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
사라진 시스템 (11)
교수 임용을 받았지만 달라진 것은 거의 없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힐링 센터 정중앙에 세원대학교 정교수(명예 교수)라는 임명장이 걸렸을 뿐.
물론 작은 변화가 일으킨 효과는 상당했다. 센터에 방문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임명장에 관심을 드러냈다.
"세원대학교 정교수? 정교수면 엄청 높은 거 아닌가?"
"우리 센터장님 나이가 몇인데 벌써 정교수를 하세요?"
"우리 센터장님 실력이 진짜 좋긴 좋은가 보다. 이 젊은 나이에 인 서울 정교수라니……."
"역시 우리 센터장님, 내가 주변에 엄청 홍보하고 있어요."
기적은 그저 빙그레 웃으며 그 말들을 웃어넘겼다.
딱히 뭐라 해야 좋을지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후가 되었을 때 기적은 최근 가장 신경을 쓰고 있는 환자와 얼굴을 마주했다.
바로 명석한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둘의 사이는 치료를 처음 시작한 날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휠체어에 앉은 석한은 여전히 삐딱한 태도로 기적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치료가 진행된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좋으나 싫으나 매일같이 30분간 얼굴을 맞대고 몸을 부딪치기 때문에 친밀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석한에게 인사를 건네는 기적의 목소리에서 잘 드러났다.
"왔냐? 어제 줄기세포 맞았다며, 잘 맞았어?"
처음과는 묘하게 편해진 말투.
물론 그것은 석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 맞았다. 그래서, 뭐?"
여전히 삐딱한 말투였다. 하지만 외면하지 않고 대답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둘의 관계가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뭐 이렇게 삐딱하게 굴지? 치료에 참고하려고 물어보는 건데?"
싸울 마음은 없었던 것일까? 석한은 마주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그냥 고개를 돌려 버렸다.
잠시 조용해진 가운데 말을 이어 나간 것은 석한의 뒤에 있던 지은이었다.
"그런데 저건 뭐예요? 세원대학교 정교수? 오빠 교수 됐어요?"
기적은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 그렇게 됐다.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라."
그 말에 지은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렇게 화려한 액자에 넣어 놓고 신경을 쓰지 말라니 앞뒤가 안 맞는 거 아니에요? 누가 봐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액자인데?"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기적이 손까지 동원하며 항변했다.
"아니, 저 액자는 내가 선택한 게 아니라고. 됐고, 줄기세포 맞고 얼마나 좋아졌는지 한번 보기나 하자."
사설은 거기까지.
분위기를 바꾼 기적은 본격적인 치료를 시작했다.
시작은 석한의 상태를 체크해 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처음에만 해도 몸을 풀어 주는 단계가 있었지만, 지은이 방문 전에 몸을 풀어 주고 왔기 때문에 굳이 진행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었다.
"자, 후크라잉 자세로 자세 변환."
툭! 하고 말을 던지자 석한이 몸을 움직였다. 휠체어에서 베드로 몸을 옮긴 그는 몇 번 몸을 들썩거리는 것으로 금세 무릎을 올리고 눕는 후크라잉 자세를 만들어 냈다.
"와, 이제 진짜 잘하네."
세워진 석한의 무릎 앞에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은 기적이 말을 이었다.
"그러면 여기서 골반 들어 올리는 건 얼마나 되는지 한번 보자."
그 말에 석한이 반응했다.
끙! 하는 외마디 기합(?)성과 함께 골반을 들어 올린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생각만큼 좋지 못했다. 조금 올리는가 싶던 골반이 이내 중심을 잃고 틀어지며 무너져 버린 것이다.
"왼쪽이 약하네. 왼쪽으로 무너지는 걸 보니."
기적은 골반 쪽에 가볍게 손을 댄 뒤 다시 한번 힘을 줄 것을 주문했다.
"다시 한번 해 보자."
이전과 달라진 것은 딱 하나였다. 기적의 손이 석한의 골반에 살짝 접촉했다는 것뿐.
그러나 도출된 결과는 이전과 판이하게 달랐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석한이 골반을 끝까지 들어 올린 것이었다.
한껏 크게 떠진 석한의 동공이 이렇게 묻고 있었다. 어떻게 한 거지? 무슨 마술을 부린 거야?
그것을 읽었을까? 지은이 석한을 대신해 질문을 던졌다.
"오빠는 컨트롤을 진짜 잘하는 것 같아요. 간호사로서 진짜 궁금하고 신기해요. 어떻게 손 살짝 댔을 뿐인데 이렇게 결과가 달라지죠?"
기적이 웃으며 그 말에 답했다.
"두 가지지. 일단 정확한 근육 부위에 손을 댐으로써 해당 근육을 본인 스스로 자각하게 만드는 거고, 다른 하나는 해당 근육의 동원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움직임을 보조해 주는 거지."
지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이해는 잘 안 되네요. 사람마다 근육 위치가 다다른데 그 근육을 어떻게 찾아요? 그리고 근육의 동원 방향은 또 어떻게 다 알아요? 근육이 600개가 넘는데 그 근육의 기시 정지를 어떻게 외워서 동원 방향까지 가늠하느냐고요."
근육의 기시 정지란 시작점과 끝지점을 말하는 단어다. 기적이 여전한 태도로 말했다.
"그건 경험을 쌓으면 자연스럽게 보이는 거라고 생각해. 사람마다 다르다고는 해도 크게 다르지는 않거든. 무릎 근육이 엉덩이에 있고, 엉덩이 근육이 팔에 있고 그런 거는 아니니까. 그리고 기시 정지는 외우려고 들면 절대 안 돼. 사람 머리가 컴퓨터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다 외워. 뭐, 아인슈타인급 아이큐라면 어떻게 외울 수도 있겠지만……. 효율적이지는 않지. 그냥 근육이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지 생각해 보고 자연스럽게 움직임을 보조하면 되는 거지. 물론 예외인 근육들도 있지만…… 몇 개 정도는 외우면 되는 거고."
"아, 그렇구나……."
지은은 기적의 치료를 볼 때마다 이런 식으로 질문을 하고 있었다.
아마 이를 통해 간호사로써의 역량을 키워 가고 있는 듯했기에, 기적은 귀찮아하지 않고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해 주었다.
한차례 질문과 대답이 오간 후, 기적은 다시 석한의 치료에 집중했다.
석한의 골반 들어 올리기, 일명 브릿지 자세는 점차 완벽해졌고, 기적은 석한 모르게 조금씩 골반에서 손을 떼어 냈다.
그렇게 손을 떼고 몇 번의 동작을 더 반복했을까? 기적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손 뗐는데도 잘하네? 확실히 좋아졌는데? 줄기세포 꾸준히 맞은 효과가 나오는 건가?"
그제야 기적의 손이 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석한이 동공을 확장시켰다.
"어? 내가 혼자 하고 있었던 건가? 이거 분명 어제만 해도 못 했던 건데."
"맞아. 어제만 해도 못 했지. 그런데 오늘은 잘하네?"
석한은 크게 고무된 표정이었다. 안 되던 동작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가능성이 늘었다는 반증이니까. 물론 고무된 것은 석한뿐만은 아니었다.
"앉아 보자. 브릿지가 잘되니까. 앉은 상태에서 골반을 들어 올리는 동작도 어느 정도 될지도 몰라."
기적 또한 석한이 보여 준 가능성에 흥분한 상태였다.
'이게 될까?'
석한은 그 말을 따라 몸을 일으키면서도 얼굴에는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갑작스레 시팅 동작을 한다고 하니 가슴이 설레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누워서는 했어도 앉아서는 쉽지 않을 텐데? 두 동작은 완전히 다르잖아."
기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동작이 다른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다만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었다.
"두 동작은 엄연히 다르지. 하지만 코드 인저리는 스트록과 달리 모터 러닝이 돼. 누워서 한 동작을 앉아서도 할 수 있다는 말이야. 아마 조금 힘들기는 해도 할 수 있을 거야. 처음에는 내가 도와줄 거니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석한은 포지션을 완성했다.
기적은 두 발을 똑바로 세팅한 뒤, 석한의 뒤로 돌아가 골반을 보조했다.
혹시나 힘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을까 싶어 보조를 한 것이었다.
그것으로는 불안했을까? 기적은 또 지은을 동원했다.
"지은이 네가 석한이 발이 움직이지 않도록 잡아 줄래? 혹시라도 발이 무너져서 넘어지지 않도록."
안전을 완전히 확보한 다음에야 기적이 석한을 움직이게 했다.
"자, 시작!"
그리고 목소리에 반응한 석한이 몸을 움직이는 순간, 석한은 어찌나 놀랐는지 크게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어! 된다! 된다고……."
목소리가 너무 컸다는 사실을 느낀 석한이 이내 목소리를 줄였지만 얼굴에 떠오른 놀라움만큼은 여전했다.
기적이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네. 진짜 좋아졌다. 비록 2명이 도와주기는 했지만 단번에 해낼 거라고는 나도 생각 못 했는데."
손수건을 꺼내 땀으로 범벅된 석한의 이마를 닦아 주는 지은의 표정 또한 석한 못지않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제껏 누워서만 움직임을 가졌던 석한이 앉아서 무언가를 해냈다는 사실에 감정이 북받치는 듯했다.
"오빠, 진짜 축하해요. 이대로만 하면 금방 일어날 수 있을 거예요."
촉촉이 젖은 목소리에 석한은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교통사고가 난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그의 뇌리를 스쳐 가고 있었다.
솔직히 처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았을 때는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렇게 사느니 그냥 죽어 버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태양이 떠오르지 않는 영원한 어둠에 갇힌 기분이었다. 겁이 났다. 또 두려웠다. 그리고 무서웠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
좋지 않은 말로 석한은 스스로를 학대했다.
바로 그때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라는 당신의 그 말은 틀렸다고 말해 준 이가 있었다.
바로 지금 자신의 앞을 지키고 있는 지은이었다.
한 줄기 빛으로 나타난 그녀는 상처 입은 석한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고, 음지에 갇혀 겁에 질려 있던 석한을 양지로 끌어내 주었다.
그 덕분에 석한은 다시 한번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지은을 위해서 다시 한번 걸어야겠다는 결심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로는 피나는 노력을 했다.
초고가인 줄기세포를 맞는 것은 물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상태는 좀처럼 좋아지지 않았다. 기적이 없이는 회복이 힘들다는 담당의의 말처럼 고장 난 하체는 고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만 해도 죽어도 싫다고 했던 그가 고집을 꺾고 기적을 찾아온 것은 그 때문이었다.
다시 일어나 지은의 말에 대답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자존심 정도는 접어 두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자존심을 죽인 효과는 확실했다. 힐링 센터를 찾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요원하게만 느껴졌던 시팅 포지션에서의 동작이 가능해 진 것이다.
비록 어시스트를 받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가슴 한구석에서 다시 서고 걸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샘솟았다.
석한은 저도 모르게 땀을 닦아 주는 지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축축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네가 없었다면 아마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야."
"빨리 일어나기나 해요. 아직 갈 길이 멀어요. 너무 오래 걸리면 나도 지칠지 몰라."
지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석한이 이내 기적을 바라보았다.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그가 말했다.
"고맙다. 나 같은 망나니를 받아 줘서."
기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였을 뿐.
시스템이 사라졌지만 석한의 치료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