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물리치료사-175화 (175/205)

# 175

교수들의 세미나 (1)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순식간에 수요일이 찾아왔다.

수요일은 힐링 센터의 정기 휴무일.

원래 같았으면 집에서 쉬며 쌓인 피로를 풀다 오후에나 볼 일을 보러 나갔을 기적이었지만, 오늘은 아침 일찍 자동차를 타고 집을 나섰다.

그의 자동차가 향하는 곳은 집에서 약 1시간 거리에 위치한 조선 호텔.

물리치료사 협회에서 주관하는 세미나가 열리는 곳이었다.

열심히 운전을 해 호텔에 도착한 기적은 직원에게 발렛 파킹을 부탁한 후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너무 일찍 왔나?"

어제 저녁 기적은 조현진 교수와 홀에서 만나기로 통화를 했다.

그런데 너무 빨리 도착한 탓일까? 아직 조현진 교수는 도착하지 않은 듯했다.

기적은 인근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 스마트폰을 만지며 시간을 보냈다.

그가 몇 개의 기사를 읽었을 때였다.

"교수님, 죄송해요. 제가 너무 늦었죠?"

목소리의 주인공은 조현진이었다. 머리가 헝클어진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민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어 기적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도 방금 왔어요. 들어가시죠."

그러나 조현진은 마음이 편치 않은 듯했다.

"너무 죄송해요. 아이들 등원시키다 보니…… 시간이 지체되는 바람에."

조현진은 워킹맘인 듯했다. 그것도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슈퍼 워킹 맘.

기적은 조현진의 모습에서 자신의 어머니인 손성희를 떠올렸다.

어머니 손성희는 얼마 전까지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었다. 내가 너를 키우랴 직장을 다니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고.

조현진에게서 젊은 시절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린 기적이 따스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괜찮아요. 시간을 아예 넘긴 것도 아니고 제가 시간보다 빨리 온 건데 뭘 그러세요. 저 그렇게 성격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그렇게 말한 기적은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애들은 잘 등원시키셨어요? 몇 살이에요?"

"아…… 네. 쌍둥이인데 둘 다 네 살이에요. 남자애들……."

"아, 쌍둥이요? 둘 다 남자애요? 와~ 키우기 완전 힘드시겠네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며 세미나가 열리는 홀 안으로 이동했다.

홀 안은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었고, 일찌감치 도착한 참가자들이 동향을 살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본 기적이 조현진을 향해 말했다.

"홀이 엄청 크네요. 생각보다 규모가 큰가 봐요?"

"네, 네. 유명하신 분들은 거의 다 온다고 보면 돼요. 그래서 엄청 크게 해요."

"저기 우리 학교 자리 있네요. 먼저 자리 잡고 있을까요?"

"그럴까요?"

두 사람이 세원대학교라는 명패가 있는 테이블을 향해 걸음을 옮길 때였다.

"어? 조현진 아니니? 반갑다!"

말과는 달리 전혀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조현진도 그리 반갑지 않은지 인사하는 타이밍이 조금 늦었다.

"어…… 반갑다, 잘 지냈지?"

"너 세원대학교 교수 됐다는 이야기 들었다. 전화할까 하다가 괜히 바쁜데 방해될까 봐 전화기 그냥 내렸다. 세원대 대표로 온 거야?"

기적이 누군가 싶어 눈으로 묻자 조현진이 침을 꿀꺽 삼킨 뒤 대답했다.

"대학 동기예요."

"아, 그래요? 그럼 이야기 나누고 오세요. 저 먼저 앉아 있을게요."

기적이 동기라는 여자를 향해 살짝 고개인사를 한 뒤 자리로 이동했다.

그러자 예의 여자가 조현진을 향해 물었다.

"저 남자애는 누구야? 누군데 서로 존댓말을 해?"

"야, 임성숙, 말조심해. 우리 학교 정교수님이셔. 나는 교수님 모시고 온 거고."

그 말에 여자, 임성숙은 놀란 듯 눈썹을 올렸다가 이내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네가 모시고 왔다고? 완전 놀랍다. 세원대학교 그래도 인 서울 대학교인데 저렇게 젊은 분이 정교수 자리 차지하셨다니…… 와우, 능력 좋으시다?"

겉으로는 대단하다고 추켜세웠지만 그 뉘앙스와 표정을 보면 명백한 비아냥거림이었다.

임성숙의 말이 조현진에게는 이렇게 들렸다.

'명색이 인 서울 대학교인데 저런 젊은 사람이 교수라니 수준 참…….'이라고. 입술을 깨문 조현진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나이가 뭐가 중요하니. 그래도 교수님은 실력으로 정교수 자리 차지하셨어. 누구처럼 인맥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한국 대학교 물리치료과를 다니던 시절, 조현진은 항상 장학금을 받았었다. 1등에게만 주어지는 전액 장학금을.

반면 임성숙은 장학금은커녕 톱10 안에도 간신히 진입하는 수준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과 성적은 물론,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는 조현진이 졸업 이후 승승장구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졸업 이후 대학원을 졸업하기 무섭게 임성숙은 모교인 서울대학교 전임 교수 자리를 차지했지만, 조현진은 몇 번이나 고배를 마신 끝에 세원대학교 전임 교수가 된 것이다.

같은 인 서울 대학교라고는 해도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대학 중 하나로 꼽히는 서울대학교와 세원대학교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존재했다.

조현진은 그 이유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인맥의 차이라고. 즉 방금 말한 '누구처럼'이란 임성숙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라는 말 때문일까? 임성숙이 반응을 보였다.

"뭐? 호호호, 너 말 재미있게 한다? 그래 얼마나 실력이 좋으신지 이따가 보자. 나는 곽태성 교수님 모시고 왔는데 그 분보다 잘하려나?"

조현진은 당연하지라고 말하려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그녀는 기적의 실력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총장과 학과장이 워낙 칭찬을 해서 그런가 보다 생각한 것이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소문이란 과장되기 마련이니까. 기어들어 온 사람이 걸어서 나간다는 말을 곧이 믿기는 힘들었다.

더구나 곽태성이 누구인가? 서울대학교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실력자로 신경계 환자 치료에 있어서는 일가를 이룬 권위자였다.

그런 사람보다 저 젊은 교수가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 솔직히 확신이 서지 않았다.

입술을 잘근거리고 있는데 임성숙이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가 실력이 좋은지는 이따가 보면 알겠지. 이야! 세원대와 서울대의 대결이라…… 벌써부터 기대된다, 얘. 어? 교수님한테 전화 왔다! 그럼 좀 이따 보자?"

그 말을 끝으로 임성숙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딘가 분한 표정으로 자리에 착석하는 조현진을 향해 기적이 말했다.

"표정이 좀 찝찌름하네요? 그렇게 좋은 인연은 아니었던 것 같던데?"

조현진이 민망한 듯 멋쩍게 웃었다.

"어? 교수님 앞이라 티 안 내려고 노력했는데…… 티 났나요?"

"흐흐, 이래봬도 현역으로 있습니다. 매일같이 사람들 눈치 보면서 치료하는데 그 정도도 모를까 봐요? 얼굴 보는 순간 알았습니다. 두 사람이 별로 좋은 사이는 아니구나 하고요."

"교수님 눈은 못 속이겠네요. 맞아요. 동기인 건 맞는데 그렇게 반가운 사이는 아니에요."

다시 한번 멋쩍게 웃은 조현진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솔직히 궁금해요. 저는 대학 졸업하고 바로 조교로 들어가서 대학원 다니고 하느라 한 번도 임상 경험을 쌓아 보질 못해서요. 교육 들으면서 환자들 치료해 보기는 했지만 수박 겉핥기죠, 뭐. 그래서 항상 임상에 대한 동경심을 가지고 있어요."

"동경요? 확실히 임상에서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느끼는 보람이 있죠. 하지만 그건 교단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학생들 가르치면서 보람을 느끼잖아요? 그러니까 서로 부러워할 것 없이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면 그만인 거죠."

조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이네요. 그런데 저번에도 느꼈지만 교수님은 진짜 달변가인 것 같아요. 딕션도 정확하고…… 일리도 있고…… 교수님 말 듣다 보니까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네요."

"음, 교수님, 임상에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하는 필수 스킬이 뭔지 아세요?"

"치료 스킬?"

기적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타이밍 상 말솜씨라는 말이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임상에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하는 것은 치료 스킬이 아니라 말하는 스킬이에요."

"좀 이해가 안 되네요? 치료 실력이 가장 중요한 것 같은데…… 말솜씨는 저희 같은 교육자들에게 필요한 것 아닌가요?"

"물론 치료 실력도 중요하죠. 하지만 그것도 신뢰가 쌓였을 때나 중요한 거죠. 치료사가 환자 마음에 안 드는 상황에서 제아무리 좋은 치료를 해도 다음 날 컴플레인 들어와요. 치료사 바꿔 달라고. 반대로 주야장천 안마만 해 줘도 마음에만 들면 다음 날 음료수 들고 내려오는 사람들이 환자들이에요. 흔히 라포 형성이라고 하는 그것. 그걸 형성하기 위해서는 말솜씨가 필수죠."

"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두 사람이 말의 힘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일순 마이크 툭툭 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부터 제15회 물리치료의 발전을 위한 세미나를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세미나를 주최하신 대한물리치료협회의 협회장 안상호 의학 박사님을 단상에 모시겠습니다.

소개와 함께 배가 불룩하게 나온 중년 남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안상호였다.

-아아! 안녕하십니까? 저는 대한물리치료협회의 협회장 안상호입니다. 오늘 홀의 분위기가 굉장히 뜨거운데요. 최근 기승을 부리는 동장군도 이곳에서만큼은 전혀 힘을 쓰지 못할 것만 같습니다. 에……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분들을 이렇게 모시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것은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고 또 받아들임으로써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하겠습니다. 에…….

안상호는 약 5분간 말을 이어 간 끝에야 겨우 말을 멈췄고, 사회자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 이 자리를 빛내기 위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물리치료사 두 분을 초청했는데요. 정말 모시기 힘든 두 분을 모셨으니 많은 박수 부탁드리겠습니다. 먼저 보바스 치료법 국제 강사로 활동하고 계신 마이크 맥더넛 선생님이십니다. 많은 박수 부탁드립니다.

그 말에 의자에 앉아 있던 금발의 백인 사내가 앞으로 걸어와 인사했다. 많은 박수가 이어졌고, 이것이 줄어들기를 기다린 사회자가 말을 이었다.

-두 번째 분은 PNF 국제 강사로 활동하고 계신 베이커 도미닉 선생님이십니다. 많은 박수 부탁드립니다.

그 말에 갈색 곱슬머리에 마른 몸을 한 사내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어둠에 얼굴을 숨기고 있던 그가 조명 아래로 나오는 순간, 기적은 그 남자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도미닉? 맞아. 저번에 PNF 강사로 왔던 그 도미닉이야.'

그런데 도미닉을 알아본 것은 비단 기적뿐만은 아닌 듯했다.

좌중을 둘러보던 도미닉이 살짝 웃으며 기적을 응시한 것이었다. 기적은 가볍게 목례를 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이를 본 조현진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 저분하고 아는 사이세요?"

"아? 예. 예전에 PNF 교육을 들을 때 저분에게 들었습니다."

"그래요? 그런데 저분도 교수님을 기억하시는 것 같던데요? 어떻게 기억하시지?"

"예. 그때 제가…… 운 좋게 만점을 받아 가지고…… 교수님이 기억하시는 것 같습니다……."

"와, 정말요? 대단하세요."

"아닙니다…… 운이 좋았어요."

두 사람이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세미나는 본궤도에 올랐다.

환자들이 단상으로 올라왔고, 보바스를 대표해 온 맥더넛과 PNF를 대표해 온 도미닉을 상대로 질의응답을 주고받는 시간이 이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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