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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물리치료사-164화 (164/205)

# 164

사라진 시스템 (1)

"유진 샘, 어땠어요?"

목요일 아침. 유진이 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기적이 질문을 던졌다. 유진이 어색한 표정으로 그 질문에 답했다.

"모르겠어요. 그런데 왜 그분이라고 말 안 해 주셨어요?"

지난 주, 기적은 유진에게 소개팅을 제안했다.

주변에 괜찮은 사람이 있으니 한번 만나 보라고 말이다. 유진은 고민 끝에 소개팅을 하겠다고 했고, 그 결과 지난 수요일 고지식과 소개팅 자리에서 만난 것이었다.

"그건…… 아무래도 괜히 알고 나가면 선입견이 생길 것 같아서요."

"그래요? 흐음…… 아직 모르겠어요. 일단 세 번은 만나 보려고요. 제가 삼세번이라는 말을 좋아해서. 뭐 그쪽에서도 세 번 만나자고 할지 모르겠지만……."

기적은 어젯밤의 통화로 지식이 공유진을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혼잣말로 뇌까렸다.

'부디 그 결과가 삼진 아웃이 아니기를…….'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

사람의 인연이란 인력으로 어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적은 잘되길 비는 것을 끝으로 화제를 전환시켰다.

"그나저나 오늘 날씨 좋네요. 스마트폰에는 아직도 눈 예보가 있는데 하늘은 맑기만 하네요. 이거 업데이트 안 하나?"

창문 밖으로 하늘을 바라본 유진이 큭큭 웃었다.

"저도 우산 가지고 왔는데…… 하늘 엄청 맑아서 그냥 놓고 왔잖아요. 기상청 예보는 그냥 참고만 하는 걸로……."

바로 그때 환복을 마치고 나온 수정이 고개를 저었다.

"기상청 예보는 참고도 하면 안 돼요. 차라리 옛날에 우리 할머니가 무릎이나 허리가 아프다며 눈비 올 거라고 하면 그게 더 정확했어."

"흐흐, 맞아요. 민간요법? 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괜히 나온 게 아니더라고요."

"아무튼 뭐. 눈 안 와서 다행이네요. 예전에는 눈 오는 게 좋았는데 요즘에는 눈 오면 겁부터 나더라고요. 길도 얼어붙고, 행여나 사고날까 봐."

기적의 말에 수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게 바로 나이 들었다는 증거예요. 그게 다 서른 넘어서 그래요."

"하? 수정 샘도 이제 이십 대 꺾이면 서른 금방이에요. 에이, 열받는데 나가서 바람이나 쐬고 와야겠다."

기적이 살짝 눈치를 보며 밖으로 나가려는 액션을 취해 보였다.

하지만 두 여자는 그저 바라만 볼뿐 그를 말리지 않았고, 기적은 예정에 없던 외출을 감행했다.

"아흐, 춥다! 완전 칼바람이네."

급히 나오느라 실내복 차림을 한 기적이 몸을 파고드는 칼바람에 팔을 웅크릴 때였다.

일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어떻게 해!"

"누가 좀 도와주세욧!"

"누구 사람 없어요? 사람이 쓰러졌어요!"

기적은 저도 모르게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오른쪽 코너를 도는 순간 기적은 볼 수 있었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사람과,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누가 좀 도와주세요. 우리 엄마가 쓰러졌어요."

이제 막 초등학교 3, 4학년 되었을까 싶은 남자아이가 엄마를 부여잡고 울고 불며 소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지켜보기만 할 뿐 좀처럼 앞으로 나설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기적의 귓전으로 사람들의 쉬쉬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히 나섰다가 나 때문에 잘못되면 어떻게 해?"

"엄청 강하게 눌러야 한대. 갈비뼈가 부러지는 사람도 많다던데…… 괜히 건드렸다가 큰일 나는 거 아냐?"

"그냥 갈 길 가자…… 괜히 여자 가슴 잘못 만졌다가 성추행범으로 몰린다니까?"

기적은 들려오는 이야기에 혀를 찼다. 더구나 성추행 이야기가 나올 때는 주먹을 꽉 움켜쥐기도 했다.

저 바보 같은 남자는 착한 사마리아인법도 모른다는 말인가?

기적은 튕기듯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여자의 답답한 옷가지들을 풀어 주며 말했다.

"대학 다닐 때 교양 과목으로 응급치료 자격증을 취득했고, 현재 물리치료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혹시 주변에 의사분이나 간호사분이 계시다면 도와주세요!"

그러나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할 뿐 앞으로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모습을 슬쩍 확인한 기적이 말을 이었다.

"거기 노란 옷 입으신 분 119 신고해 주세요. 그리고…… 거기 검은색 트레이닝복 입으신 분 빨리 양재역으로 가셔서 제세동기 가져오세요."

일부러 옷차림까지 지목해 가며 말한 것은 확실히 대상을 지정해 주기 위함이었다.

모두를 향해 말했다면 지금처럼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테니까.

벌써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기적은 교양 시간에 배웠던 응급 상황 행동 요령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이 효과를 발휘했다.

노란 옷을 입은 여자는 서둘러 전화기를 들었고, 검은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사람은 서둘러 지하철역을 향해 달려갔다.

이 중에서 가장 빠를 것 같다는 기적의 생각대로 수준급의 달리기 속도였다.

기적도 재빨리 할 일을 시작했다. 고개를 살짝 들어 기도를 확보한 기적은 그대로 CPR을 시작했다.

"훅! 훅! 훅! 훅! 훅!"

기적은 속으로 숫자를 세며 흉부 압박을 시도했다. 인공호흡 같은 건 하지 않았다.

2017년 한국 심폐 소생 협회의 보고에 따르면 인공호흡은 하면 좋지만 굳이 하지 않아도 좋다고 알려져 있었다.

심폐 소생술을 시작한 지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일순 기적의 관자놀이를 타고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체력에 자신이 있는 그였지만 슬슬 힘에 부치는 것이 느껴졌다. 팔이 무겁고 호흡이 가빴으며 허리는 끊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구세주가 나타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제세동기…… 헉헉! 가지고…… 왔습니다."

검은색 트레이닝복 남자가 제세동기를 가지고 나타난 것이었다. 슬쩍 그 모습을 바라본 기적은 흉부 압박을 이어 나가며 대답했다.

"전원 켜시면, 훅! 음성 안내가, 훅! 나옵니다. 훅! 그러니까! 훅! 그거 들으시면서! 훅! 세팅해 주세요!"

"아……? 그렇습니까?"

트레이닝복 남자는 기적의 지시에 따라 제세동기의 전원을 켰다.

그러자 기적의 말대로 음성 안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린아이도 충분히 따라할 수 있을 정도였기에 남자는 금세 사용 준비를 끝마쳤다.

"됐습니다, 패드 붙이래요."

기적은 그제야 여자의 몸에서 내려와 패드를 붙였다. 그리고는 안내에 따라 제세동기를 작동시켰다. 그러자 곧 제세동기에서 기다렸던 안내 음이 흘러나왔다.

-심장 분석 중입니다. 분석이 완료되었습니다. 전기 충격을 시작합니다.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전기가 통하고 있으니 환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주세요.

기적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이제 제세동기가 작동을 시작했으니 더 이상 그가 뭔가를 할 필요는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정신을 잃은 사람이 정신을 찾거나, 앰뷸런스가 도착하길 기다리는 일 뿐.

기적은 겨우 숨을 돌린 뒤 눈물범벅이 된 아이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엄마는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네……."

괜찮다는 기적의 말은 얼어 있던 아이의 마음을 마법처럼 녹여 주었다. 아이는 한결 안정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손을 모으고 하늘을 향해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 기도가 하늘에 닿은 것일까? 일순 쓰러져 있던 여자가 손을 꿈틀하는가 싶더니 제세동기에서 다시 음성이 흘러나왔다.

-더 이상의 제세동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멈췄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이는 당장이라도 엄마에게 달려가려고 했지만 기적이 이를 막았다.

"일단 기다려. 지금 엄마를 건드리는 것은 위험해. 응급차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해."

그때였다.

마침 저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급속도로 커졌고, 곧 그 실체를 드러냈다. 사이렌의 주인공, 응급차가 도착한 것이었다.

안에서 사람들이 뛰어나왔고, 그들이 환자를 수습하는 동안 상관으로 보이는 이가 기적에게 다가왔다.

"119입니다. 응급처치하신 분 같은데 상황을 좀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예, 저는 이 근처에서 일하는 물리치료사입니다. 우연히 밖에 나왔다가 소리가 들려서 달려왔고, 곧바로 심폐소생술 실시했습니다. 저기 노란 옷 입으신 분이 119에 신고해 주셨고, 여기 트레이닝복 입으신 분이 제세동기 가져다주셔서, 제세동기 사용했습니다. 환자분은 방금 전에 의식 되찾으신 것으로 보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나서기가 쉽지 않으셨을 텐데 큰일 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사람이 죽어 가는 상황인데 누구라도 이렇게 했을 겁니다. 결과가 좋아서 다행입니다."

둘이 대화를 하는 동안 수습이 마무리되었는지 구급대원 1명이 둘에게 다가왔다.

"환자 상태는 양호합니다. 의식 완전히 회복하셨고, 맥박, 호흡 모두 정상입니다."

"그래? 그거 다행이군. 돌아갈 준비해."

상관은 그렇게 지시한 후 다시 기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네, 수고하세요!"

잠시 후, 여자와 아이를 태운 구급차는 곧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사라져 갔다.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는 기적에게 예의 트레이닝복 남자가 다가왔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선생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지쳐 가고 있었는데 마침 제세동기를 가져오셔서 살았습니다."

"아니요. 그쪽 아니었으면 저는 계속 지켜만 보고 있었을 겁니다. 덕분에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지목받았을 때는 왜 하필 나를? 하는 마음에 심란했는데, 막상 하고 나니 엄청 뿌듯하네요. 지목받기를 잘한 것 같아요."

쑥스럽다는 듯 말한 남자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뭐 하시는 분입니까? 혹시 이런 경험이 있으세요?"

"아니요. 응급처치 자격증이 있지만 실제로 사람 상대로 CPR을 해 본 것은 처음입니다."

남자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저는 워낙 침착하셔서 경험이 있으신 줄 알았습니다. 많이 겁이 났을 텐데…… 어떻게 용기를 내셨습니까?"

"이건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잖아요. 세상사 다 돌고 돈다는데…… 그 대상이 제가 될 수도 있고, 제 주변에 누군가가 될 수도 있고…… 그럴 때 도움을 받으려면 저부터 움직여야죠. 그리고 응급처치 자격증 돈 많이 내고 취득했는데 이럴 때 안 쓰면 언제 써먹겠어요."

"그런가요. 느끼는 바가 많네요. 저도 민방위에서 교육 많이 받았는데…… 다음부터는 적극적으로 나서야겠습니다. 오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기념으로 악수 한번 하시죠."

남자는 그렇게 악수를 나눈 뒤 멀어져 갔고,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기적은 갑자기 엄습하는 추위에 황급히 센터 안으로 들어섰다.

이어 어디를 다녀왔냐는 여자들의 질문이 이어졌지만 기적은 파리처럼 손을 비비며 히터 앞으로 이동할 뿐이었다.

기적의 얼굴에는 말로 할 수 없는 뿌듯한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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