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
사라진 시스템 (2)
결국 기적은 두 사람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우연히 나갔다가 사람이 심장마비로 쓰러진 것을 발견했고, 이를 도와주고 왔다고 말한 것이다.
"에이, 말도 안 돼요!"
"진짜 그건 말도 안 돼요!"
처음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기적의 말을 말도 안 되는 소리 정도로 치부해 버렸다.
무리도 아니었다. 분명 기적이 겪은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으니까.
"아니 진짜라니까요?"
하지만 정오 뉴스에 모자이크된 기적의 모습을 보고 난 후에는.
"봐요! 저거 나잖아요? 옷 입고 있잖아. 힐링 센터! 저거 우리 유니폼이잖아요."
"어? 정말이네. 진짜 말도 안 돼!"
입장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CCTV 속 모자이크된 남자는 누가 봐도 눈앞의 남자 기적이었으니까. 그의 말이 증명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했던 것일까? 저녁 시간, 다 같이 모여 식사를 하고 있는데, 기적의 말에 쐐기를 박아 줄 사람들이 찾아왔다. 가족으로 보이는 2남 1녀였다.
"지금 저녁 시간인데 어떻게 오셨어요?"
"저기…… 혹시 여기……."
유진의 말에 여자가 말끝을 흐릴 때였다. 옆에 있던 남자아이가 손가락을 뻗으며 말했다.
"저기! 저 형이야!"
먼저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들고 나오던 기적이 목소리의 주인공을 발견하고는 어? 하고 한달음에 걸어왔다.
"어? 벌써 퇴원하셨어요? 몸은 괜찮으세요?"
여자의 정체는 바로 아침에 기적이 심폐소생술을 실시했던 여자였다.
남자아이는 옆에서 울고 있던 아이였고. 그리고 그 옆의 남자는 아마…… 남편인 듯싶었다.
여자가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몸 괜찮습니다. 병원에서 이상 없다고, 퇴원해도 좋다고 했습니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남자도 마찬가지로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아내를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평생 갚지 못할 도움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보상을 해 드려야 할지……."
기적은 빙그레 웃으며 마주 허리를 숙였다.
"천만의 말씀을…… 제가 아니라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아니…… 그래도……."
"보시다시피 제가 하는 일이 몸이 불편한 사람들 도와드리는 일입니다. 어머님도 앞으로 잘 살아가시면 그게 저한테는 보상입니다. 아니면 저한테 돈이라도 주시려고요? 흐흐, 뭐 얼마나 주시려고요?"
기적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남자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허허허, 세상에 선생님 같은 분이 다 있네요. 그래도 밥 한 끼 정도는 대접하게 해 주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집사람 생명의 은인이신데…… 식사 정도는 대접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진짜 안 그러셔도 되는데…… 그렇다고 하시니까."
남자는 혹시라도 거절할까 서둘러 살을 붙였다.
"괜히 시간 뺏으면 죄송하니까 저녁 시간에, 이 근처에서 여기 분들 다 모시고 식사 대접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될까요?"
기적은 슬쩍 사람들을 바라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러셔도 되는데…… 그게 마음이 편하시다니까……. 염치 불고하고 얻어먹도록 하겠습니다."
"아…… 정말 다행입니다."
몇 번이나 더 감사의 인사를 전한 부부는 기적의 연락처를 얻은 뒤에야 센터를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던 수정이 돌연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기적이 그런 그녀에게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그러자 수정이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분위기가 너무 성스러워서요. 저는 무슨 성자인 줄 알았잖아요."
진욱이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니까요. 제가 아니라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거라는 장면에서는 와~ 진짜 눈이 부셔서 눈을 뜰 수가 없더라니까요."
유진도 빠질 수 없었다.
"으으으, 진욱 선생님은 그 장면이었어요? 저는 앞으로 건강하게 살아가시는 게 보상이라는 부분이었는데. 포인트가 조금 다르네요?"
기적이 민망한 얼굴로 항변했다.
"선생님들 왜 놀리고 그래요?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럼 그 상황에서 내가 큰일 했으니까 막 보상으로 돈 달라고 해요? 그럴 수는 없잖아!"
그러나 그 목소리는 세 사람의 합창 앞에서 급격히 기세를 잃고 말았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교회에서나 들릴 법한 찬송가는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 * *
다음 날.
출근 준비를 하던 기적은 반가운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스마트폰 액정에 엄마라는 발신자명이 찍혀 있었다.
"엄마! 어쩐 일이세요? 아침부터?"
그러자 수화기 너머로 조금은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어, 잘 지내고 있지? 아침은 먹었고?
일상적인 말을 늘어놓았지만 기적은 엄마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 있어요? 목소리가 조금 그러네?"
-어어. 사실은…… 네 아빠가 몸이 조금 아픈 것 같아서…….
"아빠가요? 어디가?"
-어제 하우스에 가는데 다리를 절뚝거리더라고…… 그래서 내가 발 왜 그러냐고 그랬더니 예전에 어렸을 때 엄지발가락을 다쳤는데, 그게 도진 것 같다고 하더라고. 별일 아니라고는 하는데…… 벌써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계속 절뚝거리는 것 같아서…….
"발가락? 아빠가 예전에 발가락을 다쳤었나?"
-어렸을 때라 내가 알 수가 있나. 본인이 그렇다니까 그런가 보다 한 거지.
기적의 표정이 걱정스럽게 변했다. 어느 정도였기에 엄마가 전화까지 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병원은 가 봤고? 병원부터 가 봐야지."
-네 아빠가 어디 병원 갈 사람이니? 가자고, 가자고 해도 안 간다고, 안 간다고, 하니까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있어야지. 그 놈의 똥고집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번에 완전히 질려 버렸다.
기적은 음~ 하고 염두를 굴리다 이내 말했다.
"엄마, 그러지 말고 아빠랑 오늘 저희 집으로 오세요. 요즘 겨울이라 바쁘지 않잖아? 제가 한번 봐 드릴게요. 병원에는 안 가신다 해도 아들이 좀 봐 준다는데 싫다고 하시지는 않겠지."
손성희의 목소리가 단번에 밝아졌다.
-그래? 갑자기 그래도 될까?
"되고말고요. 아들 집에 오는데 뭐가 갑자기야. 그리고 그런 증상은 조기에 봐야 돼. 시간 끌어서 좋을 것 없어요."
-그래그래. 그러면 네 아빠랑 얘기해 보고 이따 연락해 줄게. 좀만 기다리고 있어라?
"네. 이따가 연락 주세요."
전화를 끊은 기적은 곧장 출근을 했고, 예약된 회원들을 치료하며 연락을 기다렸다.
기다리던 연락이 도착한 것은 점심 무렵이었다. 스마트 워치를 통해 메시지를 확인하니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따 저녁에 올라가기로 했다. 네가 이사도 했으니 집도 보고 먹을 것도 좀 넣어 주자고 간신히 설득했다. 퇴근 시간 맞춰서 가서 하루 자고 갈 테니까 이따가 보자.
혹시 일을 하는 중일까 싶어 전화 대신 메시지를 넣은 모양이었다. 기적은 이따 보자고 답장을 넣은 뒤, 다시 일과를 이어 나갔다.
한 명 한 명.
찾아온 사람들을 정성껏 치료하다 보니 어느덧 시간은 퇴근할 시간에 다다라 있었다.
"오늘도 고생 많았어요. 얼른 정리 끝내고 퇴근합시다."
그렇게 퇴근 준비를 하는 시점, 힐링 센터로 2명의 손님이 찾아들었다.
"아들, 우리 왔어."
바로 이성진과 손성희였다. 둘을 발견한 기적이 얼른 뛰쳐나갔다.
"어? 어떻게 이리로 왔어? 나는 집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그러려고 했는데. 지금 우리 차가 고장 나서 지하철로 오느라고…… 짐이 많은데 아파트까지 갈 수가 있나."
"아이고, 잘하셨어요. 아빠, 짐 이리 주세요. 이 무거운 걸 어떻게 들고 오셨대?"
그러나 이성진은 짐만 내밀었을 뿐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여전한 모습에 기적이 피식 웃을 때였다. 두 사람을 발견한 수정과 진욱, 유진이 그쪽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어머님. 기적 실장님이랑 같이 일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아, 네, 반가워요. 우리 기적이랑 같이 일하시는 분들이라고요?"
손성희가 눈을 반짝 빛내며 인사를 받았다.
기적은 그 모습을 보며 어쩐지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에도 엄마의 저런 표정을 본 적이 있었다.
바로 전 여자 친구인 차지은을 처음 인사시킨 날이었다.
"기적 실장님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이야기 들었던 그 모습 그대로시네요."
"아…… 기적이가 아가씨한테 우리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호호호. 그건 몰랐네? 그런데 이상하네. 우리 기적이가 아무한테나 가족 이야기를 하는 애가 아닐 텐데……."
손성희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꼬리를 흐렸다.
세상 무관심하던 이성진 또한 힐끔힐끔 수정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엄마,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아빠랑 저쪽 가서 앉아 계세요. 우리 빨리 퇴근 준비해야해."
"어머, 그런가? 미안해요."
손성희와 이성진은 미안하다는 인사와 함께 구석진 곳으로 가 앉았다.
하지만 자리를 피했을 뿐 그들의 시선은 여전히 수정을 향해 있었다.
그 사실을 발견한 기적이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엄마! 아빠! 뭘 그렇게 보세요? 사람 민망하게."
손성희가 쉬쉬하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름이 정수정이라고? 성격도 아주 밝은 것 같고, 키도 크고, 얼굴도 엄청 예쁘고……. 저런 며느리 보면 엄마는 소원이 없겠다. 여보, 그렇지 않아요?"
기적은 아버지가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고 핀잔을 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성진은 기적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대답을 했다.
"그래. 그러면 좋겠네."
그 덕분에 손성희는 더욱 기세를 타 버렸다.
"저렇게 괜찮은 아가씨가 옆에 있는데 우리 아들은 뭐 하고 있을까?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저 아가씨랑 잘 좀 해 봐. 응?"
"그게 아니라……."
기적은 순간 수정과의 관계를 털어놓을까 하다 이내 입을 다물어 버렸다.
지금도 이 정도로 관심을 보이는데 사귀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얼마나 집요하게 굴까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그게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가 보기에는 저 아가씨도 너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은데? 엄마 눈에는 TV에 나오는 여자들보다 저 아가씨가 훨씬 예쁘다. 그냥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사람이 순수해 보이잖아. 알지? 엄마가 사람은 제대로 본다는 거."
그렇게 말한 손성희가 슬쩍 이성진을 돌아본 뒤 한마디 덧붙였다.
"물론 딱 한 번 실패하기는 했는데…… 그 한 번이 치명적이었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펀치에 얻어맞은 이성진이 버럭 성을 냈다.
"뭐가 어쩌고 어째? 내가 뭐!"
그 목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퇴근 준비를 하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이쪽을 쳐다보았다.
어쩐지 골치가 아파진 기적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