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물리치료사-173화 (173/205)

# 173

사라진 시스템 (10)

임명장을 수여받은 기적은 다시 총장실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김운찬을 만난 기적은 함께 점심 식사를 했고, 그 후에 비서의 안내를 받아 자신에게 배정된 교수실로 이동했다.

배정된 교수실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책상과 의자도 상당히 고급스러웠고, 물리치료과 교수실답게 각종 관련 서적과 소품들이 곳곳에 비치되어 있었다.

기적이 처음 보는 자신의 방을 홀린 듯 감상하는데 비서가 말했다.

"마음에 드세요? 혹시 마음에 안 드시는 부분 있으시면 수정해 드리겠습니다."

기적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아니요. 완전 마음에 듭니다. 저에게 과분한 곳이라고 생각하는 중입니다."

비서가 흐뭇하게 웃었다.

"총장님이 엄청 신경 쓰셨어요. 그래서 일반 교수님들 방보다 훨씬 고급지고 아늑한 느낌이 들어요. 저도 보고 완전 좋다고 생각했어요."

"총장님께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완전 마음에 든다고요."

비서는 반달눈을 만들며 웃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전달해 드릴게요. 이거는 임직원용 신분증이에요. 정교수용이라 골드 등급인데요. 이게 카드도 되고, 교내 시설 이용하는 마스터키도 되고, 할인 혜택도 많고 또 할인율도 높으니까 엄청 유용하게 쓰일 거예요. 첫 번째 서랍 안에 혜택이 안내된 안내지가 있을 테니 확인하시고……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마지막으로 목에 거는 신분증을 전해 준 비서는 곧 자리를 비켜 주었다.

혼자가 된 기적은 신분증을 목에 건 뒤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러자 푹신한 의자가 적당히 몸을 받쳐 주며 안락한 느낌을 전해 주었다.

"좋구나~!"

저도 모르는 사이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파묻었던 상체를 세워 책상을 탁탁 두드리던 기적은 오래지 않아 책상에 있는 명패를 발견하고는 이를 돌려 보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교수 이기적. 명패 잘 만들었네."

명패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며 작게 뇌까린 기적은 이내 명패를 내려놓은 뒤 다시 의자에 상체를 파묻었다.

"수정 샘한테 놀러 오라고 연락해 볼까?"

그는 스마트폰을 들어 수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자 곧 수정이 그리로 가겠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학교 구경이나 시켜 줘야겠네."

고개를 끄덕인 기적이 스마트폰을 내려놨을 때였다. 일순 문밖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기적은 깜짝 놀라 상체를 일으켰다.

"누구세요?"

"이 교수님? 물리치료과 교수 박태연입니다. 조현진 교수하고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아, 네. 들어오세요."

그러자 곧 문이 열리며 4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 1명과 3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 1명이 안으로 들어섰다.

"지난 동문 체전 때 뵙고 두 번째 뵙습니다. 물리치료학과 전임 교수 박태연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물리치료학과 전임 교수 조현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박태연과 조현진이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말했다.

누가 보면 뭐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하겠지만 사실 이는 과한 처사가 아니었다.

계약직 전임 교수인 두 사람에게 정교수인 기적은 까마득히 높은 상사였으니까.

더구나 기적이 총장과 상당한 친분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다.

말 한마디에 재계약 여부가 판가름 날 수도 있기 때문에 환심을 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기적은 멋쩍은 표정으로 같이 허리를 숙여 보인 뒤 소파를 가리켰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커피가 있나……."

말을 끝내지도 않았는데 조현진이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제가 커피 가져올게요. 두 분은 앉아서 말씀 나누고 계세요."

그러나 기적은 재빨리 손을 저어 그런 조현진을 막아 세웠다.

"아니에요. 두 분이 손님이니까 제가 타 올게요. 커피가 어디 있는지도 잘 모르시잖아요?"

커피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것은 방금 방에 들어온 기적이나 조현진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그 말이 먹혀들었는지 조현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소파에 착석했다.

다행히 내려 먹는 커피와 컵, 그리고 전기 포트가 준비되어 있었기에 기적은 오래지 않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세 잔을 만들 수 있었다.

그 커피를 각자의 앞에 올려놓은 기적이 소파에 앉았다.

"박 교수님은 허리 괜찮으세요? 혹시 또 아프고 그러지는 않으셨어요?"

그 말에 박태연이 마치 군인처럼 대답했다.

"옛! 저번에 허리 봐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 이후로 아프지는 않았습니다."

딱딱한 모습이 부담스러워 살짝 한숨을 내쉰 기적이 재빨리 화제를 전환시켰다.

"그런데 두 분 교수님께서 어쩐 일로 저를 찾아오셨나요?"

이번에는 조현진으로부터 대답이 나왔다.

"새로 오셨으니 인사도 드리고, 학과장님이 전달 사항도 주셔서 겸사겸사 방문했습니다."

"인사는 벌써 했으니까 됐고…… 학과장님 전달 사항은 뭔가요?"

조현진이 들고 있던 파일철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기적은 뭔가 싶어 이를 확인했고, 그런 기적을 향해 조현진이 부연 설명을 했다.

"이번에 조선 호텔에서 국내외 물리치료과 교수들이 모여서 세미나를 하는 모양이에요. 교수님께서 저희 학교 대표로 가 주셨으면 하는 게 학과장님 말씀이세요."

기적이 눈매를 모으며 반문했다.

"세미나요? 무슨 세미나요?"

"학과장님 말씀으로는 대한 물리치료 협회에서 하루 일정으로 주최하는 세미나인데…… 학기 시작하기 전에 국내외 교수님들, 그리고 3차 병원 실장님들 초빙해서, 모인 교수님들끼리 치료에 관해 토의도 하고 직접 환자를 보기도 한다고 하셨어요. 원래는 오원석 교수님이 매년 가셨었는데 이번에는 새로운 얼굴이 가는 게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아…… 그래요? 그런데 저는 아무래도 힘들 것 같은데…… 수요일만 쉬어서 시간이 안 맞을 것 같은데……."

"아, 그래요? 잠시만요."

스마트폰을 들어 날짜를 확인한 조현진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마침 그날이 수요일이에요. 이런 종류의 세미나는 보통 수요일에 하더라고요. 주말에는 쉬셔야 하고 수요일이 제일 한가한 날이라서…… 교수님만 괜찮으시면 참가하시면 될 것 같은데요? 영 불편하시면 제가 다시 학과장님께 말씀드릴게요."

기적은 잠시 염두를 굴린 뒤 고개를 저었다. 국내외 실력 좋은 교수들이 모이는 세미나다.

그렇다면 한번쯤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에요. 제가 갈게요. 생각해 보니까 가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조현진의 표정이 단번에 밝아졌다.

"아, 다행이네요! 사실은 학과장님이 교수님 잘 설득해 달라고 하셨거든요. 이번 세미나 제가 수행할 거예요."

"안 그러셔도 되는데…… 그리고 교수님도 참…… 그런 일이 있으면 저한테 직접 이야기하시지……."

눈치를 살피던 박태연이 타이밍 좋게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학과장님도 교수님한테 직접 이야기하기는 부담스러우셔서 그럴 거예요. 아무리 제자라고는 해도 이제는 같은 위치에 계시잖아요."

"그런가요?"

한때는 한없이 우러러보았던 학과의 학과장과 이제는 같은 위치에 있다.

그 말이 묘하게 기적의 가슴을 울려왔다. 정말 성공했구나 하는 생각이 불현 듯 스친 것이었다.

이후로는 특별한 의미 없는 커피 타임이 이어졌다. 세 사람은 사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커피를 마셨고, 커피가 떨어지자 슬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교수님, 좋은 시간 보내세요."

"조심해서 가세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나오지 마세요, 교수님.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두 사람은 몇 번이나 인사를 한 끝에야 문 뒤로 모습을 감췄다.

기적은 문이 완전히 닫히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길게 숨을 내쉬었다.

"사람 심리하는 게 참 이렇구나. 권력이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더니…… 사람들이 저렇게 저자세로 나오니까 나도 모르게 우쭐하게 되네……."

기적은 갑질을 하는 유형의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번도 누군가를 업신여기거나 깔본 적이 없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하지만 자꾸만 대접을 받게 되자 저도 모르게 어깨와 목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기적은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을 경계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지. 높이 올라갈수록 더욱 겸손해져야 해.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잃을지도 몰라.'

오르기는 어려워도 내려가기는 쉬운 법이다.

기적은 다시 한번 그 말을 가슴에 새긴 뒤 스마트폰을 들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수정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많은 메시지들이 도착해 있었다.

-지금 나가요. 10분 후에 지하철 타요.

-지금 출발했어요. 20분쯤 후에 도착하니까 지하철역 앞으로 데리러 와 줘요.

-뭐 하고 있어요? 1번 출구로 나가면 되죠?

메시지를 확인하는 와중에 또 하나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제 10분 남았어요. 나와요.

기적은 알겠다고 메시지를 남긴 뒤, 황급히 교수실을 나섰다.

그의 발걸음은 전철 소리가 들리는 세원대 입구 지하철역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 * *

"여기요, 여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기적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기적은 저도 모르게 감탄성을 내뱉었다.

"와! 수정 샘! 오늘 패션 완전 산뜻하네요?"

아닌 게 아니라 수정은 마치 대학 새내기 같은 패션을 하고 있었다.

노란색 맨투맨 티에 녹색 패팅을 입었고, 스키니한 청바지 아래로 올라온 목이 긴 양말에는 귀여운 고양이 자수가 놓여 있었다.

평소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패션이었기에 기적이 탄성을 내뱉은 것이었다.

수정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학가잖아요. 그래서 대학생처럼 입어 봤어요. 이상해요?"

기적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완전 대학생 같아요. 그냥 대학생도 아니고 새내기?"

"뭐예요~ 놀리지 말아요."

"놀리는 게 아니라 진심인데? 큰일 났네. 나는 완전히 아저씨처럼 곤색 슈트 입어 가지고. 완전 나이 차 나 보이겠네."

엄살을 떨자 수정이 불쑥 몸을 돌려 기적의 틀어진 넥타이를 바로 잡아 주었다.

"충분히 멋있으니까 엄살떨지 마세요, 교수님."

박력 있는 동작에 움찔했던 기적이 큼큼 헛기침을 한 뒤 말했다.

"하긴 아까 총장님도 그러더라고. 슈트발 완전 잘 받는다고, 흐흐."

"아이고, 30대 아재 허! 세! 작! 렬! 자화자찬 그만하고 빨리 학교 구경이나 시켜 줘요."

수정이 기적의 팔에 팔짱을 끼워 넣으며 말했고, 기적은 그 말에 곧바로 화답했다.

"그럽시다. 갑시다아~!"

그렇게 두 사람은 학교로 향하는 대학로를 천천히 걸어 나갔다.

기적은 걸음을 옮기며 자신이 자주 이용하던 음식점과 게임방, 당구장, 농구장 등을 차례로 소개하며 추억을 더듬어나갔다.

"여기 음식 진짜 맛있는데. 당구 쳐서 내기해 가지고 진 사람이 밥 사고 그랬죠. 허구한 날 수업 빠져나와서 애들이랑 스타 했어요. 스타 알죠? 스타크래프트. 여기서부터 학교예요. 저기 보이죠? 농구장. 저기서 애들이랑 매일 농구했어요."

그러다 보니 둘은 금세 기적의 교수실이 있는 건물 앞에 도착해 있었다.

"여기가 우리 강의동이고, 제 방은 2층에 있어요."

둘은 계단을 올라 2층 교수실로 이동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수정이 탄성을 토해 냈다.

"와! 이거 드라마에서나 보던 명패다! 교수 이기적! 이거 완전 고급스러워요! 교수 되면 임직원 혜택도 많지 않아요?"

"거기 서랍 안에 혜택 안내서 있다고 들었어요."

곧이어 수정의 입에서 또 한번 탄성이 터져 나왔다. 서랍을 열어 혜택지를 확인한 직후다.

"와! 대박! 혜택 엄청 많아요! 리조트, 호텔, 워터파크, 스키장 거의 무료예요."

기적은 수정의 흥분된 목소리에 실소를 흘리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곧 그의 눈에 조현진 교수가 놓고 간 세미나 공문이 눈에 들어왔다. 기적은 그 공문을 다시 한번 살폈다.

'국내외 유명 물리치료사 초청 세미나라…… 과연 어떤 식으로 진행될까?'

기적의 시선은 세미나가 열리는 조선 호텔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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