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물리치료사-180화 (180/205)

# 180

확장과 기회 (1)

흐르는 세월은 쏜살과도 같다고 했던가? 혹한으로 잔뜩 움츠렸던 시기가 엊그제 같은데 금세 꽃 피는 봄이 찾아왔다.

봄 향기가 솔솔 풍겨 왔고, 전국이 물감을 바른 듯 푸르게 물들었다.

모든 것이 푸르고 새로이 시작되는 봄.

새로이 면허증을 취득한 이들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일까? 인력난을 겪고 있던 힐링 센터에 이력서가 밀려들고 있었다. 기적은 행복한 비명을 내질렀다.

"와! 어제 하루 사이에 이력서가 다섯 장이나 들어왔네요! 이번 주에만 벌써 스무 장이네."

수정이 모니터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진짜 많이 들어왔어요. 이게 바로 세원대학교 정교수의 파워라는 건가요?"

"에?"

기적은 그건 또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고, 수정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아니, 왜요? 시기가 딱 겹치잖아요. 세원대학교 정교수 커리어 추가하자마자 이력서가 몰려들고 있잖아요."

"뭐, 그건 그렇지만……."

"다 알면서 내숭 좀 그만 떠세요. 그보다……."

잠시 말끝을 흐린 수정이 넌지시 말을 이었다.

"인력도 충원되고 하면은 센터 확장하는 거 어떠세요?"

"센터 확장? 갑자기 무슨 확장?"

"갑자기라뇨? 지금 회원들의 예약 문의가 줄을 잇고 있고, 이제 베드도 몇 개 안 남았잖아요. 실장님한테는 회원들이 말 안 하세요? 저희한테는 예약하기가 너무 힘들어서 좀 그렇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하시는데?"

"그래요? 회원님들이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저는 한 번도 못 들어 봤는데?"

"실장님한테는 밉보일까 말 못 하나 보네요. 저희한테는 귀가 부르트도록 이야기하세요. 예약 잡기가 너무 힘들다고."

"그건 몰랐네."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기적이 몇 번이나 '확장이라…… 확장이라…….'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이내 결심을 내린 듯 손뼉을 탁 쳤다.

"좋아요. 확장 까짓 거 한번 해 보지, 뭐. 회원님들이 원한다는데 당연히 해 드려야지. 그런데 어떻게 한다? 아직 이 건물 계약 기간도 남았고, 인테리어 생각하면 마냥 옮길 수도 없는 일인데……."

아직 행정국장 최병렬과의 2년 계약이 1년 이상 남아 있는 상황이다.

더구나 인테리어 등을 고려하면 무턱대고 큰 곳을 찾아 이사를 갈 수는 없는 상황. 기적은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수정은 걱정할 것 없다는 입장이었다. 옆 벽을 가리키며 그녀가 말했다.

"뭘 걱정하세요? 요 옆에 건물 비었잖아요. 거기 계약하셔서 인테리어하시면 되죠. 인테리어 마치고 벽을 허무는 방향으로 하면 영업에도 별로 지장이 없을 거구요."

기적이 몰랐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옆 건물이 비었어요? 언제부터?"

"한 일주일 됐는데요? 임대 문의 붙은 거 못 보셨어요? 그리고 요즘 이 근처에 빈 건물 투성이에요. 임대료는 비싸지 손님은 없지……. 지난겨울에 완전히 반 토막 났다니까요?"

한파와 함께 불어닥친 경제 한파는 소상공업자들에게 심각한 대미지를 남긴 상태였다. 항상 훈풍과 함께 한 기적은 잘 몰랐지만 말이다.

"그래요? 아…… 요즘 경제난이 진짜 심각한가 보네. 참 이상하지 않나요? 세상은 점점 좋아지는데 살기는 점점 힘들어진다는 것이."

세상이 좋아지면 삶의 질도 올라가야 하는 것이 당연한 순리다.

하지만 그래프는 이상하게도 반비례를 그리고 있었다.

수정도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렇죠. 그래서 매일 생각해요.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힘드니까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힘드니까 더욱 열심히 해야 한다.

이와 같은 수정의 말 앞에서 기적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의문은 남았다.

"그런데 수정 샘 같은 사람도 그런 생각을 하네요? 수정 샘은 그런 걱정 안 하는 줄 알았는데."

기적이 말한 수정 샘 같은 사람이란 좋은 부모를 둔 소위 금수저를 일컫는 것이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수정은 오래지 않아 그 말을 해석해냈다.

"에이, 저희 집 그렇게 잘사는 거 아니에요. 저희 아빠 그래 봤자 월급쟁이인데요, 뭘. 그리고 아빠 엄마 돈이 제 돈인가요? 아빠 엄마는 아빠 엄마만의 삶이 있고, 저는 저만의 삶이 있는 거죠. 부모님 덕 볼 생각 눈곱만큼도 없어요."

"건강하네, 건강해. 생각이 아주 건강해."

머쓱한 듯 웃던 수정이 곧 무언가를 느꼈는지 따지듯 물었다.

"그러고 보니 실장님, 요즘 왜 저한테 자꾸 반말하세요? 절반 이상은 반말이네요?"

기적이 모르는 척 다른 곳을 보며 대답했다.

"몰라? 자꾸 말이 짧게 나오네?"

"하, 그럼 나도 반말해도 돼요?"

"그게 편하면 그렇게 하시던가?"

"알았어."

일단 질러 놓은 수정이 슬쩍 기적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기적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조금 더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야! 이기적!"

아무래도 손해 보는 장사라는 생각이 든 것일까? 그제야 기적이 반응을 보였다.

"이름을 부르는 건 좀…… 선은 지켜야지."

수정은 재빨리 넘어갔던 선 안으로 복귀했다. 반말도 존댓말도 아닌 말이 그녀로부터 흘러나왔다.

"인정! 그럼 이름은 안 부르는 걸로 할게요."

그렇게 합의를 마친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정

오를 맞이해 높이 떠오른 태양이 따스하게 두 사람을 비춰 주고 있었다.

* * *

확장을 결심한 기적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추가 인력 확충이었다.

이력서를 넣은 20명의 물리치료사와 5명의 데스크 직원들을 대상으로 옥석 고르기에 나선 것이다.

꽤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기에 옥석을 가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기적은 확고한 자신만의 가이드라인을 가지고 있었고, 덕분에 훌륭한 인재 3명을 새로이 충원할 수 있었다.

"선생님들 인사하세요. 오늘부터 출근하시는 성진수 선생님, 그리고 안수경 선생님."

다만 제아무리 훌륭한 인재들이라고 해도 곧바로 실전에 투입시킬 수는 없었다.

3명의 직원 중 치료사로 뽑은 2명 모두가 센터에서 일하는 것은 처음이기 때문에 센터에서 적응할 수 있게끔 교육을 시킬 필요가 있었다.

"두 분 다 센터에서 일하시는 것이 처음이니까요. 당연히 저도 신경을 쓰겠지만 수정 팀장님하고 진욱 선생님이 많이들 알려 주셔야 할 겁니다."

기적은 새로운 직원들을 기존 직원들에게 소개시키기 무섭게 즉각 교육에 돌입했다.

"선생님들, 여기는 병원이 아니라 센터입니다. 치료라는 말 대신, 케어, 환자라는 말대신 회원이라는 말을 사용해 주셔야 합니다. 저도 입에 인이 박혀서 가끔 치료라는 말을 쓸 때가 있는데…… 그래도 최대한 신경을 써 주셔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치료라는 말과 환자라는 말을 쓸 경우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기적은 이 부분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최대한 노력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성진수와 안수경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신경 써서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주의하겠습니다."

기적이 고개를 끄덕인 뒤 말을 이었다.

"성 선생님은 성인 신경계를 담당하겠다고 하셨으니까 저를 따라다니시면서 보시면 되고요. 안 선생님은 소아를 담당하고 싶다고 하셨으니까 수정 팀장님 따라다니시면서 보시면 됩니다."

고르고 골라 뽑은 만큼 두 사람은 센터 생활에 잘 적응했다. 스스로 생각하며 움직였고, 의욕적으로 배우려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 자연히 기적의 얼굴에도 미소가 맺혔다.

"내가 사람을 진짜 잘 뽑은 것 같은데, 어때요?"

"맞아요. 두 사람이 적응만 하면 일이 한결 편해질 것 같아요. 저희도 연차 같은 것 좀 만들어야죠. 언제까지고 수요일만 쉴 수는 없잖아요."

"음, 복지 부분도 신경 써야겠죠. 그 부분도 곧 생각을 해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직원들의 얼굴 역시 한결 밝아졌다. 아직 짐을 나눠 들지는 않았지만 벌써부터 어깨가 한결 가볍게 느껴지고 있었다. 힐링 센터의 분위기는 더 할 나위 없이 좋았다.

* * *

"또 줄었어?"

"예, 그렇습니다."

"센터장님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뻔뻔하네…… 그렇게 지원을 받아 놓고서 매출이 줄었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옵니까, 예?"

사실상 노블레스 센터의 총 책임자라 할 수 있는 태정 그룹 기획 팀장 오민석은 보고서를 살피며 눈살을 찌푸렸다.

노블레스 센터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정말 많은 돈을 쏟아부었다.

고가의 기계들은 물론, 회원들을 끌어모이기 위한 이벤트를 수시로 하기 위함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확신했다. 감히 자신의 제안을 뿌리친 힐링 센터를 완전히 주저앉힐 수 있을 것이라고.

처음에는 좋았다. 자신의 계획대로 노블레스 센터가 승승장구하며 회원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으니까. 경쟁 업체인 힐링 센터가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힐링 센터가 주춤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잘나가던 노블레스 센터가 주춤거렸다. 오픈 기념 이벤트가 끝나기 무섭게 방문 수가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오민석은 부랴부랴 새로운 이벤트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매월 보고서를 받을 때마다 그는 반 토막 난 매출과 마주해야 했다.

사실 그는 이런 식으로 수많은 소상공인들을 사냥해 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단 한 번도 실패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소자본은 대자본을 이길 수 없다는 그만의 절대 논리가 생긴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무패 신화가 종지부를 찍으려 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이렇게 화를 낼 수밖에…….

오민석의 분노와 마주한 센터장이 땀을 뻘뻘 흘리며 변명했다.

"면목 없습니다. 힐링 센터 회원들의 신뢰가 워낙 탄탄합니다. 특히 거기 센터장인 이기적 센터장이 최근 보건복지부 장관 표창장과 세원대학교 교수직을 연달아 받으면서 사람들이 더욱 몰려드는 모양입니다."

물론 그 변명은 별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업계 최고라면서요? 자신이 있다면서요? 그게 불과 몇 달 전에 일 아닙니까?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혹시 그때와 다른 사람입니까? 본인의 연봉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센터에 들어간 돈이 얼마인지나 아십니까? 자신 없으면 그 자리 내놔야지…… 안 그래요, 이주훈 씨?"

오민석이 호칭을 센터장에서 이주훈 씨로 변경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언제든지 센터장 자리에서 해임시킬 수 있다는 경고를 보낸 것이었다.

이를 눈치챘을까? 이주훈은 몇 번이나 입을 달싹거린 끝에 입을 열었다.

"이거는 가급적 쓰지 않으려고 한 방법인데…… 이 방법을 한번 써 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무슨 방법요?"

오민석이 그다지 탐탁지 않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하지만 탐탁지 않은 표정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이야기가 솔깃한 것이었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오민석의 표정은 만족감으로 물들고 있었다.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오민석이 입을 열었다.

"그거 괜찮네. 함정을 한번 파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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