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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물리치료사-160화 (160/205)

# 160

국기에 대한 경례! (6)

놀란 것은 김정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포커페이스였던 그의 얼굴이 처음으로 크게 변한 것이다.

'걷는다고? 주영이가?'

솔직히 말해 김정호는 오주영에 대한 기대를 접은 상태였다.

그간 국내외 최고 의료진들이 그녀를 돌봤다. 좋다는 것은 뭐든 다 했다.

하지만 오주영은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다시는 사람 구실을 하기 힘들겠지. 경영인으로서의 생명도 끝이야.'

김정호는 그렇게 오주영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바로 지금, 오주영이 느리지만 분명한 발걸음으로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김정호의 뇌리로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오주영과 함께 걸어온 지난 35년의 가시밭길이.

기적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오주영 님은 하루라도 빨리 백화점 경영에 복귀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 의지가 지금의 결과를 만들었죠. 이는 다른 욕심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이 빨리 회복해야만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주영 님은 단 한 순간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요."

단 한 순간도 포기한 적이 없었다. 그 말은 거대한 울림이 되어 김정호를 포함한 가족들의 마음을 울렸다.

그동안 왜 알지 못했을까?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려는 아내의, 그리고 엄마의 발버둥을. 지금은 이렇게도 잘 보이는데 말이다.

김정호의 움켜쥔 손이 살짝 떨렸다. 삼화 제철부터 시작해 지금의 삼화 그룹을 만들어 낸 철혈의 사나이가 지금 아내의 열정 앞에서 녹아내리고 있었다.

눈물이 말라 버린 그였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울고 있었다, 눈이 아닌 마음으로.

일순 김정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열심히 걸음을 옮기고 돌아와 제자리에 앉은 오주영의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고생 많았어. 힘들었겠어."

어느새 김정호의 손은 오주영의 손을 잡고 있었다. 오주영은 그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따뜻한 목소리에 지난 노력을 한순간에 보상받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고오마워어요."

대답을 마치기 무섭게 오주영은 그대로 김정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김정호는 곧 어깨가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았으나 그냥 모르는 척 가만히 있어 주었다.

지금은 백 마디 말보다 말없이 어깨를 빌려주는 편이 이 상황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걸 잘 알고 있는 그였다.

기적은 그 모습을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자신이 치료한 것은 분명 오주영의 신체일진데, 어쩐지 그 이상으로 마음의 병이 치료된 것 같았다.

가족들이 우르르 김정호와 오주영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기적의 옆으로도 사람 1명이 다가왔다.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해내실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어머니 걸으시는 모습 지켜보는데…… 와아, 눈물이 날 것 같더라고요. 제가 종교를 믿지는 않지만 뭐랄까? 이적을 경험한 느낌이었습니다."

"이적이요? 에이…… 너무 가신 것 같네요."

그에 대한 대답은 김운찬이 아닌 김정호로부터 나왔다.

"아니요. 이건 이적이 맞지요. 누가 뭐래도 우리 가족은 오늘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렇지 않아? 여보?"

오주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에게느은 서언생님과의 만나암 자체가아 기적이었지이."

만남 자체가 기적이었다. 오주영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이었다. 기적이 기다렸던 메시지가 들려왔다.

-VVIP의 만족도가 20 상승했습니다. 현재 만족도 95.

-퀘스트 [VVIP를 만족시켜라!]의 달성 조건을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세원대학교 정교수(명예교수)가 될 기회가 주어집니다.

무려 20의 만족도가 단숨에 상승하며 퀘스트가 완료되었다.

그리고 이에 반응이라도 하듯이 김운찬이 말했다.

"선생님, 제가 저번에 말씀드렸잖아요. 치료만 잘해 주시면 저희 학교 명예 교수직을 드리겠다고요."

기적은 아연한 표정으로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 무리한 약속을 지키라고 할 만큼 저 몰염치한 사람 아닙니다."

기적은 퀘스트 보상이야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이미 기뻐하는 가족들의 모습에서 충분한 보상을 받았으니까.

김운찬을 곤란하게 하면서까지 욕심을 채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김운찬의 생각은 달랐다.

"아닙니다. 당시에는 분명 가벼운 마음으로 던진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무거운 마음을 담아 부탁드리는 겁니다. 세원대학교 명예 교수직을 맡아 주세요. 그래서 저희 학생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내려 주세요."

"제가 그럴 자격이 될지……."

"되지요. 되고말고요. 마음 같아서야 정식 교수로 모시고 싶지만 선생님 입장을 생각해서 명예 교수직으로 만족하는 겁니다."

그렇게 둘이 교수 임용 문제를 두고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벌일 때였다. 두 사람의 목소리를 뚫고 김정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 총장, 지금 이 상황에서도 일을 하고 있어? 그거 잠깐 미뤄 두고 이리 와서 사진 한번 찍자. 선생님도 오세요. 같이 사진 한 번 찍읍시다."

"그럴까요……?"

어색하게 대답한 기적이 걸음을 옮겨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섰다. 그러자 김운찬이 그 옆자리에 서며 말했다.

"조만간에 자리 한번 마련하겠습니다. 아셨죠?"

"네……."

그것으로 상황 종료.

원하던 대답을 얻어 낸 김운찬이 어깨로 기적의 어깨를 툭 치며 고갯짓을 했다.

"사진 찍네요. 앞에 카메라 보세요."

기적은 카메라를 바라보았고, 오늘의 촬영을 맡은 남자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셋에 찍겠습니다. 하나! 두울! 세엣!"

찰칵!

셔터 소리와 함께 가족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그 사진 속에서 누군가는 V 자를 그리고 있었고, 누군가는 밝게 웃고 있었으며, 누군가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각각 다른 모습. 하지만 사람들은 사진을 통해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행복했던 이 순간을 말이다.

* * *

"우리 오늘 점심은 뭐 먹어요?"

"색다른 거 뭐 없을까요? 맨날 먹는 음식 지겨운데……."

"글쎄요. 요 앞에 멕시코 음식점 하나 생겼던데 한번 뚫어 볼래요?"

"멕시코요? 흠…… 괜찮을라나?"

직장인들에게 점심 메뉴 정하기는 정말 힘든 일 중 하나였다.

결국 갑론을박을 벌이던 세 사람은 그 힘든 일을 제일 윗사람인 기적에게 떠넘겼다.

막 치료를 마치고 나오는 기적을 향해 수정이 물었다.

"실장님, 오늘 점심은 뭐 먹어요? 실장님이 정해 주세요."

기적은 손을 씻으며 그 말에 답했다.

"점심요? 미안한데 세 사람이서 먹어요. 나는 오늘 약속이 있어서."

"에? 약속요? 무슨 약속요?"

"뭐 무슨 약속이에요. 내가 말했죠? 고지식이라고. 오늘 쉰다고 점심 같이 먹자고 해서 근처로 오라고 했어요."

"지식이? 실장님 후배요?"

"네, 맞아요. 슬슬 올 때가 됐는데……."

기적이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센터의 문이 열리며 얄미운 인상의 남자 1명이 들어섰다.

양반은 못 되는지 고지식이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이었다. 그는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특유의 얄미운 목소리로 기적을 공격했다.

"와아, 형! 센터 좋네. 이렇게 좋은 센터 차려 놓고 나한테는 그동안 연락도 안 했던 거야?"

기적이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내가 왜 너한테 말해야 하는데? 궁금하면 네가 연락하던가. 개소리하지 말고 저쪽에 가서 사람들한테 인사나 해라."

기적이 개소리라는 부분에서 목소리를 낮추며 지식의 등을 떠밀었다.

그러자 지식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친 뒤 걸음을 옮겼다.

데스크 앞까지 걸어간 그가 사람들을 향해 반듯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기적을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안녕하세요? 고지식이라고 합니다. 기적이 형 후배입니다. 아시겠지만 저도 물리치료사입니다. 지금은 물리치료 일 안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차례로 지식의 인사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정수정입니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저 13학번 허진욱입니다. 선배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안녕하세요? 힐링 센터에서 일을 도와드리고 있는 공유진입니다. 처음 뵙네요."

처음 보는 세 사람이 어색할 법도 하건만 지식은 조금도 어색해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 나갔다.

"세상물정 모르는 저 형이 센터 차린다고 해서 제가 엄청 걱정이 많았는데 같이 일하시는 분들 보니 마음이 놓이네요."

어느새 다가온 기적이 뭔 소리냐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뭔 소리야? 그러니까 힐링 센터가 잘되는 게 다 여기 선생님들 덕분이다 이거냐?"

"아무래도? 형이 혼자서 운영하던 힐링 센터 시원하게 말아먹은 거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잖아. 이런 걸 두고 팩트 폭격이라고 하나?"

"인마, 팩트 폭격은 그럴 때 쓰는 말이 아니거든?"

"흐흐. 아무튼 잘돼서 좋다 이 말이야. 이번에도 망하면 어쩌나 걱정 많이 했는데. 형 잘되는 모습 보니까 나도 기분 좋다. 그러고 보니까 얼굴 진짜 좋아졌네? 귀티가 좔좔 흘러. 돈 많이 벌어서 좋은 거 많이 먹나 봐? 나도 좋은 것 좀 사 줘."

"너 혹시 그거 아냐?"

"뭐? 어떤 거?"

"너 말 더럽게 많은 거. 원래도 많지만 오늘따라 유독 심한 것 같다? 뭐 좋은 일이라도 있냐?"

지식은 어쩐지 움찔한 표정으로 답했다.

"뭐, 뭐가? 내가 뭘 어쨌다고?"

"아니면 말고. 인사 다 했으면 밥이나 먹으러 가자. 저희 그만 가 볼게요. 식사들 해요."

상황을 정리한 기적이 지식을 이끌고 센터를 나섰다. 둘이 들어간 곳은 근처에 위치한 중식당이었다.

"간짜장 2개랑 군만두 하나 주세요."

주문을 마친 기적이 가만히 지식을 바라보았다.

"너 아까 센터에서 기분 엄청 좋아 보이더라? 뭐 좋은 일 있냐?"

"어, 어? 내가 그랬나? 형을 오랜만에 봐서 기분이 좋았나 보지."

"그래?"

기적은 지식의 태도가 어쩐지 수상했지만 별일이 있을까 싶어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지식이 화제를 전환시켰다.

"그나저나 형 진짜 부럽다. 완전 성공했어. 아주 그냥 전신에서 성공한 티가 좔좔 흘러. 아파트도 사고 차도 좋은 거 타고. 방송에도 나오고!"

"흐흐, 그래. 형이 요즘 좀 잘나간다."

지식은 눈꼴시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으나 딱히 할 말이 없는지 쩝쩝 입맛을 다셨다.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프네. 마음 같아서는 몇 마디 쏴 주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 너무 반박 불가야."

대화를 나누다 보니 금세 음식이 날라져 왔고, 두 사람은 곧 열심히 젓가락을 놀렸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때쯤 지식이 말했다.

"그런데 형 여자 친구 예쁘더라? 나 완전 연예인인 줄 알았어. 그 고, 공유진 선생님인가도 그렇고. 형 센터 얼굴 보고 사람 뽑아?"

"잉? 그럴 리가 있냐?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

"그래? 그런데 그 선생님은 몇 살이야? 어려 보이던데?"

"수정 샘? 올해 스물 넷. 그런데 빠른이라 원래는 스물다섯."

"아니, 아니. 수정 샘 말고 그 공……유진 선생님 말이야."

"아? 유진 샘? 유진 샘은 수정 샘보다 한 살 어린데……."

말을 하던 기적이 일순 수상하다는 표정으로 지식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지식의 질문이 유진에게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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