요. 제가 시작하겠습니다."
박천웅은 그런 임선동이 조금 얄미웠지만 내색하지 않고 기적의 손을 잡아 나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머릿속에 고전이라는 단어는 전혀 없었다. 오로지 시작과 동시에 상대의 손등을 바닥에 찍어 버리는 장면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기적의 손을 잡는 순간 더욱 확실해졌다.
'어, 이것 봐라? 손힘이 제법이네. 임선동이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겠네. 하지만…… 그래도 나한테는 안 되지.'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고 했던가? 손을 잡는 순간 그는 기적의 악력이 생각 이상으로 세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악력이 세긴 하지만 100kg을 넘어가는 자신을 넘길 정도의 힘은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양손으로 두 사람의 손을 움켜쥔 임선동이 말했다.
"자, 힘! 시~작!"
이와 동시였다. 박천웅은 시작과 동시에 끝을 볼 생각으로 있는 대로 힘을 쏟아부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일까? 자신에 비하면 고사리와도 같은 기적의 팔이 좀처럼 넘어가지 않고 있었다. 박천웅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뭐지, 이거 왜 안 넘어가? 분명 힘은 내가 위인데?'
사실 힘으로만 따지면 100kg이 넘어가는 박천웅이 70kg을 겨우 넘기는 기적에 비해 앞서 있었다.
제아무리 악력이 강하다 해도 체급의 차이는 분명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이 버티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기적이 임상 운동학을 배운 물리치료사라는 점이었다.
임상 운동학이란 말 그대로 임상에서 쓰이는 운동법에 대해서 배우는 학문이다. 이 임상 운동학을 배우다 보면 모멘트팔이라는 핵심 단어를 접하게 된다.
모멘트팔을 설명하기는 매우 어려운데, 그냥 쉽게 말하자면 이렇다.
관절에서의 거리에 따라 적은 힘으로도 많은 힘을 낼 수 있고, 많은 힘으로도 적은 힘을 낼 수 있다는 원리다.
쉽게 이해하려면 시소를 생각하면 된다. 똑같은 무게여도 중앙에서 얼마나 멀리 앉느냐에 따라 무게가 달라지는 시소의 원리 말이다.
기적은 이 같은 모멘트팔의 원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대학을 다닐 당시 물리치료과는 단 한 번도 다른 과에 줄다리기나 팔씨름을 패배한 역사가 없다.
모멘트팔을 사용하면 남자 20명과 여자 20명이 붙어도 여자가 이길 정도이니 그 효과가 정말로 대단한 것이다. 그러니 기적이 박천웅을 상대로도 잘 버틸 수밖에…….
물론 이를 알 리 없는 박천웅은 정말이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얼굴이 터질 정도로 악을 쓰고 있는데도 기적의 손은 조금 넘어간 상태에서 조금도 움직이질 않는 것이다.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그는 약이 바짝 바짝 올랐다.
"어, 뭐야? 저 친구 잘 버티는데?"
"덩치가 아깝네…… 저 덩치로 저 친구를 못 넘기나?"
"그러게. 나 같으면 단번에 넘겨 버릴 것 같은데."
만약 이 같은 목소리만 아니었더라도 박천웅은 기적을 넘기려고 안간힘을 쓰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 때문에 그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오래 끌수록 내가 손해야. 1초라도 빨리 넘겨야 해.'
그 때문에 그는 힘을 비축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대로 힘을 끌어 썼다.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검게 변할 정도였다.
반면 기적의 얼굴은 비교적 평온했다. 힘을 쓰느라 일그러지긴 했지만 그래도 박천웅에 비하면 평온해 보일 정도로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다.
'버티다 보면 기회가 온다.'
사실 그는 아직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었다. 박천웅의 힘이 빠지는 순간만을 기다리며 어깨에 의지해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대치 상태가 이어졌을까? 기적은 박천웅이 상당히 지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어? 어? 넘어간다!"
"그렇지! 그렇지!"
사람들은 신이 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시종일관 열세에 놓여 있던 기적의 팔이 다시 정중앙 고지를 수복했기 때문이었다.
"끄응……."
박천웅은 어떻게든 버텨 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기적의 팔은 멈춤이 없었다.
상당히 느리긴 했지만 그의 팔은 분명 조금씩 반대 방향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앞을 향해 전진하는 시계처럼.
1시, 2시.
기적의 손이 승리를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3시에 다다르는 순간.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손등이 바닥에 닿았다. 물론 바닥에 닿은 손의 주인공은 박천웅이었다.
무려 100kg의 거구인 박천웅이 70kg에 불과한 기적에게 패배하는 순간이었다.
"……!"
장내는 완전히 침묵에 휩싸였다. 어느 누구 하나 입을 열어 소리를 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지금의 장면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의외로 잘 버티는 기적을 보며 설마 하는 마음을 가지긴 했지만 진짜로 기적이 이겨 버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그들이었다.
긴 침묵을 깬 것은 기적이었다. 땀이 잔뜩 나온 박천웅의 손에서 손을 빼내며 그가 말했다.
"힘 엄청 세시네요. 간신히 이겼습니다."
원래는 박천웅이 했어야 할 말을 기적이 하고 있었다.
그 말 앞에서 박천웅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임선동이 그것 보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거봐요. 엄청 세다니까. 기술이 부족해서 진 게 아니고 힘이 너무 세서 진 거예요."
그렇게 말한 임선동이 기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한층 높아진 톤으로 말을 이었다.
"와, 형! 힘이 왜 이렇게 세요? 센 건 알았지만 진짜로 관장님 이겨 버릴 줄은 몰랐네요. 체급 차이가 얼마인데……."
박천웅을 두 번 죽인 임선동을 보며 기적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에요. 힘은 관장님이 더 셉니다. 제가 이긴 거는 모멘트팔 덕분입니다."
"모멘트팔? 그게 뭐예요?"
"그러니까 모멘트팔을 이용하면 적은 힘으로도 더 강한 힘을 낼 수 있는 거죠. 이 팔꿈치 관절을 중심으로 어깨 관절과 손목 관절을 최대한 가깝게 해서 더 강한 힘을 낼 수 있게 하는 거예요."
기적이 팔에 가상의 선을 그리며 설명하자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기적에게로 다가왔다.
"뭐 하시는 분인데 그렇게 잘 알아요?"
"아, 물리치료사? 아! 그래서 이렇게 잘 아는구나. 강남에서 센터요? 아~!"
"팔씨름 잘하는 법 나도 좀 알려 줘요. 어떻게 한다고요?"
"나도! 나도 한번 알려 줘요. 나도 팔씨름 잘하고 싶어요. 알려 주면 센터 회원 등록할게요."
어느새 기적의 옆에는 팔씨름 잘하는 법을 배우려는 수강생들로 넘쳐났다.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던 10여 명의 회원들이 모조리 기적에게로 몰려든 것이다.
물론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팔씨름에 패배해 체면을 구긴 박천웅이었다.
죽상을 한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몰랐다. 이 패배가 몰고 올 엄청난 후폭풍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