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물리치료사-170화 (170/205)

# 170

사라진 시스템 (7)

"여기서 '싫어'라고 하면 분위기 이상해지겠지."

살짝 웃으며 말한 기적이 슬쩍 석한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곧 그의 눈에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석한의 얼굴이 보였다. 얼른 얼굴빛을 바꾼 기적이 말을 덧붙였다.

"아…… 원래 이 대목에서 웃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그럴 분위기가 아닌가 보네. 좋아, 우리 한번 해 보자."

힘주어 말한 기적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비로소 긴장을 떨쳐 낸 석한이 그 손을 맞잡았다.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석한이 말했다.

"고맙다…… 아마 내가 너였으면 싫다고 했을 거다. 아마 그게 너와 나의 차이점이겠지."

"그게 명석한이고, 그게 이기적이지. 사람은 다 다르니까. 그래서 이 세상이 재미있는 거 아닐까? 다 똑같은 사람만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재미없겠지."

"꿈보다 해몽이네. 그렇게 포장해 줄 것 없다. 나는 내가 잘 아니까."

대화는 딱 거기까지였다. 말을 마친 석한이 휠체어를 살짝 뒤로 밀었다.

독대는 여기까지라는 말을 행동으로 대신한 것이었다. 그 행동에 담긴 의미를 용케도 알아챈 기적이 몸을 돌려 노심초사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이야기 끝났습니다."

그러자 명의진이 가장 먼저 걸어와 석한의 옆에 섰다.

"두 사람 표정을 보니 이야기가 잘 끝난 것 같은데 맞나?"

기적은 모르는 척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석한을 대신해 그 질문에 대답했다.

"예. 이야기 잘 끝났습니다. 제가 한번 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명의진은 급히 두 손을 뻗어 기적의 손을 감싸 쥐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 정말 쉽지 않은 결정을 했어요. 내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차지은 또한 말없이 허리를 숙였다.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감사의 마음을 담아 허리를 숙여 보인 것이었다.

옆에서 '진작 그랬으면 좀 좋아.'라는 김귀연의 투덜거림이 들려왔지만 기적은 그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명의진의 말을 받았다.

"은혜는요…… 저 공짜로 치료해 드리는 거 아닙니다. 정해진 돈 받고 치료하는 겁니다. 저기 요금표대로요. 그러니까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명의진은 저도 모르게 요금표를 확인한 뒤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요금은 밀리지 않고 꼬박꼬박 내겠습니다."

기적은 자연스레 농담을 던졌다.

"회원 등록하시면 10% 할인도 됩니다. 말 나온 김에 회원 등록하시죠. 등록하시면 예약도 바로 잡아 드리겠습니다. 바로 치료받으실 거죠?"

"그럼요, 그럼요. 바로 등록할 테니 최대한 빠른 타임에 예약 잡아 주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기적이 종이 두 장을 가져와 내밀었다.

"이건 회원 신청서입니다. 그리고 이건 이번 주 시간표입니다. 보시고 원하는 시간대에 표시해 주세요."

"그렇게 하죠."

고개를 끄덕인 명의진이 두 장의 종이를 받아 들려는 그 순간, 명석한이 손을 뻗으며 종이를 달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나도 눈이랑 손은 멀쩡하거든요. 제 치료니까 지금부터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아버지하고 할머니는 오늘을 마지막으로 더는 오지 마세요."

김귀연이 섭섭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석한아, 이 할미는 섭섭하구나.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니?"

그러나 명석한은 단호했다.

"섭섭해하지 마세요. 할머니도 할머니 일이 있으시잖아요. 할머니는 할머니의 삶을 사세요. 저도 홀로서기 해야죠. 언제까지 할머니 밑에서 개기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명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의 마음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편이 회복에도 도움이 될 테니까.

받아 든 종이를 석한에게 양보한 명의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직까지 납득하지 못하고 있는 김귀연을 향해 말했다.

"장모님, 그만 가시죠."

그러자 김귀연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명의진을 나무랐다.

"자네는 그렇게 쉽나? 자네 부인 일을 벌써 잊었느냐 말이야. 나한테 후회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또다시 후회를 남기고 싶어서 그러나?"

그 말에 답한 것은 명의진이 아닌 명석한이었다.

"할머니…… 엄마가 그렇게 된 건 아버지 잘못이 아니에요. 엄마가 병이 걸린 책임은 차라리 할머니와 저에게 있죠. 병은 가족력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저를 낳느라 몸이 약해지셨으니까요. 사실 아버지 책임은 없어요. 솔직히 말해서 예전에는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어요. 아버지 때문에 엄마가 아픈 거라고 책임 전가도 해 봤죠. 하지만 그건 치기 어린 행동이었어요. 가장 힘든 건 아버지였을 텐데…… 그러니까 할머니, 아버지에 대한 원망 이제 그만 멈춰 주시면 안 될까요?"

명석한의 그 말 앞에서 역팔자로 올라갔던 김귀연의 눈썹은 힘을 잃고 말았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그녀가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라고 왜 몰랐겠는가? 딸이 그렇게 된 것이 명의진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다만 원망할 누군가가 필요했고, 착한 사위에게 그 역할을 떠맡겼을 뿐이었다.

회원 신청서와 시간표를 살피며 명석한이 말을 이었다.

"2시간 후에나 치료받을 수 있겠네요. 오늘은 먼저 들어가세요. 저는 지은이하고 시간 보내다가 치료받고 갈 테니까요."

명의진과 김귀연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몸을 돌렸다.

힐끗 그 모습을 바라본 명석한은 '못 보일 꼴을 많이 보이네.'라고 혼잣말을 뇌까린 뒤 다시 회원 신청서 작성에 몰두했다.

신청서 작성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명석한은 오래지 않아 회원 신청서와 시간표를 넘겼고, 이를 확인한 기적이 말을 이었다.

"일단 증상을 정확히 알아야 하는데…… 여기 증상은 다 빈칸으로 남겨 뒀네?"

그 말에 답한 것은 차지은이었다. 가방을 연 그녀가 파일 하나를 기적에게 넘겨주었다.

"이거 진단서랑 차트예요. 진단서는 병원에서 발급해 준 것, 차트는 저랑 석한 오빠가 작성한 것. 명성 병원 차트 양식 받아서 했으니까 오빠가 알아보기 편할 거예요."

석한과 지은은 의사와 간호사 출신이었다. 특히 석한은 명성 병원 출신 의사였고. 때문에 개인적으로 작성한 차트라고는 해도 병원에서 기록한 것과 퀄리티 면에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디테일하고 보기 쉽게 정리된 면이 있었다. 덕분에 기적은 어렵지 않게 석한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기적은 나름대로 석한의 상태를 정리해 보았다.

-진단명 : spinal cord injury, asia scale B.

-motor level L1, sensory level L4

-기능적 움직임 : supine(o), prone(o), sitting(o), bed to wheel chair(o), standing(x)

-특이사항 : 경련(x), 강직(o)

차트는 2장에 걸쳐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내용들만 꼽아 보자면 위와 같았다.

그렇게 정리를 끝냈을 때 기적은 1명을 떠올렸다. 바로 명성 병원에서 처음 만났던 코드 환자, 성우였다.

강직이 있고, 요추 레벨이라는 점, 그리고 아시아 스케일 B라는 점까지 성우와 꼭 닮아 있었던 것이다.

당시 기적은 성우를 걷게 만드는 데 실패했다. 휠체어 농구 선수라는 꿈을 찾아 주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걷게 만드는 데 실패한 것이다.

그렇다면 명석한 또한 걷는 것은 힘들다고 봐야 할까? 불쑥 뇌리를 스치는 질문에 기적은 고개를 저었다.

'그때와는 달라. 나는 달라졌으니까. 지금의 나라면 얼마든지 그때와는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어.'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치료 실력이 자신에게는 있었으니까. 이번만큼은 다른 결과를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기적이 말했다.

"운동 신경도 요추 레벨이고 감각 신경도 L4까지 살아 있으니까. 희망은 있다고 봐야겠지. 열심히 한다면 기적을 바라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말에 명석한은 얼굴을 움찔했다. 아닌 척하고 있지만 그의 얼굴에는 숨기기 힘든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치료에 앞서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달하는 기적 특유의 치료법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었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 여세를 몰아 치료를 하고 싶지만…….'

당장은 그럴 수 없었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끝나 가고 있었으니까. 부득이 치료를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아쉽지만 2시간 후에 보자고."

지은이 웃으며 대답했다.

"호랑이 기운이 샘솟도록 밥 많이 먹고 올게요. 이따 봐요. 오빠도 인사할래요?"

그러나 명석한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칠 뿐 어떤 인사도 하지 않았다.

민망한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인 지은이 이내 휠체어를 끌고 센터를 빠져나갔다.

'좋아 보이네. 나랑 만날 때도 지은이가 저렇게 웃었었나?'

기적은 갑자기 샘솟는 의문에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지은의 저런 미소를 보는 것이 얼마만인지 생각조차 나지 않았으니까.

'누군가가 보면 사서 고생을 한다고 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본인이 저렇게 만족하고 있는데. 그거면 된 거야.'

물론 잃었던 미소를 되찾은 것은 비단 지은뿐만은 아니었다. 기적 또한 그녀와 헤어진 이후 잃었던 미소를 되찾았다.

일순 문이 열리며 들어오는 사람을 본 기적이 밝은 미소를 지었다.

"점심 먹고 왔어요?"

그러자 안으로 들어선 수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역 앞에 샌드위치 전문점 가서 먹었어요. 이거는 실장님 점심. 올리브랑 할라피뇨 빼고 만들었으니까 안심하고 드세요."

자신을 세심하게 챙겨 주는 새로운 연인 수정이 있었으니까.

기적은 밝게 웃으며 샌드위치를 전달받았다. 그리고는 포장지를 풀어 늦은 점심 식사를 시작했다.

맛있게 샌드위치를 베어 무는 기적의 옆자리에 수정이 털썩 주저앉았다. 함께 사 온 탄산음료를 내밀며 그녀가 말했다.

"이야기는 잘됐어요?"

볼이 빵빵해지도록 빨대를 빨아들인 기적이 이에 답했다.

"그럭저럭? 남은 건 내가 치료 잘해서 모든 걸 해피엔딩으로 끝내는 것뿐."

"자신 있어요?"

"최선을 다해 봐야죠. 예전에 제가 치료했던 성우 있죠? 그 휠체어 농구 대회에 나갔던. 그 친구하고 증상이 거의 비슷해요. 레벨도 같고, 아시아 스케일도 같고. 이번 기회에 내가 치료사로서 얼마나 성장했을지 확인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요."

고개를 끄덕인 수정이 주먹을 쥐어 보이며 말했다.

"오빠는 잘할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오빠가 아니면 누구도 해내지 못할 거예요. 그러니까 파이팅해요!"

담담한 응원의 메시지. 그 메시지 앞에서 기적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람은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말, 오늘 그 말을 여러 차례 실감하는 기적이었다.

기적의 치료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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