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
사라진 시스템 (3)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기적은 이동하는 내내 손성희에게 시달림을 당했다.
"그러지 말고 한번 대시해 봐. 용기 있는 남자가 미인을 차지한다는 말도 모르니?"
"길거리 나가서 봐 봐. 저런 아가씨가 또 있나! 너 후회한다?"
참다못한 기적은 결국 사실을 털어놓았다.
"사실은 우리 이미 만나고 있어."
"에? 그게 무슨 말이니?"
손성희가 일순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기적은 분명한 어조로 다시 한번 말했다.
"나랑 수정 샘이랑 벌써 만나고 있다고. 그러니까 그만 좀 해."
손성희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상황을 이해하기까지 조금은 시간이 필요한 듯싶었다. 다행히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게 정말이니? 그런데 아까는 왜 말 안 했어?"
"수정 샘한테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하잖아. 그 사람 의사도 확인해야지. 내가 일방적으로 털어놓으면 수정 샘도 당혹스러울 거 아니야. 가뜩이나 갑자기 찾아왔는데!"
"호호호, 그건 그러네. 우리가 너무 갑자기 찾아왔어. 잘했다, 잘했어. 역시 우리 아들, 엄마 닮아서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하다니까?"
한숨을 내쉰 기적이 말을 이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지금은 그냥 모르는 척해 줘. 우리 이제 만나기 시작했어."
"그래그래. 알았다, 알았어."
그렇게 대답하는 손성희의 얼굴은 이전과는 180도 달라져 있었다.
이전까지의 그녀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면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애틋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앞좌석에 앉은 기적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그녀가 말했다.
"엄마는 너무 좋다. 우리 아들이 이렇게 성공해서. 이제 엄마는 소원이 없어."
"우리 엄마가 좋다니 나도 뿌듯하네. 그런데 나 아직 갈 길이 멀어."
손성희가 재차 물었다.
"아직도 갈 길이 멀어? 우리 아들 꿈은 뭔데?"
"내 꿈?"
뭔가를 생각해 본 기적이 말을 이었다.
"물리치료과가 하나의 정식 의학과로 인정 및 물리치료사 단독 개원. 그래서 내 이름으로 병원 하나 세우는 것."
모든 물리치료사들의 꿈인 단독 개원, 기적 역시 그 꿈을 꾸고 있었다.
창밖만 바라보고 있던 이성진이 둘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물리치료사 단독 개원? 그게 가능한 일이냐? 물론 실력 좋은 물리치료사들도 있겠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물리치료사들도 많지 않으냐? 너무 위험한 발상 같은데?"
기적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하고 싶지만 이성진의 말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물리치료사 단독 개원이 공론화될 때마다 매번 높은 벽에 부딪히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건 그렇죠. 그러니까 모든 물리치료사들에게 개원의 문을 열어 주는 것은 저도 반대예요. 대신에 시험을 하나 더 만드는 거예요. 일정 이상 임상 경험을 쌓은 물리치료사들만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거죠. 의사들이 인턴, 레지던트 코스를 밟는 것처럼요. 그리고 그 다음 시험을 합격해야만 단독 개원을 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는 거예요. 그렇게 한다면 사람들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성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다면야 납득은 간다만…… 아마 쉽지는 않을 거야. 물리치료사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그렇고…… 무엇보다 의사 협회에서 가만히 있겠느냐?"
"그건 그렇죠. 그러니까 꿈인 거죠. 쉬우면 그게 꿈이겠어요?"
"으음……."
이성진이 신음성을 내뱉을 때였다. 무엇을 봤는지 손성희가 일순 목소리를 높였다.
"와, 여기가 네 아파트니? 아파트 진짜 좋구나? 하나, 둘, 셋…… 이게 다 몇 층이야?"
손성희가 손가락을 움직여 높이를 가늠하며 말했다. 기적은 지하 주차장을 향해 핸들을 돌리며 대답했다.
"최고 63층인가 그래요."
"와! 높구나. 아들 집이 35층이랬나?"
"네, 35층요."
그렇게 손성희가 이것저것 캐묻는 사이 기적은 주차를 끝마쳤다.
세 사람은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에 올랐고, 이내 기적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잠시 조용해졌던 손성희가 다시 열을 올리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와! 집 좋다. 바닥 원목이네?"
"이거는 뭐니? 엘리베이터? 이걸 누르면 엘리베이터가 호출된다고?"
"여기는 뭐야? 쓰레기 버리는 곳? 여기다 쓰레기를 버리면 끝이야? 음식물 쓰레기도?"
"냉장고는 어디에 있어? 음식 가져온 것 좀 넣어 놓자."
기적은 손성희의 말에 대답하는 사이사이 이성진과의 대화를 진행했다.
"아버지 요즘 발가락 아프시다면서요? 다치셨어요?"
"뭐? 아니다. 예전에 다친 건데 걱정할 정도는 아니니까 너는 신경 쓰지 마라."
"에이, 그래도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오는 내내 다리를 절뚝거리시던데. 제가 한번 봐 드릴게요. 제가 한번 치료해 드리면 통증이 싹 가신다니까요?"
"어허, 괜찮대도 그러네."
기적이 억지로 양말을 벗기려고 하자 이성진이 뒤로 물러서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이성진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는 기적은 포기하지 않고 양말을 벗겨 내려 했다.
"나 무슨 감염자 아니거든요? 내가 만져도 전염병 같은 거 안 걸리거든요?"
"허! 거참, 나는 괜찮다니까 자꾸 그러네……."
그리고 그 결과 이성진은 못 이기는 척 발을 내주었다.
곧 양말이 벗겨졌고, 기적은 이성진의 맨발을 볼 수 있었다. 그때였다.
-퀘스트 [아버지의 발]이 주어집니다.
-목표 : 아버지의 증상을 밝혀내고 통증 수치를 역치(20) 이하로 내리세요. (현재 통증 수치 75)
-보상 : 아버지의 건강, 대량의 포인트, 홀로 설 수 있는 기회.
새로운 퀘스트가 떠올랐다.
항상 반가운 퀘스트였지만 이번만큼은 그렇지 못했다. 퀘스트를 확인하는 기적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퀘스트까지 떠올랐다는 건 아버지 발에 진짜 문제가 있다는 걸 텐데…….'
퀘스트까지 떠오른 것을 보면 아버지의 증상이 결코 가볍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기적은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이성진의 발을 살폈다. 그 진지한 표정 때문이었을까?
이성진도 더는 발을 빼지 않고 순순히 발을 내밀었다.
발가락을 살피던 기적이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묘하게 변형을 일으킨 엄지발가락을 본 직후다.
"아버지, 이거 예전에 다쳐서 발가락이 이렇게 변형된 거예요?"
"그렇지. 예전에 다쳤는데 병원을 못 가는 바람에 이렇게 굳어 버렸어."
"최근에 특별히 다친 적은 없고요?"
"다친 적은 없다."
문진은 여기까지.
질문을 마친 기적은 손을 뻗어 촉진을 시작했다.
원하는 정보를 얻었으니 이제는 직접 만져 원인을 찾아낼 때였다.
탁탁탁탁!
음식을 준비하는 손성희의 경쾌한 도마 소리를 들으며 기적은 치료를 진행해 나갔다.
완전히 집중한 기적의 뇌리로 예의 실체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종이 있는데? 그 원인이 과연 예전의 부상 때문일까? 아닌 것 같은데? 몇십 년 전에 다친 부상이 왜 갑자기 지금에 와서?
-더구나 지금은 겨울이라 농한기잖아. 많이 휴식을 하셨을 텐데…… 갑자기 이제 와서 도졌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
-다른 측면에서 접근해 보자. 엄지발가락이 아픈 증상이 뭐가 있을까?
그 질문을 듣는 순간 기적은 머리에서 번개가 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엄지발가락이 아픈 증상…… 그것도 발가락 내측 부위. 그리고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시지. 음식을 짜게 드시고. 그렇다면…… 이건 통풍이 아닐까?'
통풍이란 잘못된 식습관과 음주 등의 여러 요인으로 인해 체내의 요산 수치가 높아져 사지말단부에 염증이 쌓이고 이로 인해 통증을 발생시키는 증상이다.
기적은 이성진의 증상과 생활패턴이 딱 통풍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표정이 절로 심각해졌다.
'통풍은 바람만 스쳐도 아프다고 할 만큼 통증이 엄청난 질환인데…… 아버지는 이걸 참고 계셨던 걸까?'
기적이 유도신문을 했다.
"아버지, 많이 아프셨을 텐데 왜 병원 안 가셨어요?"
이성진은 뜨끔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표정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무, 무슨…… 이까짓 걸로 병원 가면 매일 병원 가서 살아야 한다."
"이까짓 거요? 엄청 아팠을 텐데…… 내일 당장 병원 가 봐요."
둘의 언성이 높아지자 음식을 준비하던 손성희가 쪼르르 달려왔다.
"기적아, 왜 그러니? 아버지 많이 안 좋으니?"
기적은 힐끔 이성진을 바라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통풍 같아요. 이거 엄청 아프거든요. 아니, 아픈 게 문제가 아니라 방치하면 발가락 절단할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내일 병원에 꼭 가셔야 해요."
기적은 이성진이 고집을 부릴 것 같아 일부러 엄포를 놓았다. 그것이 효과를 발휘한 것일까?
이성진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무슨 병원을 가느냐며 언성을 높이던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침묵이 곧, 긍정이라는 것이었다.
기적은 두 사람에게 말을 전했다.
"내일 아침 출근하기 전에 제가 병원에 모셔다 드릴게요. 통풍 의심된다고 검사받고 싶다고 하면 바로 검사해 줄 거예요. 간단한 검사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검사 결과 나오면 저한테 문자 한 통 주세요. 통풍 치료하려면 저도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어서요."
"그래, 알았다."
세 사람의 대화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끊어졌다.
간단히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은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고, 다음 날 아침 다시 얼굴을 마주했다.
"일어나셨어요? 빨리 준비하고 나오세요. 알아보니까 그리 멀지 않아서 제가 접수까지 해 드리고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알았다."
기적은 밤새 검색해서 알아낸 류마티스 전문의가 있는 내과로 차를 몰았다. 그리고 병원으로 들어가 데스크에서 접수를 했다.
"저희 아버지가 통풍 증상이 있으신 것 같아서요. 통풍 검사를 좀 받아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아, 그러세요? 저희 병원 처음이시죠? 여기에 성함이랑 주민등록번호, 연락처 좀 적어 주세요."
이성진은 말없이 다가와 빈칸을 채워 넣었다.
그렇게 접수가 마감되었고, 시간을 확인한 기적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
"저 그러면 먼저 가 볼 테니 검사 잘 받고 오세요. 결과 나오면 바로 연락 주시고요. 집에 갈 때는 택시 타고 가세요. 괜히 돈 아낀다고 걸어가거나 버스 타고 가지 마시고. 알았죠?"
이성진이 인상을 쓰며 그 말을 받았다.
"이놈아, 너는 네 아빠가 애로 보이냐? 알아서 잘할 테니까 빨리 가 버려라. 귀에 인이 박히겠다."
"걱정되니까 그렇죠. 그럼 저 먼저 가 볼게요."
멋쩍게 웃은 기적이 이내 병원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손성희가 이성진을 향해 말했다.
"우리 기적이 많이 컸죠? 마냥 애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우리를 챙기고 있잖아요."
"저놈이야 원래 컸지. 저놈 큰 게 하루 이틀이야? 고등학교 때 이미 180이었는데!"
"에이, 이 양반이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거 다 알면서 왜 이러실까?"
"이 사람아! 쓸데없는 소리 말아."
엄포를 놓은 이성진이 홧김에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때마침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성진 님,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마침 차례가 돌아온 것이었다. 덕분에 이성진은 다시 자리에 앉을 필요 없이 곧장 진료실로 향할 수 있었다.
'거 사람 참, 물으나 마나 한 질문을 하고 있어. 당연히 많이 컸지.'
기적을 떠올린 이성진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