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
국기에 대한 경례! (7)
"뭐야? 너 유진 샘한테 관심 있냐?"
기적이 불쑥 돌직구를 던졌다. 그러자 이에 얻어맞은 지식이 화들짝 놀라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니야. 오늘 처음 봤는데, 무슨?"
"그러니까. 오늘 처음 봤는데 뭘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어?"
"캐묻는 게 아니라……."
말끝을 흐린 지식이 에라 모르겠다 하는 표정으로 본심을 털어놓았다.
"솔직히 작고 귀여워서 내 스타일이긴 해. 내가 강아지 상 좋아하잖아."
기적이 젓가락으로 앞 접시를 두구두구 두드렸다.
"이것 보게? 인정하는 속도가 그 뭐냐, 우디르급이네? 안 물어봤으면 눈물 흘렸겠다?"
"우디르? 어린 여자 친구 사귀더니 언어유희가 많이 늘었네?"
"이건 언어유희가 아닌데? 여전하구나 너는? 요만큼도 진전이 없어."
지식이 돌연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뭐! 소개해 준다고, 만다고?"
피식 웃은 기적이 넌지시 말했다.
"유진 샘 사람 괜찮아. 착하고 진중하고 차분하고, 귀엽고 그래. 너한테는 완전 과분하지."
"뭐래? 그러면 형은 그런 여자 두고 왜 수정 씨하고 만나?"
"우리 수정 샘은 착하고 진중하고 차분하고 귀여운 건 물론이고 예쁘고 섹시하기까지 하니까."
"어우! 닭살! 내 손가락이 다 어디로 갔냐!"
지식이 구운 오징어처럼 오그라든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기적이 표정을 쌔 하게 바꿨다.
"야! 그래서 뭐 소개받기 싫어? 물어보지 말까?"
칼을 쥔 것은 자신이 아닌 기적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지식이 재빨리 태도를 달리했다.
"아니, 아니. 수정 씨 엄청 예쁘더라고. 형이 충분히 그럴 만하지. 내가 아까 말하지 않았나? 무슨 연예인 보는 줄 알았다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냥 연예인이 아니었어. 굳이 따지자면 연예인 중에서도 배우, 그중에서도 10시 드라마 주인공급이랄까?"
기적이 만족스럽다는 듯 껄껄 웃었다.
"좋아. 내가 유진 샘한테 소개팅해 볼 생각 있냐고 물어볼게. 너라고 말 안 하고."
"왜 말을 안 해?"
지식의 반문에 기적이 손을 들어 얼굴을 위아래로 흔들며 말했다.
"말하는 것보다는 누군지 모르고 만나는 게 기대감이 생길 테니까? 형 말만 들어라. 내가 연애 선배 아니겠니?"
지식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억눌렀다.
"으으…… 형이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해? 누가 보면 연애 고수인 줄 알겠네."
그렇게 말한 지식이 감히 크게 말하지는 못하고 작은 목소리로 '10년 사귄 여자 친구에게 차인 주제에'라고 덧붙였다.
다행히 기적은 그 말을 듣지 못했고, 지식은 그 후로 약 20분간 기적에게 연애에 관한 훈계를 들어야만 했다. 지식으로서는 그리 유쾌하지 못한 시간이었다.
* * *
그날 오후, 시간이 되자 강진만과 강진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강진아는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해 왔다.
"선생님, 강진아 왔습니다."
지난 일주일의 시간을 허투루 보낸 것은 아니었는지 이제는 강진아도 기적을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기적이 손을 들어 보인 뒤 말했다.
"일찍 왔네요? 컨디션은 좀 어때요?"
"굿이에요. 요즘 컨디션 좋아요."
"그것 봐요. 내가 하지 마사지 병행하면 컨디션 완전 좋아질 거라고 했죠?"
기적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치료를 시작했다. 최근 공들이고 있는 후크라잉(무릎을 세우고 누운) 자세에서 골반 들어올리기 연습을 하며 기적이 물었다.
"그래서 생각해 봤어요?"
"뭘요?"
"내가 앞으로 목표 생각해 오라고 했잖아요. 단기 목표랑 장기 목표 하나씩."
"아, 그거요. 생각해 봤죠."
"생각만요? 그래서 결론은?"
"결론도 내렸어요. 단기 목표는 당연히 서고 걷는 거고, 장기 목표는 수영 국가대표가 되는 거예요."
수영이라는 말에 기적이 반응했다.
"수영? 특별히 수영인 이유가 있어요?"
"원래 수영하는 거 좋아해서요. 수영은 자신이 있거든요. 물론 그 전에 다리가 좋아져야 되겠지만요."
강진아가 아직은 감각이 없는 다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현실적으로 봤을 때 강진아가 수영을 할 수 있을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더구나 국가대표라면…….
하지만 사람이란 목표가 있기에 비로소 나아갈 수 있는 법이다.
국가대표가 되고 못 되고는 지금 상황에서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훨씬 중요했다.
기적이 고개를 끄덕였다.
"숏 텀 골에 롱 텀 골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훌륭한 답안지네요."
"사실 이거 처음 재활 치료 시작했을 때 치료사 선생님하고 같이 했던 목표예요. 그때는 정말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재활을 하다 보니 현실의 벽을 느꼈죠. 나는 꿈을 꿀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요. 그래서 사실 포기하고 있었어요.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힘들었던 당시가 생각났는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 강진아가 일순 기적에게 시선을 맞췄다. 기적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밝기만 했다.
"그런데 선생님을 만나고 희망이 생겼어요. 다시 꿈을 꿀 수 있다는 희망이. 그래서 다시 한번 목표를 향해 달려 보려고요. 선생님하고 함께라면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언저리에는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녀의 희망찬 고백 앞에서 기적의 얼굴 또한 밝아졌다.
"희망이란 최고의 스팀팩이죠. 아마 잘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옆에서 계속 스팀팩을 놔 드릴 테니까요. 자, 그런 의미에서 슬슬 롱 시팅 자세로 가 볼까요?"
기적은 시팅으로 자세를 전환시킨 뒤 치료를 이어 나갔다.
"오늘부터는 바닥을 딛고 다리를 움직여 보는 훈련을 할 거예요."
지금까지는 바닥에 발이 닿지 않은 상태에서 다리를 움직이는 훈련만을 반복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동작으로 진전을 끌어내기 힘든 단계가 되었고, 이에 소위 말하는 클로징 포지션에서 훈련을 이어 가기로 한 것이었다.
"발바닥을 바닥에 잘 대놓은 상태에서 윗다리를 움직여 볼 거예요. 그러면 윗다리를 움직이는 동작만으로도 아랫다리를 움직이게 하는 효과가 있어요."
상위 분절로 하위 분절의 운동 효과를 만들어 낸다. 이는 MF 치료법과 PNF 치료법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콘셉트였다.
"알겠습니다."
강진아는 기적의 지시에 어떠한 의구심도 품지 않았다.
그저 기적이 요구하는 포지션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도대체 지난 일주일간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토록 무한한 신뢰를 보이는 것일까? 그에 대한 해답은 이어진 강진아의 동작에서 잘 드러났다.
일주일 전만 해도 강진아의 L1 레벨, 그러니까 허벅지 근육은 겨우 수축을 일으키는 것이 전부일 정도로 좋지 못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난 지금 강진아의 허벅지는 움직이는 것이 확연히 보일 정도로 좋아져 있었다.
일주일 만에 이뤄 낸 성과라고는 믿을 수 없는 성과였다. 그러니 강진아가 기적의 말에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밖에.
"다리 움직이는 거 느껴지세요? 어디까지 느낌이 오세요?"
"허벅지에는 분명하게 느낌이 오는데, 무릎 아래로는 잘 모르겠어요. 움직이기는 하는데 느낌은 없는 것 같아요."
"아직은 없군요. 그래도 이렇게 다리를 꾸준히 움직이다 보면 분명 느낌이 있을 거예요. 만약 그렇게만 되면 금방 근력이 붙을 거고, 서고, 걷고, 수영하는 것도 가능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기적은 발뒤꿈치를 조금씩 움직여 발을 내반으로 만들기도 하고, 외반으로 만들기도 하고, 또 중립 위치에 놓기도 하면서 열심히 치료를 진행했다.
발바닥의 각도에 따라 동원되는 근육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치열한 전투 속에서 30분의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기적이 치료를 마치자 강진아가 아! 하고 말을 이었다.
"참! 선생님, 저 다음 주 화요일에 시간 좀 바꿔야 할 것 같아요. 그날 병원 검진이 있어서 이 시간에 못 올 것 같아요. 6시 이후로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시간표 좀 확인해 주실래요?"
"그래요? 잠시만요."
기적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연동된 앱을 실행시켰다. 시간표를 보며 기적이 말했다.
"화요일에 6시 이후…… 6시 30분이랑 7시 30분 타임 비어있는데요. 언제가 편하세요?"
"그러면 저녁 먹고 7시 30분 타임에 할게요. 그때가 저녁 먹고 하면 적당할 것 같아요."
"그럼 그때 예약 잡아 드릴게요. 그 전까지는 지금 시간에 오시는 거죠?"
"네, 특별한 일 없어요."
고개를 끄덕인 기적이 치료를 끝마쳤다. 그러자 한쪽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강진만이 다가와 강진아를 데리고 센터를 나섰다.
강진아가 나가자 센터에는 오롯이 힐링 센터의 식구들만이 남았다.
기적은 모여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는 세 사람에게 다가갔다. 막간을 이용해 공지 사항을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수정 샘하고 진욱 샘. 내일부터는 강진아 님 치료 같이해요. 강진아 님도 이제 많이 여유로워지셨고 하니까 이제 같이해도 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진욱 샘, 어제 컴플레인 나온 거 알고 있죠?"
"네, 저 때문에 환부에 멍이 드셨다고……."
"네. 룸브리칼 그립 좀 주의해서 해 주세요. 몸이 아프시고 진통제 드시는 분들은 정말 스치기만 해도 멍이 생기고 하니까요."
"알겠습니다……."
가급적 잔소리를 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기적이었지만 이런 부분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부분들이었다.
풀이 죽은 진욱을 향해 기적이 말했다.
"뭐, 그 정도 일로 풀이 죽고 그래요. 수정 선생님은 기억하겠지만 저는 병원에 있을 때 환자분 환부가 골절돼서 경위서 쓸 뻔한 적도 있어요. 성추행범으로 몰린 적도 있고요. 그리고 이전 병원에서는 제가 치료하던 할아버지가 다음 날 돌아가신 경험도 있어요. 그 정도로 풀 죽으면 임상에서……. 아니, 어디 가서도 일 못 해요."
"정말입니까?"
진욱이 깜짝 놀라 반문했다. 그러자 수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실장님 병원에서 근무하실 때 진짜 이런저런 일 많이 겪으셨어요. 그래서 저랑 카페에 CCTV도 확인하러 가고 그랬어요."
"아…… 그렇구나……."
진욱이 고개를 끄덕이자 수정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
"실장 님…… 명성 병원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세진 샘이 그러는데 명성 병원 특수 치료실 문 닫기로 결정됐대요."
"네, 왜요?"
기적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비록 지금은 그만둔 상태지만 자신이 오픈했던 특수 치료실인 만큼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환자가 줄어들어서 수익보다 월급으로 나가는 돈이 더 많아졌대요. 그래서 새봄맞이 개편으로 그냥 문 닫기로 결정됐대요. 얼마 전에 노블레스 센터가 생겼잖아요. 그게 직격탄이 된 모양이에요."
노블레스 센터의 파격 프로모션은 비단 힐링 센터에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닌 듯했다.
정작 그 직격탄은 힐링 센터가 아닌 정규 병원 소속인 특수 치료실이 맞은 것이다.
병원이 그 아류 격이라 할 수 있는 센터에 밀렸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했지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시대는 바뀌었고,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면 제아무리 병원이라도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물론 모든 것을 노블레스 센터에만 맡길 수는 없었다.
근처에 힐링 센터를 차린 기적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었다. 불현 듯 미안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기적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