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
국기에 대한 경례! (8)
"그러면 일하던 선생님들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다행히 기존 물리치료실로 편입 조치 내려졌대요."
"아…… 그렇게 됐군요. 그나마 다행이네요."
일자리까지 잃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래도 자리는 지키게 되었다니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문득 아려한 감정이 가슴을 스쳐 지나갔다.
많은 추억이 담겨 있는 명성 병원에서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비록 끝이 좋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쁜 기억보다는 좋은 기억이 많이 남아 있는 명성 병원이었다.
그때를 떠올린 기적이 말했다.
"선생님들은 잘 지내는지 모르겠네요. 언제 한번 만날까요?"
"마침 연락하는 중이었는데, 약속 잡아 볼까요?"
"네, 네. 약속 한번 잡아 봐요."
수정은 손가락을 움직이기 무섭게 소식을 전해 왔다.
"오늘 어떠냐고 하는데요? 마침 오늘 불금이라서 한잔하려고 했다고. 먼저 먹고 있을 테니까 끝나고 합류하라는데요?"
"아, 그거 좋죠. 그러면 근처에서 먼저 놀고 계시라고 하세요. 끝나자마자 합류한다고."
"네, 네!"
수정이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옛 동료들을 만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은 듯했다.
그것은 비단 수정에게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기적 또한 숨길 수 없는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즐거운 일들이 참 많았다.
면접장에서 생긴 일, 치료를 가르친 일, 함께 소래로 염전 체험을 갔던 일까지…….
함께 많은 일들을 경험했다.
여러 가지 현실적 이유로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애틋한 마음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을 만나면 하고 싶은 말들이 벌써부터 뇌리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기적과 수정은 그날 조금은 업된 모습으로 하루 일과를 마쳤다.
그리고 마지막 타임을 끝내기 무섭게 인근에 위치한 호프집으로 이동했다.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호프집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둘을 발견한 사람들이 반갑게 인사를 해 왔다.
"와아! 실장님 오셨다!"
"수정 샘도 왔네! 소식 들었어요. 두 사람 사귄다면서요?"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자 의외의 인물들도 보였다. 바로 주호식과 장원호였다.
"이 실장 왔어?"
"어서 와. 요즘 잘나간다며? 어우! 얼굴이 더 좋아졌네. 수정 선생도 잘 지냈지?"
그리고 그보다 더욱 깊숙한 곳에 자리한 또 한 사람.
"오랜만이야, 이 실장……."
바로 박영규였다.
목소리를 들음과 동시에 그를 발견한 기적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아무리 기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미화된다지만 기적은 박영규와 웃으며 얼굴을 마주할 만큼 좋은 기억이 없었다.
만약 박영규가 나온 줄 알았더라면 그는 이 자리에 나오지 않았을 터였다.
기적은 원망의 시선을 담아 특수치료실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왜 말하지 않았느냐는 일종의 추궁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죄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분위기를 파악한 주호식이 상황을 설명했다.
"우연히 선생님들이 이 실장 만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부탁 좀 했어. 과장님이 이 실장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더라고. 이쪽으로 앉아서 이야기하지."
"……알겠습니다."
기적이 자리에 앉자 주호식이 술병을 들었다.
"오랜만에 보니 정말 반가워. 한 잔 받지."
박영규가 나선 것은 바로 그때였다.
"주 실장, 이리 줘 봐. 내가 한 잔 따라 주고 싶어. 이 실장, 한 잔 받지."
기적은 엉겁결에 술잔을 들었고, 박영규는 그 잔에 술을 가득 따라 준 뒤 말했다.
"이 실장 그만두고 나서 우리가 재활의학과 닥터들에게 많이 시달리고 있어. 참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 이 실장 있었을 때가 좋았는데 하는 생각도 들고. 지나고 나니까 많이 후회가 됐어. 같은 물리치료사들끼리 왜 그랬을까? 내가 무슨 영광을 보자고 그랬을까? 스스로가 참 한심하더라고. 그래서 언젠가 한 번쯤은 사과를 하고 싶었어. 일방적인 사과를 이 실장이 받아 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박영규가 엉뚱한 곳에 시선을 둔 채 그렇게 말했다.
솔직히 박영규의 사과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기에 기적은 아연한 표정으로 박영규를 바라보았다.
사실 잘못은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일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람은 누구라도 인생을 살면서 한두 번쯤은 잘못된 일을 저지른다. 사소한 잘못 한 번 안 저질러 본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그 이후다.
잘못을 저지르고 자기 합리화를 하며 그 일을 넘기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 당사자에게 용서를 비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즉, 지금 박영규는 엄청난 용기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 용기가 기적의 마음을 움직였다.
"다 지난 일이니까요. 솔직히 과장님 때문에 힘들었던 거는 사실이지만…… 과장님도 과장님만의 사연이 있었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러니까 지난 일은 이 술 마시고 깔끔하게 잊겠습니다."
박영규가 애꿎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해해 주니 고마워. 역시 이 실장 완전 남자다잉! 자, 망각주라 생각하고 쭉 들이켜."
"과장님, 그거 첫 회식 때 케이스 컨퍼런스 떠넘길 때도 했던 말인데. 혹시 기억나세요?"
"어? 내가 그랬나? 나 이거 참……."
딴청을 피우는 박영규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지은 기적은 거침없이 잔을 비워 냈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뜨끈한 액체가 몸에 쌓여 있던 그간의 나쁜 기억을 말끔하게 씻어 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기적은 박영규의 잔에 술을 가득 따라 주었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용기 내 주셔서."
박영규는 단숨에 술을 들이켠 뒤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주 실장이 아니었으면 용기 내지 못했을 거야. 그냥 후회만 하면서 지냈겠지. 나랑 주 실장이랑 대학 때 학교 선후배로 만나서 벌써 20년째야. 나에게는 소울 메이트 같은 사람이지. 주 실장 서포트 덕분에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박영규가 손을 뻗어 어깨를 잡으려 하자 주호식이 질색을 하며 몸을 피했다.
"취했어요? 갑자기 무슨 소울 메이트입니까? 그동안 그렇게 홀대해 놓고."
"그래서 내가 미안하다고 하잖아. 앞으로 잘하겠다는데 왜 그래? 그래도 나 요즘 많이 변하지 않았어?"
"그렇죠. 많이 변하셨죠. 치료도 하루에 일곱 타임이나 보시고. 출근도 제때 하시고, 퇴근도 정시에 하시고. 왜 그러세요?"
박영규가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게 당연한 거라…… 잘난 척 떠들기 민망한데…… 인생사 새옹지마? 인생무상이라는 걸 느꼈다고나 할까? 봐 봐, 원장님 병환으로 일선에서 물러나시고, 앞길이 창창하던 그 아들이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되었고……. 그 두 사람 보니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그렇게 아등바등하면 뭐 하나? 뭐 얼마나 영광을 누리겠다고 말이야. 그래서 지나온 삶을 돌아봤는데 참 부끄럽더라고. 이 실장이랑 주 실장 생각이 많이 났어. 그때부터 두 사람한테 사과하고 싶었는데, 이제야 사과를 하게 됐네."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천하를 얻는다고 한들 건강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그 옛날 오매불망 불로초를 찾아 헤맸던 진시황이 느꼈던 교훈을 박영규는 이번 일을 통해 새삼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래서 우리 일이 얼마나 성스러운 일인지 알게 됐어. 건강을 잃은 사람들에게 건강을 돌려주니까. 이건 정말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잖아. 그러니까 자격증이 아니라 면허증을 주는 거겠지. 얼마나 자랑스럽냐 이 말이야."
물리치료사라는 직업이, 사람들에게 건강을 되찾아 주는 일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지도.
다만.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는 계산만 하고 일찌감치 빠지죠. 젊은 친구들 놀게요."
"뭐, 왜? 나는 더 마시고 싶은데? 조금만 더 마시고 가자고. 선생님들 우리 조금 있다 가도 괜찮지? 어? 거봐. 선생님들도 다들 좋다고 하잖아."
아직까지 바닥에 있는 눈치는 키우지 못한 듯했다. 그래도 다행히 그의 옆에는 주호식이 있었다.
"그럼 면전에 두고 싫다고 합니까? 왜 이렇게 눈치가 없으세요? 과장님도 원장님, 이사장님이랑 같이 술 마시면 불편하잖아요? 그런데 앞에 두고 빨리 가라고 할 수 있으세요? 아니잖아요. 그냥 저랑 둘이서 한잔하세요. 옛날 얘기도 하고 그러면 좋잖아."
"어? 아…… 그런 거야? 알았어. 일어나면 되잖아, 일어나면. 일어날게."
박영규가 어린아이처럼 투덜대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주호식이 모두를 향해 말했다.
"과장님이 지금까지 먹은 거 결재하고 가신대. 고마운 사람 다들 과장님에게 박수!"
그 말에 사람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장원호가 손을 흔드는 박영규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과장님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그러자 주호식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장 팀장은 안 가? 장 팀장도 이쪽보다는 우리 쪽 아니야?"
"네? 무슨 소리하세요? 저는 아직 이쪽입니다."
장원호가 당황스럽다는 듯 항변했다. 그러자 박영규가 껄껄 웃었다.
"여기 나 같은 놈이 하나 더 있네. 클클, 이런 느낌이구나. 어떤 느낌인지 확실히 알겠어. 그럼 놀다 가라고."
박영규와 주호식은 마지막까지 장원호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낸 뒤 호프집을 빠져나갔다.
장원호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최애 음식인 오징어만 잘근잘근 씹어 댔다.
* * *
화요일 저녁.
기적은 느즈막이 찾아온 강진아와 얼굴을 마주했다.
"병원은 잘 다녀오셨어요?"
"네, 잘 다녀왔어요. 근력 상태가 엄청 좋아졌다고 담당의가 깜짝 놀라더라고요. 치료해 준 물리치료사를 자기 병원으로 스카우트하고 싶다던데요?"
"아, 그래요? 다행이네요."
이야기를 나누던 강진아가 일순 벽에 걸린 TV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TV에서는 초록색 그라운드를 등진 남자 2명이 마이크를 들고 뭐라 뭐라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어? 오늘 축구하나 보네요?"
기적이 TV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A매치 데이잖아요. 가서 보고 싶었는데 그럴 시간이 없어서 TV만 틀어 놨어요. 방해되면 끌까요?"
"아니요, 아니요. 저도 축구 좋아해요. 좀 보면서 하게 볼륨 좀 키워 주시면 안 돼요? 어차피 사람도 저밖에 없는 것 같은데……."
"그럴까요? 그러죠, 뭐. 유진 샘, 음악 끄고 TV 볼륨 조금만 키워 줄래요?"
"네, 알겠습니다."
곧 센터를 울리던 음악이 사라지고 캐스터와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오늘의 전술 4-4-2로 나오는데요. 오늘 전술 어떻게 보십니까?
-오늘 전술의 핵심은 다이아몬드 전형의 최후방에 자리한 수비형 미드필더 강성영 선수입니다. 수비형 미드필더 위치에 있지만 사실상 스리백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거든요. 강성영 선수가 빌드 업은 물론 제3의 수비수로서 역할을 해 줘야 양측 풀백이 걱정 없이 공격 가담을 할 수 있거든요. 현대 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숫자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기적은 그 소리에 집중하는 대신 강진아를 치료하는 데 정신을 집중했다.
"자, 오늘도 다리를 바닥에 놓고 운동을 할 거예요. 어제처럼 제가 무릎을 앞에서 막아 드릴 테니까 중심을 최대한 앞으로 가져와 보세요. 보조기 차고 오셨죠?"
이번 주부터 기적은 강진아에게 체간의 중심을 앞으로 가져오는 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무릎을 이용해 강진아의 무릎을 막은 상태에서 체간의 중심을 앞으로 가져오는, 스탠딩 자세를 위한 훈련에 들어간 것이다.
아직까지는 겨우 엉덩이를 베드에서 떼는 정도였지만 이게 조금씩 늘어나다 보면 언젠가는 스탠딩 자세를 할 수도 있을 터였다.
"네, 보조기 차고 왔어요. 한번 해 볼게요."
그렇게 둘이 자세를 세팅했을 때였다. 일순 TV에서 애국가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경기 시작에 앞서 애국가가 연주되는 것이었다.
기적은 흘러나오는 애국가를 들으며 강진아의 허리를 잡았다.
"자! 힘 줘 보세요. 하나! 둘! 셋!"
기적이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