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
교수들의 세미나 (3)
곽태성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남은 케이스를 선택했다. 케이스를 옆구리에 끼며 그가 말했다.
"젊은 교수님이 실력에 상당히 자신이 있나 봅니다? 거침없이 선택하는 걸 보니?"
기적은 무슨 말이냐는 듯 곽태성을 바라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어차피 비슷한 케이스라고 하시기에 그냥 아무 쪽이나 골랐습니다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곽태성이 커험 하고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아니, 아니. 나는 걱정돼서 그러지. 많은 교수님들 앞에서 데모를 해야 하는데 혹시라도 무슨 실수를 할까 봐서."
기적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직원을 향해 물었다.
"그래서 데모가 언제 시작이라고요?"
그 모습에 곽태성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불쾌감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기적으로서는 평소 하던 대로 행동을 했을 뿐이었다. 재벌 일가 앞에서도 당당했던 그였다. 그런 그가 잘나가는 학과장이라고 해서 주눅 들 이유는 전혀 없었다.
다만 대접받는 것에 익숙한 곽태성으로서는 기적의 당당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젊다고 해서 당연히 고개를 숙여야 하는 것이 아닌데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전형적인 꼰대 마인드였지만 하는 수 없었다. 너무 오랜 시간 그렇게 살아오다 보니 의식 자체가 그렇게 틀어진 탓이었다.
젊은 기적과 나이가 있는 곽태성의 대립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최근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사회적 갈등이 생각났다.
바로 2030 세대와 중장년층의 갈등이었다. 남녀 갈등만큼이나 큰 문제로 떠오른 세대 갈등은 최근 들어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물론 2030 세대와 중장년층의 말 중 누구의 주장이 옳다고 단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전에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는 간단한 논리였다.
슬쩍 곽태성의 눈치를 본 직원이 질문에 대답했다.
"에…… 그게…… 어차피 이제부터 식사 시간이거든요. 1시간 반 동안 쉬니까 식사하시고 1시 반부터 데모해 주시면 됩니다. 환자분들은 1시 20분까지 들어오실 거고요."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그렇게 기적과 곽태성이 자리로 돌아간 이후 직원이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지금부터 식사하시겠습니다. 오늘 점심은 호텔식이고요. 이야기되어 있으니까 연회장에서 식권 제출하시고 드시면 됩니다. 오전 내내 수고 많으셨습니다. 식사 맛있게 하시고 오후에 뵙겠습니다.
공식적으로 점심시간이 시작되자 기적은 조현진과 함께 연회장으로 이동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식사를 하는 기적과 달리 조현진은 노심초사하는 얼굴이었다.
"교수님, 데모 괜찮으시겠어요?"
기적은 먹고 있던 음식물을 씹어 삼킨 뒤에야 입을 열었다.
"데모가 왜요? 제가 잘 못 할까 봐서요?"
"그게 아니라…… 너무 갑작스럽게 데모를 하게 돼서 부담되시는 건 아닌지 걱정이에요. 게다가 같이 치료하시는 분이 하필 곽태성 교수님이어서……."
기적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곽태성 교수님이 그렇게 치료를 잘하나요?"
"에? 곽태성 교수님 진짜 모르세요?"
"네. 저는 교수님이라고는 저희 학교 교수님들밖에 몰라서…… 제가 꼭 알아야 하는 분인가요?"
"아니요…… 그건 아니고. 워낙 유명하시다 보니 다들 알고 계셔서……."
듣는 이가 없는지 주변을 살핀 조현진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신경계 치료만큼은 최고라고 불리시는 분이에요. 원래 서울대 병원에서 의료기사장으로 계셨었는데, 그때는 진짜 유명하셨었어요. 곽태성 교수님에게 치료 한번 받아 보겠다고 아주 환자들이 줄을 섰대요. 뭐, 이건 확인이 안 된 이야기이기는 한데 못 걷던 환자들이 교수님이 손만 대면 걸어서 나갔다는 이야기도 들리더라고요. 아무튼 그래서 곽 교수님, 마이다스의 손, 매직 핸드 뭐 이렇게 불려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기적이 고개를 갸웃하다 말했다.
"아! 그 못 걷던 사람들이 손만 대면 걸어 나간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것 같네요. 대학교 때 동기한테 들었었나? 그래서 제가 지저스급의 이야기라고 말했었는데…… 그게 바로 곽태성 교수님 이야기였군요."
말을 마친 기적은 다시 한 숟가락을 입에 넣었고, 이를 씹어 삼킨 뒤 말을 이었다.
"시험을 보는 것도 아니고, 상대를 이기기 위해 대결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곽 교수님이랑 상관없이 저는 그저 제 치료를 하면 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가요? 듣고 보니 그러네요."
고개를 끄덕이는 조현진의 모습은 이전과는 달리 편안해 보였다. 덤덤한 기적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덩달아 마음이 안정된 것이었다.
이후로는 조용한 식사가 계속되었다. 기적은 맛있게 식사를 마쳤고, 다시 홀로 돌아가 케이스를 살피며 곧 있을 데모를 준비했다.
'뭐, 어려운 환자는 아니네. 아니, 어렵지 않은 게 아니라 쉬운 환자라고 해야 하나?'
단시간에 결과를 내야 하는 데모스트레이션이기 때문일까? 차트를 통해 본 환자는 상당히 마일드하고 발병한 지도 얼마 안 되는 케이스였다.
이 시기의 환자는 그냥 둬도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급속히 회복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한 번의 데모로 결과를 만들어 내기에는 최상의 케이스라 할 수 있었다.
기적이 그렇게 케이스를 살핀 지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 순간 홀 안으로 휠체어 두 대가 들어왔다.
협회 직원과 함께 들어온 두 대의 휠체어는 곽태성을 거쳐 기적에게로 다가왔다.
"교수님, 이분이 오늘 교수님이 봐 주실 유만석 님입니다."
기적은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유만석을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치료를 해 드릴 이기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유만석과 그 보호자의 표정은 오래지 않아 떨떠름하게 변했다. 기적의 얼굴을 확인한 직후다.
"음…… 이분이 저희 담당 교수님인가요?"
그렇게 묻는 의도는 명확했다. 치료를 잘할 것 같은 사람들이 지천에 널렸는데, 하필 왜 이 사람이냐는 의미였다.
너무 어려 보이는 기적의 얼굴을 대한 순간 선입견이 생긴 것이었다.
물론 기적은 이런 경우에 대처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슬쩍 유만석의 다리를 만져 본 기적이 직원을 향해 말했다.
"혹시 아이스 팩 있습니까? 있으면 좀 준비해 주세요."
"아…… 네, 아마 준비할 수 있을 겁니다."
이어 그는 유만석을 향해 물었다.
"밤이 되면 다리가 뻣뻣해지고 통증이 많이 있으시죠?"
사실 야간통이라는 것은 어느 환자에게나 있는 증상이었다.
취침을 위해 침상에 누우면 아픈 곳에 신경이 집중되어 더욱 통증을 느끼게 되니까.
질환별 물리치료라는 과목을 공부하다 보면 모든 질환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기 때문에 물리치료사라면 야간통을 모를 수가 없다.
또한 스트록 초기에는 99%의 환자들이 다리에 강직이 있다.
기적이 유만석의 다리를 만져 본 뒤 야간통과 강직을 거론한 것은 사실 전혀 놀랄 일이 아닌 것이다.
다만 환자 입장에서는 다르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묻지도 않고 자신의 증상을 척척 맞히니, 이 사람이 그걸 어떻게 알았지?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유만석과 그 보호자 또한 다르지 않았다.
"맞아요. 그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신기하다는 듯 보호자가 물었다. 기적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보니까 알겠던데요. 잠깐 봐도 되겠습니까?"
강직과 야간통.
별것 아닌 질문이었지만 그 효과는 상당했다.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던 보호자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네, 네. 보세요. 보시고 우리 경화 아빠 좀 고쳐 주세요."
"그럼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질문 하나로 싸늘했던 환자의 마음을 돌려세운 기적은 이후 편하게 환자의 상태를 살폈다.
차트를 통해 확인했던 내용들을 실제로 확인하면서 치료 계획을 세우는 시간이었다.
중간에는 아이스 팩이 도착했다. 치료용 아이스 팩은 아니었지만 스트랩이 함께 왔기에 기적은 어렵지 않게 아이스를 유만석의 다리에 적용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10분의 시간이 지나가고 마침내 치료 시간이 다가왔다. 예의 직원이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다들 점심 식사는 맛있게 하셨습니까? 지금부터 오후 일과를 시작하겠습니다. 오후 일과의 시작은 오전에 공지해 드린 대로 두 교수님의 데모스트레이션이 될 텐데요. 혹시 두 교수님 중에 먼저 해 주실 분이 계신가요?
그 말에 곽태성이 먼저 손을 들었다.
"내가 먼저 하는 게 어떻습니까? 젊은 교수님이 아무래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요."
배려하는 척 말했지만 곽태성이 먼저 하겠다는 데는 나름의 노림수가 있었다.
자신이 먼저 치료를 보임으로써 이후에 나올 기적의 치료를 밋밋하게 만들어 버리겠다는 것이었다. 후배를 위해 배려하는 넒은 마음씨는 덤이었고…….
아니나 다를까? 옆자리에서 곽태성을 칭찬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교수님!"
"배려심이 넘치십니다."
직원이 기적을 향해 물었다.
-그럼 곽태성 교수님께서 먼저 하는 것으로 할까요? 이기적 교수님, 어떠십니까? 괜찮으십니까?
이에 기적은 좀 전에 그랬듯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기에 곽태성은 다시 한번 다짐했다. 애송이의 기를 완전히 눌러 버리겠다고.
그 다짐은 이어진 치료에서 여과 없이 드러났다.
"환자분, 오늘 나가실 때 걸어 나가시지 못하면 제 손에 장을 지지겠습니다."
그 말에 환자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고, 좌중에 모인 사람들은 가볍게 웃으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그럼 비포 애프터를 위해 한번 상태를 점검해 볼까요?"
곽태성은 과연 노련함과 실력을 모두 갖춘 물리치료사였다.
그는 정확하고 간결한 손동작으로 환자를 컨트롤했고, 또 동작을 할 때마다 이 행동을 왜 하는 것인지에 대한 이론적 배경을 정확하게 곁들였다.
"콰드리 포지션은 몸의 협응 동작을 키우는 데 굉장히 좋은 동작입니다. 이 같이 콰드리 포지션에서 몸을 움직이다 보면 근력 강화는 물론 협응 능력, 밸런스 강화까지 되니까 그야말로 물리치료사들에게 전가의 보도와 같은 동작이라 할 수 있지요."
"신장 동작은 더도 덜도 말고 이렇게 8초만 합니다. 이보다 적으면 뇌에 들어가는 정보가 부족하고 이보다 많아도 더는 뇌에 정보가 전달되지 않으니까요. 유로 저널에 소개된 논문에 따르면 8초가 가장 이상적인 시간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정석대로 치료하다 보니 환자의 상태는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누워서 치료를 받던 환자는, 이내 엎드렸고, 또 앉았으며, 기어이 일어났고, 끝내 걸음을 옮겼다.
"와! 환자분 이제 곧잘 걸으시네."
"역시 곽태성 교수님이네. 마치 컴퓨터처럼 치료하신다."
"이럴 때 이런 말 쓰지 않나? 명불허전이라고."
물론 처음에도 환자는 걸음을 옮기는 것이 가능했다.
다만 그 게이트의 수준은 아주 낮았다. 본인이 직접 걸음을 옮긴다기보다는 거의 곽태성에 의해 끌려가는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대략 30분이 지난 뒤 환자의 상태는 몰라보게 좋아졌다. 주객의 전도됐던 이전의 게이트와는 달리 이제는 스스로가 걸음을 옮기고, 곽태성이 도와주는 느낌이 강했던 것이다.
그 덕분에 곽태성은 기분 좋게 치료를 마칠 수 있었다. 처음에 약속했던 대로 환자를 강단 끝까지 걸어오게 만든 그는 웃으며 강단을 내려왔고, 사람들은 훌륭한 치료를 보여 준 곽태성을 향해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 주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박수가 끝나기 무섭게 사람들의 시선은 기적을 향해 이동했다.
이제는 기적이 치료를 보여 줄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