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
국기에 대한 경례! (5)
강인해 보였던 강진아의 갑작스러운 눈물은 두 남자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기적이 놀란 표정으로 강진아를 바라보았고, 강진만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진아야, 갑자기 왜 그래? 좋은 말씀해 주시는데 왜 울어. 일단은 보장구부터 착용하고 일어서 보자고 하시잖아."
그러자 강진아가 힘겹게 눈물을 훔쳐 냈다.
"그러면 뭐 해? 어차피 걷지도 못하는데…… 억울해서 그래. 젊음 바쳐 나라에 충성했는데 결과가 이렇다는 게 너무 억울해서……."
"아니, 진아야……."
그러나 강진만이 뭐라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전 강진아는 언제 그랬냐는 듯 본래의 신색을 회복했다.
"잠깐 서글퍼서 그랬어. 나 이렇게 만든 사람들은 어디선가 잘살고 있을 텐데…… 나만 이러고 있는 게 서글퍼서. 하지만 할 수 없지. 이미 일은 벌어졌으니까."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기적은 강진아의 사고에 뭔가 사연이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섣불리 끼어들지는 않았다. 괜히 나서서 벌집을 건드릴 필요는 없으니까. 아직 자신과 강진아 사이에는 그만한 신뢰가 쌓이지 않았다.
기적은 조용히 치료를 진행했고, 곧 끝날 시간이 다가왔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시간도 다 됐고…… 계속할 상황도 아닌 것 같아서……."
강진만이 강진아를 대신해 그 말을 받았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오늘은 이만 돌아가고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네, 내일 이 시간에 오시면 됩니다."
강진만과 강진아.
두 사람은 부랴부랴 돌아갈 채비를 마친 뒤 이내 몸을 돌려 센터를 나섰다.
기적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오죽 안 좋았으면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눈물을 보였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답답하기만 했다.
몸이 아픈 환자들의 각양각색 사연을 듣는 일이야 기적의 주특기였지만 그들이 만들어 내는 슬픔에까지 적응된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슬픈 사연들은 여전히 기적을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아마 내가 물리치료를 그만둘 때까지 적응은 안 될 것 같네…….'
씁쓸한 미소를 흘리고 돌아서자 유진이 보였다. 열심히 일을 보고 있던 그녀는 기적과 눈을 마주친 뒤 머쓱한 웃음을 흘렸다.
"센터장님, 커피 한 잔 드릴까요?"
그 말에 기적은 고개를 끄덕였다, 환한 미소를 흘리면서.
"흐흐, 돈 낼 테니까 라테로 부탁해요."
저도 모르게 환한 미소가 나온 것은 이유가 있었다.
커피를 드리냐는 유진의 말에서 자신을 배려하는 마음을 느낀 덕분이었다.
아무 것도 아닌 한마디였지만 그 말 한마디가 묘하게 기적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곧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커피가 날라져 왔다.
기적은 그 커피를 호로록 소리를 내며 들이마셨다. 그러자 따뜻한 커피가 목울대를 타고 넘어가며 가슴 어림을 따뜻하게 데워 주었다.
기적은 따뜻한 온기를 손과 가슴으로 느끼며 말했다.
"아, 커피 맛 좋다!"
* * *
일주일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총장의 전화를 받고 오주영을 치료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일곱 번째 만남인 것이다.
기적은 퀘스트의 내용을 떠올렸다. 분명 퀘스트는 7번의 치료 기회를 준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오늘이 마지막 기회였다. 즉, 현재 75까지 오른 VVIP의 만족도를 오늘 치료를 통해 5 이상 끌어 올려야 한다는 말이었다.
어떻게 보면 쉬운 목표였다. 엿새 동안 만족도는 10에서 75로 65포인트나 올랐으니까.
대충 계산해도 하루에 10 이상은 올린 셈이니 5를 올리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추세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첫날에만 해도 19나 올랐던 만족도는 바로 전날 7까지 줄어들은 상태였다.
날이 갈수록 만족도 상승폭이 줄어드는 것이다.
오늘 마지막 치료에서 5 이상의 만족도를 올리는 것이 마냥 보장된 것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 때문에 기적은 마지막 날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그를 더욱 긴장하게 만드는 일이 벌어졌다. 치료를 앞둔 시간, 평소와 달리 많은 사람들이 치료가 있을 문화 센터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남자를 필두로 3남 2녀가 들어서고 있었다.
선두의 남자는 기적을 향해 손을 내밀며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반갑소. 나 삼화의 김정호요."
자신을 삼화라고 말할 수 있는 단 한 사람, 그 사람은 바로 삼화 그룹의 회장뿐이었다. 기적은 공손하게 그 손을 맞잡았다.
"안녕하세요? 오주영 님을 치료하고 있는 이기적 물리치료사입니다."
기적은 김운찬으로부터 오늘 이 자리에 김정호 회장이 온다는 말을 미리 전해 들었기 때문에 크게 놀라지 않고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김정호에게는 신선하게 다가온 모양이었다.
"젊은 친구가 말을 잘하시네. 김 총장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치료 실력이 아주 좋으시다고? 실력이 하도 신통방통하다고 하기에 궁금해서 이렇게 애들을 데리고 보러 왔는데, 좀 지켜봐도 괜찮을까?"
뒤를 둘러보니 TV에서 봤던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그중에는 세원대학의 총장 김운찬의 모습도 보였다.
난데없이 재벌들 앞에서 컨퍼런스를 하게 된 셈이었다. 충분히 부담스러울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기적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보호자시니까 치료를 지켜볼 자격이 있으십니다."
그러자 뒤에서 누군가가 한마디 틱 내뱉었다.
"호오, 자신 있나 보네?"
명백한 시비조의 음성이었지만 기적은 굳이 그 말에 대꾸를 하지 않았다.
골게터가 골로 말을 하는 것처럼 물리치료사인 자신은 치료 결과로 말하면 될 일이었다.
기적을 대신해 그 말에 답한 것은 바로 김운찬이었다.
"야, 김진희. 너 그게 무슨 말이냐? 그리고 너 그 말 꼭 나한테 하는 말 같다?"
"뭐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네. 어찌됐든 오빠가 시작한 일이니까 책임도 오빠가 져야 하는 거잖아?"
"책임? 무슨 책임?"
"몰라서 물어? 아무튼 저 물리치료사를 불러들인 게 오빠잖아. 들어 보니까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도 아니라며? 더 말해 줄까?"
말인즉슨 의사도 아닌 물리치료사를, 그것도 실력도 보장되지 않은 어중이떠중이를 불러온 것이 당신이니 그 책임도 당신에게 있다는 말이었다. 해석을 마친 김운찬의 눈꼬리가 사납게 올라갔다.
그러나 그의 사나운 눈꼬리가 본래의 자리를 찾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나선 김정호 때문이었다.
"입 다물어라, 너희들. 시끄럽게 굴 거면 여기서 당장 나가!"
장내를 휘어잡는 카리스마에 김운찬과 김진희는 찔끔 놀라 입을 다물었다.
살벌한 눈빛을 보낸 김정호가 언제 그랬냐는 듯 웃는 얼굴로 기적을 바라보았다.
"미안합니다. 녀석들이 엄마 일이다 보니 예민해져서 그럽니다."
"괜찮습니다. 누구나 그럴 수 있죠. 저라도 부모님이 관련된 일이라면 그게 누구라도 물불 가리지 않았을 겁니다."
김정호 회장은 묘한 눈으로 기적을 바라보았다. 기적의 말이 참 묘했다.
언뜻 들으면 이해한다는 말처럼 들리지만, 어떻게 들으면 나도 언제든 들이받을 수 있다는 말로도 들렸으니까.
유순한 생김새와 다정다감한 목소리와는 달리 생각보다 당찬 구석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재미있는 친구네.'
자신의 앞에서 이렇게 당당히 말을 하는 사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래서일까?
김정호는 일순 기적의 실력이 궁금해졌다. 대체 얼마나 자신이 있기에? 자신들 앞에서 이렇게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는 것인지 궁금해진 것이다. 그는 그 호기심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너희들 빨리 자리에 앉아라. 우리 오 여사가 어떤 치료를 받고 있는지 빨리 보고 싶어졌어."
누구의 말이라고 미적거리겠는가? 사람들은 재빨리 자리에 착석했고, 장내가 정리되기 무섭게 오주영이 휠체어에 탄 채로 모습을 드러냈다.
"어……?"
연락을 받지 못했던 것일까? 오주영은 놀란 눈으로 장내를 둘러보았다.
"어어어? 다아드을…… 무스은 일이야아? 말도 어없이?"
그에 대한 대답은 김운찬으로부터 나왔다.
"서프라이즈 해 주려고 말없이 왔죠. 아버지가 어머니 치료받는 거 보고 싶다고 하셔서요."
"그으래?"
오주영의 눈빛이 김운찬에서 김정호에게로 넘어왔다. 김정호는 손을 살짝 들어 보인 뒤, 짧게 말했다.
"그럼 시작합시다."
김정호의 낮은 목소리와 함께 치료가 시작되었다. 기적은 이 자리에 앞서 김운찬으로부터 아버지가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잘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에 케이스 컨퍼런스를 하는 것처럼 치료를 진행했다.
"오주영 님은 치료 목표로 백화점 경영 복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사지의 전반적인 근력 향상을 원하셨고요. 해서 저는 사지의 근력 향상에 초점을 맞추고 치료를 진행했습니다. 자, 한번 일어서 보실래요?"
설명을 마친 기적이 오주영을 향해 말했다. 바로 그때 예의 뾰족한 음성이 들렸다. 김진희였다.
"아니, 엄마를 도와줘야죠? 가만히 서서 말한다고……."
그러나 뾰족한 목소리는 오래지 않아 사라졌다. 조금 힘겨워 보이기는 했지만 김진희가 홀로 몸을 일으킨 것이었다.
"……어?"
오주영의 모습에 놀란 것은 김진희 뿐만이 아니었다.
김정호 회장 역시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내심으로는 달라진 아내의 모습에 탄성을 내뱉고 있었다.
몇 달이 지나도록 진전이 보이지 않던 김진희가 불과 1주일 만에 혼자 몸을 일으키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놀라기에는 아직이었다.
기적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는 오주영 님의 사지 근력 약화가 사지 자체가 아닌 체간의 약화로 인한 2차 약화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지난 일주일간 체간과 호흡근에 집중적인 훈련을 진행했죠. 어떤 훈련을 했는지 한번 보여 드리겠습니다."
기적은 오주영을 다시 전동 베드에 눕히고 높낮이를 맞춘 뒤, 그간 해 왔던 호흡근 훈련과 체간, 그리고 코어 머슬 훈련을 차례로 실시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가족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엄마 잘하시는데? 원래 저렇게 잘하셨나?"
"아닐걸? 저렇게 움직이는 거 못 하셨었는데?"
"어메이징인데? 저 치료사가 저렇게 만든 거야?"
그리고 그 소란은 기적이 오주영을 다시 일으켜 세웠을 때 절정에 달했다.
"차이가 보이시나요? 이전이랑 지금이랑? 아마 아주 쉽게 일어나시는 게 보일 겁니다. 오주영 님의 문제가 사지 근력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체간에서 오는 2차적인 약화라는 증거죠. 그러면 이제는 체간의 근력 강화가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보여 드리겠습니다. 오주영 님, 준비되셨나요?"
기적이 그렇게 묻자 오주영이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네에, 걸어 보오게엤습니이다."
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제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서지도 못했던 어머니가 걷겠다니…… 이게 결코 가능할 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