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물리치료사-185화 (185/205)

# 185

그들의 오랜 숙원 (1)

-교수님, 혹시 물리치료사 협회로 들어오실 생각 없으신가요?

기적은 안치성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저요? 저 예전에 이미 가입해서 정회원으로 등록되어 있을 텐데요?"

그러자 안치성이 후후 웃으며 말했다.

-아니요, 교수님. 협회에 가입하시라는 게 아니고 임원으로 들어오실 생각 없으시냐고 여쭙는 겁니다.

"예? 임원요? 무슨 임원요?"

-그러니까…… 정확히는 부회장직입니다. 이번에 새로 부회장 선출을 하는데 교수님이 물망에 올랐거든요. 해서 의사를 여쭙는 겁니다.

기적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아니…… 좀 갑작스럽네요, 왜 그런 자리에 저를? 그러기에 저는 너무 어리지 않을까요?"

-서른살 먹은 국회의원도 있는데, 물리치료사협회에 서른살 부회장 나오지 말라는 법 있나요? 협회에 젊은 피 수혈이 필요하다는 것이 임원들의 공통된 생각입니다. 그리고 젊은 피 중에 교수님만 한 인재가 없다는 것 또한 저희 임원들의 공통된 생각이고요. 사실 제가 적극 추천하기도 했습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안치성은 기적의 됨됨이와 치료 실력에 완전히 반한 상태였다.

더구나 그는 고인 물이라 할 수 있는 협회에 새로운 인물이 어떠한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지를 이번에 제대로 체감한 바 있었다.

"아…… 글쎄요.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셔도……."

기적이 고민한다고 생각했을까? 안치성은 적극적으로 설득에 나섰다.

-교수님, 바쁘신 줄 압니다만…… 그래도 수많은 대한민국 물리치료사들을 생각해서 받아들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때처럼 신선한 아이디어도 내 주시고 정기적으로 교육도 많이 개최해 주시고 하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그의 작전은 기적의 인정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지난번의 만남을 통해 기적이 거절을 잘 하지 못하는 성격이라는 것을 눈치챈 안치성이었다.

기적의 난처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제가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래저래 많이 바빠서 제가 협회 활동을 할 시간이 있을지도 모르겠고요."

-지금 계시는 분들도 다들 각자 일이 있으신 분들이에요. 교수님처럼 학교에 계시는 분도 계시고, 병원에 계시는 분들도 많고요. 그러니까 제 말은 바쁘시면 꼭 참여 안 하셔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 요즘에는 온라인으로도 대부분의 업무가 가능하지 않습니까? 일 처리는 온라인으로 해 주시고 가끔씩 시간 내셔서 교육만 해 주셔도 정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기다리지는 마시고 그냥 거절한다 생각하고 진행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기적은 여전히 회의적인 입장으로 보였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도 바쁜데 굳이 또 하나의 감투를 쓸 필요는 없으니까. 그러자 안치성이 비장의 한 수를 던졌다.

-물리치료사 단독 개원. 우리 물리치료사들의 오랜 숙원 아닙니까? 저는 교수님께서 저희와 같은 바람을 가지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네? 아…… 예. 물리치료사 중에 그걸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때다 싶었는지 안치성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렇지요? 그렇다면 꼭 협회에 들어오셔야 합니다. 대한물리치료사 협회가 아니면 어디에서 물리치료사 단독 개원을 이뤄 내겠습니까? 오직 대한물리치료협회만이 그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물리치료사 단독 개원.

기적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 한구석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결국 그는 오래지 않아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모쪼록 긍정적인 대답을 기다리겠습니다.

통화는 그것으로 종료되었다. 그러나 안치성은 거기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힐링 센터의 저녁 시간에 맞추어 힐링 센터를 방문한 것이다. 막 저녁을 먹으러 나가려던 기적은 센터를 찾아온 안치성 덕분에 동작을 멈춰야만 했다.

"아니, 어떻게 오셨습니까?"

기적의 말에 안치성이 멋쩍게 웃었다.

"지금 저녁 시간 맞죠? 교수님하고 식사나 하면서 이야기나 나눌까 싶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아…… 그러시구나……."

안치성은 또 한 번 멋쩍은 미소를 흘렸다.

"제가 좀 마음이 급해서…… 불편하시면 다음에 찾아오겠습니다."

"아닙니다, 이렇게 오셨는데 같이 식사하시죠."

기적은 수정을 비롯한 직원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안치성과 함께 식당을 찾았다.

장소는 조용히 식사를 할 수 있는 분식집이었다. 안치성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조금 더 좋은 곳으로 가도 되는데……."

"여기 좋아요. 음식도 맛있고, 이렇게 칸막이도 되어 있어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딱 입니다. 혹시 분식 싫어하세요?"

"아, 아닙니다. 저 김밥이랑 떡볶이 좋아합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매일같이 김밥헤븐 같은 데 와서 혼자 김밥 시켜 먹고 그랬는데…… 요즘에는 통 오질 못했네요."

혼자라는 말에 기적이 반응했다.

"혼자요, 왜요?"

안치성은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말을 이었다.

"사실 제가 물리치료사가 된 게 조금 늦어요. 20대 초반에는 제약 회사에서 일했었거든요. 그때 병원 돌아다니면서 혼자 밥 먹고 그랬죠."

"아, 정말요? 그럼 왜 물리치료사가 되신 거예요?"

안치성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고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제약 회사 직원으로 이 병원, 저 병원 다녀봤는데……. 어느 병원이든 물리치료사 선생님들이 정말 편해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고민 끝에 물리치료학과에 입학했습니다."

"하하하, 편해 보여서 물리치료사가 되시려고 한 거예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막상 공부를 시작해 보니까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학교에서도, 임상에 나와서도. 생각해 보세요. 약 팔면서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며 간이고 쓸개고 다 팔던 사람이…… 이제는 선생님 소리 들으면서 일한다고. 기분이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잘해 주고 싶어서 열심히 하다 보니까 어느새 대한물리치료협회 이사가 되어 있더라고요."

말을 하다 보니까 마음이 동한 것일까? 안치성이 뭔가를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한때는 이사를 넘어 부회장, 회장까지 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나온 학교가 지방 대학입니다. 출신? 때문에 더 이상 올라가기란 요원한 일이죠. 한계를 느끼고 있을 때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안치성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눈치를 보고 있던 기적이 '저기…….' 하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저희가 아직 주문을 안 해서…… 시키고 이야기할까요?"

"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죄송합니다. 시키고 이야기하죠."

두 사람은 음식을 주문하고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교수님을 만난 이야기까지 했었죠? 아무튼 간에 교수님을 만나고서 딱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 사람이다. 이 사람이면 우리 협회의 오랜 숙원인 물리치료사 단독 개원을 이뤄줄 수 있겠다. 뭐 이런 생각? 이거 한번 봐 보세요."

그렇게 말한 안치성은 가방에서 파일 하나를 꺼내 기적에게 넘겼다.

기적이 뭔가 싶어 파일을 열자 안에는 그동안 협회가 물리치료사 단독 개원을 위해 애썼던 일들이 타임 라인처럼 기록되어 있었다.

"저희가 단독 개원을 위해 힘쓴 지도 벌써 15년입니다. 정말 많은 일을 했고, 정말 되겠구나 싶었던 적도 있었죠. 거기 가운데 부분 보면 보이시죠? 이대박 대통령 후부와 정동진 대통령 후보가 붙었던 때 말입니다. 저희 협회는 정동진 후보에게 줄을 댔습니다. 당선되면 물리치료사 단독 개원을 위해 힘써 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상태였죠. 하지만 참패했고 결과적으로 단독 개원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죠."

안치성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마지막 부분에 보면 아시겠지만…… 그 다음 정권이 들어섰을 때도 물리치료사 단독 개원이 물망에 올랐을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실패했죠. 의사 협회의 반대 때문입니다. 의사들은 우리의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국민의 건강을 맡길 수 없다고 말합니다. 각자의 전문 분야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요.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자신들은 물리치료를 할 수 있고, 또 이제는 한의사들까지 물리치료를 할 수 있게끔 법이 개정된 상태입니다. 물론 그들이 직접 물리치료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대부분의 한의원에서 간호조무사에게 물리치료를 맡기는 일이 성행하고 있지요. 한의원이야 어차피 청구가 안 되니 아무에게나 맡겨도 상관없다 이겁니다. 이제는 우리도 생존이 걸린 문제입니다. 더 이상 물러날 수만은 없다는 말이지요."

안치성의 열변 앞에서 기적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의문은 남았다.

"무슨 말씀인지 충분히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무슨 수로 그 일을 해내겠습니까? 그토록 오래 노력했음에도 실패했던 일인데요."

"물리치료사 알바비 인상 문제가 벌써 10년 전부터 나온 이야기라면 믿으시겠습니까?"

"예? 그 문제가 벌써 10년 전부터 나온 이야기라고요?"

"예, 그렇습니다. 벌써 10년 전에 나온 문제를 아무도 해결하지 못했던 거죠. 그런데 교수님이 이번에 한 방에 해결해 버리지 않았습니까?"

잠시의 시간 차를 두고 안치성이 말을 이었다.

"물론 교수님이 무조건적으로 숙원을 해결해 주실 거라 기대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같이하다 보면 우리가 조금 더 옳은 길로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부탁드리는 겁니다. 지금 협회는 너무 고여 있습니다. 똑같은 인물이 돌아가며 임원직을 맡고 있고, 어떤 문제를 해결할 의지 같은 것은 1도 없습니다. 단독 개원 문제로 발버둥 친 게 벌써 6년이 넘게 흘렀습니다. 높은 벽을 실감한 덕분인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있지요. 어렵겠지만 하려고 하는 것과 아예 하지 않는 것은 다르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교수님?"

"예, 뭐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기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고민을 하는 것이었다. 이 일을 떠맡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두고.

그것을 알고 있는 안치성은 말없이 식사를 하며 기다려 주었다. 어려운 결정을 하는 기적에게 온전한 시간을 부여하기 위함이었다.

기적이 다시 입을 연 것은 안치성이 김밥 두 개를 배 속으로 감췄을 때였다.

"그런데 그 부회장직은 제가 하겠다고 하면 하는 겁니까?"

마침 두 개째 김밥을 넘긴 안치성이 곧바로 대답했다.

"이미 허가가 난 상태입니다. 부회장이라는 직함을 너무 겁내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매번 같은 인물들이 돌아가면서 하는 직위인데, 교수님이 한 번 들어오신 것뿐입니다.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이 되시고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인서울 물리치료과 교수로서 정교수 자리에 계신 분은 정말 극소수입니다."

기적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까짓것 제가 한번 해 보겠습니다. 같은 물리치료사로서 이사님의 말을 들으니 가슴이 요동쳐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네요."

그러자 안치성이 앉은 자세로 만세를 불렀다.

"오오! 역시 교수님 시원시원하시네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교수님…… 아니, 부회장님!"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이것저것 많이 알려 주세요."

"허허허, 여부가 있겠습니까? 잠깐만…… 내가 이럴 게 아니지…… 빨리 못을 박아야지."

그렇게 한참을 웃은 안치성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지금 당장 부회장직에 이기적이라는 이름을 올리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기적의 직함이 하나 더 늘어나는 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