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
그들의 오랜 숙원 (2)
"어서 와아요. 저번 주에 못 봤으니 우리 보르음 만이네요. 그러쵸?"
오주영의 말에 기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보름만입니다. 잘 지내셨죠?"
"잘 지냈고 말고오. 우리 선생님은 어떠케에 지내셨어요?"
"저는 요즘 엄청 바쁩니다. 분에 넘치게 일을 자꾸 떠맡게 되어 버려서."
"선생님처럼 능력 있는 분이 바쁜 것은 너무나아 당연한 일이죠. 그래도 건강 생각 좀 해야겠어요? 남 건강 챙겨 주느라고 본인 건강 해치면 안 되잖아요?"
기적은 흐뭇하게 웃었다.
"그래서 센터 휴무일을 매주 수요일에서 매주 수, 일로 바꿀 생각입니다. 연차도 15장씩 지급하고요."
"아아? 잘했네요, 잘했어."
두 사람은 가볍게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치료를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일순 오주영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무슨 일을 떠마탔길래 그렇게에 바빠요?"
"아, 그게 대한물리치료협회 부회장 자리를 떠맡게 되어서요."
"어머, 부회장요? 부회장이면 엄청 높은 거잖아. 회장 바로 다음 아니에요? 넘버 투?"
기적은 멋쩍게 웃었다.
"그렇긴 한데…… 삼화 그룹처럼 대기업을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렇게 큰 그룹이 아니에요."
"알죠, 알죠. 그런데 물리치료협회에 부회장이면 무슨 일을 하는 거예요?"
"음…… 그냥 교육도 하고 이런저런 홍보도 하고 하면서 물리치료사들의 권익을 위해서 힘쓰는 일? 저도 아직 얼마 안 되서 잘 모릅니다. 사실 부회장 직함만 받았고 아직 협회에 한 번도 방문을 못 했습니다."
기적이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일순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회장? 우리 실장님 무슨 직함을 받았다고요?"
갑작스러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김운찬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다가 기적의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어? 총장님? 아…… 예. 대한물리치료협회 부회장직을 맡게 됐습니다."
김운찬은 짓궂게 웃었다.
"오호, 나이 서른에 교수도 모자라서 부회장 직함까지? 도대체 어디까지 가려고 이러는 거지? 젊은 나이에 너무 과속하는 거 아닌가? 과속 딱지 하나 끊어 줘야겠는데?"
기적이 '나 참…….' 하고 헛웃음을 흘리자 오주영이 눈꼬리를 추켜올렸다.
"김 총장님? 치료 방해하지 말고 왔으면 조용히 앉아서 기다리세요. 알겠어요?"
"예이, 예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김운찬이 입을 다물고 의자에 착석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근질근질한 입을 참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이 교수님, 부회장직 맡았으면 나한테 먼저 말을 했어야지. 부회장직이면 이런저런 대외 활동도 많을 텐데. 그거 내가 도와줄 수 있는데 말이야."
기적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제가 맡은 일이 조금 어려운 일이라서요. 아마 총장님이 나서신다 해도 쉽지 않을 겁니다."
"뭐요?"
쉽지 않을 거라는 기적의 말이 자존심이 건드렸을까? 도끼눈을 뜬 김운찬이 말했다.
"내가 나서도 안 된다? 하…… 이렇게 대놓고 무시당해서야 원. 나는 내가 나서면 될 것 같은데? 뭔지나 말해 봐요."
"아…… 물론 총장님이 나서면 해결하실 수도 있겠죠. 그런데 총장님이 맡을 일도 아니고, 또 이게 금 나와라 뚝딱 하고 도깨비 방망이 휘두르는 것처럼 쉽지 않은 일이라서요."
김운찬의 미간 주름이 한층 깊어졌다.
"아니, 말이나 해 보라니까요? 내가 할 수 있는지 없는지?"
기적은 난감한 표정으로 망설이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 물리치료사 단독 개원 문제가 지금 가장 1순위 현안입니다."
"물리치료사 단독 개원?"
물리치료사 단독 개원을 잘 모르는 김운찬은 설명을 요구했다.
"물리치료사 단독 개원? 물리치료사가 단독으로 병원을 연다는 건가? 의사들처럼?"
"예."
기적이 고개를 끄덕이자 김운찬의 얼굴이 난감하게 변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오주영이 웃음을 터뜨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호호호, 김 총장! 표정이 왜 그래? 큰소리치더니 자신 없나 봐?"
발끈한 김운찬이 목소리를 높였다.
"누가 자신이 없대요? 자신 있어. 그거 별거 아니라고. 그거 뭔지 몰라도 나한테 맡겨요. 내가 해결해 줄게. 나 김운찬이야, 김운찬."
예상치 못했던 진행에 기적이 난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아닙니다, 총장님. 이건 저와 물리치료사들이 해야 할 일인데요.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그러나 김운찬은 단호했다.
"아니, 아니. 나도 물리치료학과를 보유한 대학의 총장이잖아. 그러니까 완전히 상관없는 사람은 아니지. 물리치료사 단독 개원이 되면 우리 대학도 값어치가 올라가는 거잖아요. 그리고 내가 교수님한테 받은 은혜가 많은데 그 정도는 해 드릴 수 있지. 안 그래요?"
기적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오주영이 나섰다.
"그래요. 내가 이 선생님 덕분에 이렇게 좋아졌는데 우리 아들이 그 정도는 해 드릴 수 있지요. 그러라고 하세요."
기적은 도무지 부탁할 면목이 없어 그냥 치료를 이어 나갔다.
"이제 일어나서 걸어 보실게요. 일단 여기 잡으시고."
그러나 김운찬은 막무가내였다.
"관련 서류 나한테 보내 줘요. 그거 참고해서 내가 힘써 볼 테니까. 알았죠?"
요원하기만 했던 물리치료사 단독 개원이 뜻밖의 순풍을 타기 시작했다.
* * *
그날 치료를 마친 기적은 집으로 돌아가기 무섭게 물리치료사 단독 개원에 관한 개요를 김운찬에게 보내 주었다.
파일을 언제 보낼 거냐는 김운찬의 독촉 문자가 두 개나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컴퓨터를 켠 기적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물리치료사 단독 개원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물리치료사 단독 개원에 관한 건. 이 안건은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치료는 물리치료사에게 맡기자는 취지이다. 실제로 해외에서는 물리치료사들이 하나의 과로 인정받고 있으며 단독 개원을 시행하고 있다. 물론 실력이 부족한 물리치료사들이 단독 개원을 할 경우 국민의 건강에 심각한 우려를 초래할 것이라는 일부 의사들의 의견에 적극 동의한다. 하나 이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달면 모두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 의사 국가고시와 비슷한 난이도의 시험을 실시한다. 둘, 물리치료사 면허증을 취득한 후 임상에서 3년 이상의 경험을 쌓은 이들에게만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다……."
기적은 타자를 치고 또 그걸 소리 내어 읽으며 문제가 없을 때까지 몇 번이고 그 내용을 수정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기적은 김운찬에게 보낼 문서를 완성해 낼 수 있었다.
파일을 첨부하고 전송 버튼을 누른 기적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걸로 끝인가? 물리치료사 단독 개원이 정말 되려나?'
물론 김운찬이 나선다고 해서 이 일이 무조건 성사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의사들의 힘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니까. 당장 의사들이 절대 안 된다고 국민의 건강을 볼모로 파업을 하기라도 한다면 모든 원망은 물리치료사들이 떠안게 될 터였다.
하지만 김운찬이 누구인가? 대한민국 굴지의 대기업 삼화 그룹의 삼남이다.
그 이름의 무게를 고려한다면 무조건 실패한다고 보기도 어려운 것이다.
'반반이라고 봐야겠지, 이거는.'
잠시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곧 김운찬으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읽어 봤는데 나쁘지 않은데요? 너네만큼 어려운 시험 보겠다는데 의사들도 반대할 명분이 없을 것 같고. 내가 예전 기사들을 찾아봤는데 의사 협회에서 파업을 거론한 적이 있더라고요? 하지만 그때랑 지금은 다르지. 너네처럼 시험도 보겠다는데 만약에 국민들 볼모로 파업하면 그 친구들도 역풍을 맞을 수 있을 것 같고…… 아니, 역풍을 맞게 만들어야지. 언론 끌어들여서 언론 플레이 좀 하면 그 친구들도 마냥 강행할 수는 없을 거야. 내가 잘 아는 국회의원이 있는데, 한번 손써 볼 테니까 기다려 봐요.
김운찬은 정치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역시 삼화 그룹의 사람이라는 것일까? 그는 물리치료사 단독 개원에 관한 이해관계를 한눈에 파악하고 있었다.
기적은 감사한 마음을 담아 김운찬에게 답장을 보냈다. 전송을 한 후 시간을 확인하니 어느덧 11시 45분.
시침과 분침 모두 꼭대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급격히 밀려드는 피로감을 느끼며 기적은 잠자리로 이동했다. 길었던 하루가 끝나가고 있었다.
* * *
다음 날, 힐링 센터 직원은 평소보다 30분 이른 시간에 출근했다.
중요한 전달 사항이 있으니 30분 일찍 출근해 달라는 기적의 요청이 있었던 탓이다.
"무슨 전달 사항이 있길래 30분이나 일찍 모이라는 걸까요? 중대 발표라니 좀 걱정되네요."
"그러게요. 부디 좋은 일이었으면 좋겠는데."
전에 없던 30분 일찍 출근이기 때문일까? 평소보다 30분 일찍 모인 사람들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전달 사항을 기다렸다.
사람들의 초조한 마음을 느낀 것일까? 이윽고 환복을 마친 기적이 사람들 앞에 섰다.
"다들 피곤해 보이네요. 요즘 너무 피곤하죠?"
모인 이들이 입에 발린 말을 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그러자 기적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정말요? 그럼 주 2회 휴무 안 해도 될까요?"
주 2회 휴무라는 말에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무슨 일로 모이라고 했을까 걱정했는데 주 2회 휴무였다니 비로소 안심이 된 것이다. 진욱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센터장님이 안 하시면 안 하시는 거죠. 저희는 그저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여기저기서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러자 기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재미없네. 뭐…… 인력 충원도 되었고 해서…… 다음 달부터 주 2회 휴무를 하려고 합니다. 요일은 수요일, 일요일로 하려고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유진이 말했다.
"수요일, 일요일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회원님들 오는 추이를 보면 일요일보다는 토요일에 많이 오시거든요. 둘 중에 하나라면 일요일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유진의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하루만 쉬던 상황에서 이틀을 쉰다고 하는데 요일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바로 그때 수정이 말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에요. 앞으로는 연차도 15장 지급한다고 하시네요. 대신에 회원님들 예약은 각 선생님들이 알아서 조정하는 걸로요."
주 2회 휴무에 연차까지. 밀려드는 당근에 사람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 정말요?"
"진짜 연차 생겨요?"
환호성이 줄어들기를 기다린 기적이 말을 이었다.
"물론 쉬는 만큼 버는 돈은 줄어들 거예요. 주에 2번 쉬는 만큼 기본급이 줄어든다는 말입니다. 대신 하루치만큼 줄이는 것은 아니고 반만큼만 줄이기로 결정했습니다. 이거는 선생님들이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일하는 시간이 줄어드는 만큼 버는 돈도 줄어든다. 당연한 조치였기에 직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저희도 감수해야죠. 센터장님도 땅 파서 돈 버시는 거 아닌데요. 흐흐, 저는 대찬성입니다."
"네, 좋습니다. 저도 찬성입니다."
반대는 없었다. 하루치를 줄인다고 해도 찬성할 입장인데 반만 줄인다고 하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기분이 좋아서일까? 사람들은 어느 때보다 힘차게 일과를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시계가 점심시간을 향해 갈 무렵 한 손님이 기적을 찾아왔다.
힐링 센터에는 처음 찾아오지만 기적은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