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
사라진 시스템 (6)
기적은 어떻게 시간이 흘러가는지도 모르게 치료 시간을 보냈다. 평소와 다르게 땀이 흘러내렸고, 긴장을 해서인지 손끝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기본 중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룸브리칼 그립조차도 잊어버린 것이다.
자연히 회원으로부터 불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선생님, 오늘은 어깨가 조금 아프네요. 너무 꽉 잡으시는 것 같은데…… 하하."
"오늘 뭔가 시원하지가 않네요. 기분 탓인가?"
대놓고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평소와 뭔가 다르다는 사실을 느낀 것이었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 역시 기적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실장님, 왜 이렇게 땀을 흘리세요? 어디 아프신 거 아니에요?"
"그러게요. 몸이 안 좋으신가 봐요. 하루 쉬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기적은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몸에 이상이 있는 거라면 좋았을 거다.
하지만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갑자기 사라진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감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시스템 없는 나는 결국 이거 밖에 안 되는 거였나? 그 모든 게 다 신기루였어?'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괴로웠다. 그동안 이뤄 낸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진 것 같았다.
시스템이 없이는 겨우 이 정도였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너무나 괴로웠다.
마치 힐링 센터를 처음 열고 파리가 날렸을 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흐음…….'
기적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할 때였다. 정말 운명의 장난처럼 센터의 문이 열리며 햇빛이 기적의 얼굴에 드리웠다.
그리고 그 뒤로 2남 2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휠체어에 탄 남자 1명과 그 뒤에 선 3명, 바로 명석한과 차지은, 명의진, 김귀연이었다. 그 4명이 햇빛을 등진 채 센터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회원 등록 상담 받으러 왔습니다."
명의진의 말에 기적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정을 비롯한 직원들이 밥이나 먹으러 가자는 말을 주고받으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 덕분에 기적은 네 사람과 홀로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필사적으로 기적을 외면하고 있는 명석한에게 슬쩍 시선을 던진 기적이 명의진을 향해 인사했다.
"원장님 오셨습니까? 그런데 이쪽 분은……."
기적의 시선이 김귀연을 향해 있다는 것을 눈치챈 명의진이 가볍게 그녀를 소개해 주었다.
"어…… 석한이 할머니……."
기적은 명석한의 할머니가 누구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아, 이사장님이셨군요? 안녕하세요? 이기적이라고 합니다. 예전에 명성 병원에서 일했었습니다."
"그래요."
나무랄 데 없는 깍듯한 인사에도 김귀연의 태도는 냉랭하기만 했다.
아쉬운 입장이기에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았지, 그게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판을 뒤집고 센터를 뛰쳐나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장모님이…… 직접 센터를 좀 보고 싶다고 하셔서 같이 오게 됐어요. 괜찮죠?"
"네, 네. 물론입니다. 일단 이쪽으로 좀 앉으세요. 앉아서 이야기해요."
자리를 옮겨서 본격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저번에 여기에 다녀가고…… 너무 오랜만의 방문이지? 석한이가 마음을 다잡는 데 시간이 좀 걸려서. 석한이가 자네한테 오죽 잘못했나? 그러니 마음을 잡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허허."
그렇게 말하는 명의진의 표정은 의연했다.
평소의 젠틀한 미소 또한 여전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속까지 의연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내심은 기적에 대한 미안함, 면목 없는 마음 등으로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다.
"고맙게도 이 실장님이 석한이의 치료를 맡아 주겠다고 하니 우리 입장에서는 정말 고마울 뿐입니다. 어떻게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할지……."
명의진이 기적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러나 기적은 아무런 말이 없이 침묵을 고수할 뿐이었다.
분명 자신이 명석한의 치료를 맡겠다고 말했다. 그때는 누가 되지 않으리라는 자신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시스템이 없어진 자신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였는지 오전의 치료를 통해 느낀 탓이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말을 무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네…… 그런데 정말 저한테 괜찮을까요? 치료라는 게 환자와 치료사의 케미가 정말 중요한데……."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석한이가 몇 번이고 다짐했으니까. 이 실장 말 잘 듣겠다고. 그렇죠, 지은 씨?"
처음으로 지은이 입을 열었다.
"네, 약속받았어요. 예전의 석한 오빠가 아니에요. 이제 정말 달라졌어요. 실장님도 치료하다 보면 확실히 느낄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기적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보다 못한 김귀연이 나섰다.
"가만히 보니 영 치료하기 싫은 표정인데. 내가 제대로 본 건가?"
자존심이 상한 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한 것이다. 한숨을 내쉰 명의진이 그런 김귀연을 제지했다.
"장모님, 그냥 가만히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잖습니까? 실장님 입장에서는 당연히 쉬운 결정이 아닐 겁니다. 결정하는 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요."
"아니, 이 사람아? 얼마든지 치료하겠다고 저 아가씨가 확답받았다고 하지 않았나? 이제 와서 말이 다르니까 그런 것 아닌가?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입이 있는데 마음대로 말도 못 하나?"
"말씀하시는 거는 자유지만 그래도 때와 장소를 가리셔야죠. 실례입니다, 실례."
그러나 폭주한 김귀연은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명의진의 말을 무시한 김귀연이 기적을 향해 물었다.
"자네가 말해 보게. 치료할 텐가 안 할 텐가? 사람 애태우지 말고 속 시원하게 말해 보란 말이야."
명의진은 수습하기에 바빴다.
"이 실장님, 어머님이 마음이 급해서 그럽니다. 이해하세요. 손자의 일이니 마음이 오죽 급하겠습니까?"
"자네는 대체 누구 편인가? 지금 나를 나무라는 겐가?"
"왜 자꾸 삐딱하게 받아 들이십니까? 지금 누굴 나무라자고 이러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두 사람의 언성이 조금씩 높아질 때였다. 찰나의 틈을 뚫고 명석한이 입을 열었다. 주먹을 꽉 움켜쥔 그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할머니, 아버지, 그만하세요. 제 일인데 왜 두 분이서 그럽니까? 어차피 이건 당사자인 명석한과 이기적이 해결해야할 문제예요."
당사자인 명석한의 목소리 앞에서 두 사람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차분한 명석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세 사람 자리 좀 비켜 주시겠어요? 둘이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명의진이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차지은도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던 김귀연도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만 남은 자리에서 석한이 기적을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할머니가 내 걱정이 많아서 그렇다. 네가 안 한다고 할까 봐 겁이 나서 그러시는 거야."
기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해한다. 나라도 그랬을 거야. 하지만……."
잘 해낼 자신이 없다. 기적이 그렇게 말하려 했을 때였다. 석한이 그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솔직히 말할게. 내가 너한테 몹쓸 짓 많이 했다는 거 나도 알고 있다. 지금 너한테 이런 말한다는 게 스스로 생각해도 부끄러울 정도로. 하지만 하나만 알아줘라. 나 지금 정말 절실하다. 다시 한번만 이 두 발로 땅을 디뎌 보고 싶어. 그럴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는 심정이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너를 찾아왔는지 이해할 수 있겠어?"
그 말 앞에서 기적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명석한이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자신을 찾아왔는지. 이 순간 명석한이 자신을 마주보기 위해 얼마나 큰 용기를 내고 있는지 말이다.
기적이 뭐라 답해야 좋을까 생각을 정리할 때였다. 명석한이 자신의 푸석한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너 얼굴 엄청 좋아졌다. 솔직히 부러울 정도야."
그 순간, 기적은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시스템이 사라졌지만 매직 페이스의 효과는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 내 얼굴이 그대로라고? 그렇다는 건 매직 페이스의 효과는 그대로라는 건가? 시스템이 사라지면서 능력도 함께 사라진 게 아니었어? 능력은 그대로 남아 있는 거였어? 그러면 오전 내내 느꼈던 위화감은 뭐지?'
그는 스스로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그 해답을 찾아냈다.
'이게 단순히 심리적인 문제였다고? 능력이 사라졌다는 생각에 스스로 움츠러들었던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비로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시스템이 사라졌지만 머릿속에 그간 쌓아 온 지식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시스템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자신에게는 환자의 상태를 살필 수 있는 두 눈이 남아 있었다.
시스템이 사라졌지만 자신의 악력과 손끝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진 것은 눈에 보이는 시스템 창뿐이었다.
변한 것은 딱 그것뿐이었다.
기적이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석한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너에게 열등감을 품었던 거야. 지은이가 내가 아닌 너를 선택한 그 순간부터 쭈욱. 이렇게 생각했어. 너에게 지은이를 빼앗아 와야만 상처받은 내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다고. 그래서 열심히 공부했고 전문의가 되었어. 지은이가 마음을 받아 주었고. 스스로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지. 문서로 기록되는 스펙에 취해 있었던 거야."
명석한은 침을 꿀꺽 삼킨 뒤 말을 이었다.
"그러다 너와 같은 병원에서 만나게 된 거야. 솔직히 좋았어. 너는 내 밑이라고 각인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이상하더라. 사람들이 의사인 나보다 물리치료사인 너에게 점수를 높게 주는 거야. 그때 우수사원상 받을 당시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 나는 그날 완전히 열폭하고 말았지. 그래서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기도 했고. 그때는 정말 몰랐어. 사람들이 왜 내가 아닌 너에게 열광하는지를."
기적이 짧게 물었다.
"그래서 지금은?"
석한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알게 됐지. 모든 것을 잃고 나니까 비로소 보이더라.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스펙이 아니라는 게. 제아무리 잘났어도 진실한 마음이 없이는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야."
명석한은 여과 없이 자신의 진심을 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적의 상처받은 마음은 그 진심 앞에서 급속도로 아물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게 쉽지만은 않았어. 꼴에 자존심이 남아서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 하지만 지은이 덕분에 이렇게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다시 일어나서…… 두 발로 서서 꼭 해야 하는 말이 있거든. 염치없지만 이렇게 부탁한다. 고장 난 내 몸과 삐뚤어진 내 마음을 네가 고쳐 줬으면 좋겠다."
잠시의 시간 차를 두고 기적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