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
국기에 대한 경례! (4)
기적이 팀장이라 부른 남자는 바로 강진만이었다.
힐링 센터를 오픈할 당시 인테리어를 담당했고, 오픈 이후 한동안 치료를 받으러 왔던 그가 정말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기적이 인사하자 강진만이 마주 고개를 숙였다.
"제가 조금 오랜만에 왔죠?"
"그러네요. 그런데 좋은 일이죠, 뭐. 여기는 안 오는 게 좋은 곳이니까요."
"하긴. 실장님한테 치료를 받으니 아픈 곳이 금방 좋아져 버려서 찾아올 일이 없었습니다."
"그럼 오늘은 어쩐 일이세요? 보니까 강진만 님이 관리 받으러 오신 건 아닌 것 같은데요?"
기적이 마치 다른 세상 사람처럼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휠체어에 앉은 여자를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강진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예. 오늘은 제가 아니고 제 동생 때문에 왔습니다."
"아! 같이 오신 분이 동생분이셨군요. 어쩐지 닮으셨더라……. 마침 제가 한 타임만 보면 타임이 비거든요? 일단 이쪽으로 앉으셔서 조금만 기다려 주실래요? 여기 회원 가입 신청서랑 설문지에 체크 좀 해 주시면서."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기적은 종이 두 장을 내민 뒤 다음 회원을 맞이하러 떠났고, 그로부터 약 30분 뒤 다시 강진만 일행과 얼굴을 마주했다. 적어 놓은 회원 신청서와 설문지를 살피며 기적이 말했다.
"강진아 님…… 예전에 군인이셨네요? 지금은 의가사제대 하셨고요?"
그에 대한 대답은 강진아가 아닌 강진만으로부터 나왔다.
"사고가 있었습니다. 레펠을 타다가 그대로 떨어지는 바람에…… 척추가 부러졌는데 그게 하필 신경을 건드려서 이렇게 돼 버렸습니다."
"레펠이라면 헬기 레펠 말씀하시는 겁니까? L자로 떨어지다가 제동을 못 잡으신 거예요?"
"아녀. 그건 일반적인 레펠이고…… 진아 같은 경우에는 역 레펠을 하다가 줄을 놓치면서…….등으로 떨어지게 된 겁니다."
역 레펠이란 다리를 아래로 하고 떨어지는 일반적인 레펠과 달리 머리를 아래로 하고 떨어지는 고난도의 레펠이었다.
주로 특수 부대원들이 하는 레펠로 한 손이 자유롭기 때문에 하강하는 동안 k-1 기관총으로 사격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기적은 군 복무 시절 특공대에 근무하며 레펠을 타 보았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역 레펠을 타신 걸 보면 특수 부대에서 근무하셨나 봐요?"
기적이 강진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나 강진아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강진만이 민망한 표정으로 답했다.
"아직 진아가 사람들 대하는 걸 어려워합니다. 마음의 상처가 아직 다 낫지 않은 거지요. 여기까지 데려오는 데도 설득하느라 엄청 애를 먹었습니다. 실장님이 좀 이해해 주세요. 맞습니다. 우리 진아가 특수 부대에서 복무했었습니다."
몸이 아픈 사람들이 마음의 병을 얻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특히 정신은 멀쩡한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 SCI 환자 같은 경우에는 더욱이. 기적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아, 예. 당연히 그렇지요. 사실 저도 낯을 가려서 처음 보는 강진아 님보다는 팀장님하고 이야기하는 게 편합니다."
"아하! 그렇습니까? 저는 실장님이 아무하고나 말씀 잘하시는 분인 줄 알았는데, 낯을 가린다는 사실은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노력하는 거죠. 저도 직업 때문에 그렇지, 그것만 아니면 사람 엄청 가립니다."
웃으며 말한 기적이 일순 웃음을 멈추고는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예약을 잡아 드려야 하는데…… 어떻게 하죠? 세 타임 뒤에나 타임이 빌 것 같은데요."
"세 타임 뒤라면……?"
"30분 치료, 5분 휴식이거든요. 그러니까 한 타임에 35분이고…… 세 타임이면 1시간 45분은 기다리셔야 하거든요. 괜찮으실까요? 힘드시면 다음에 오셔도 되고요."
강진만은 잠시 고민하다 이내 입을 열었다.
"아니요, 아니요. 제가 갑자기 찾아와서 그런 걸요. 저희야 뭐, 어차피 밥 먹고 오면 됩니다. 보니까 여기 커피도 파시는 것 같은데, 밥 먹고 와서 커피나 마시면서 기다리고 있죠, 뭐."
"그러실래요? 죄송해서 어쩌죠?"
"아닙니다. 그러면 이따 뵙겠습니다."
그렇게 강진만과 강진아는 1시간 30분 후를 기약한 뒤 센터를 빠져나갔다. 기적은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 회원 신청서를 데스크의 유진에게 넘겼다.
"여기 회원 등록 좀 해 주실래요?"
"알겠습니다."
유진은 회원 신청서를 받아들었고, 회원 정보를 적어 넣기 시작했다.
입력을 마친 유진이 등록을 위해 엔터를 눌렀을 때였다. 일순 기적의 눈앞에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퀘스트 [국기에 대한 경례]가 주어집니다.
-목표 : 운동신경을 L4 레벨까지 회복시키세요.
-보상 : 국위선양을 할 기회, 대량의 보너스 포인트.
예고 없이 떠오른 퀘스트 창에 기적은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퀘스트의 주인공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얻는 보람에 그는 완전히 중독되어 있었다.
기분 좋은 상황에서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다시금 강진만, 강진아 남매가 찾아왔고, 오래지 않아 기적은 강진아와 얼굴을 맞이했다. 치료가 시작된 것이었다.
기적은 우선 좋은 기운부터 불어넣기로 했다. 굳어 있는 몸을 풀어 주며 그가 말했다.
"SCI로 찾아오시는 분들께 항상 말씀드리는 거지만 운동신경이 좋은 분들은 회복이 빨라요. 특전사까지 하셨던 분이니 운동신경 회복이 다른 분들에 비해 좋을 거예요. 용기를 가지셔도 좋아요."
그러나 강진아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기적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희망을 노래했다.
"사실 저도 특공대에서 근무했어요. 그래서 레펠을 타기도 하고 그랬죠. 특공 무술 단증도 있고요. 뭐 특전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특공대와 특전사는 엄연히 다르다.
레펠이나 특공 무술 등 비슷한 훈련을 하는 것은 맞지만 그 강도나 난이도에 있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이 계속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공감대를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강진아가 군대에 가지고 있을 애착은 안 봐도 분명하기에 군대 이야기를 통해 친목을 다지고자 함이었다.
"바로 옆에 백마 부대라는 특전사 부대가 있었어요. 그래서 가끔 백마 부대에 파견 가서 훈련받고 오기도 하고 그랬어요. 수상 침투 같은 것들요. 그때 특전사들 등 근육이 진짜 멋졌는데…… 보트에 바람 넣을 때 펌핑……."
그것이 효과를 발휘했을까? 거기까지 말했을 때 강진아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백마요?"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기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백마 부대 옆에서요. 왜요? 혹시 백마 부대에서 근무하셨어요?"
강진아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강진만이 부연 설명을 했다.
"맞아요. 진아가 백마 부대에서 근무했어요. 참 신기한 인연이네요."
"하하, 그러게요. 어쩌면 그때 한번 뵀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때 여군도 몇 명 봤었거든요."
"아, 정말요? 그러면 정말로 봤을 수도 있었겠네요. 안 그래? 진아야?"
강진아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이었으나 그냥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도 말을 텄기 때문일까? 이후로 경직되었던 분위기는 많이 부드러워졌다. 기적은 부드럽게 치료를 이어 나갔다.
"혹시 포지션 체인지 트레이닝은 다 되어 있으신가요?"
"네."
"그럼 한번 해 볼까요? 어느 정도 가능하신지."
그에 대한 대답은 없었다. 대신 강진아는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팔의 반동을 이용해 슈파인(누운 자세)에서 프론(엎드린 자세)으로, 다시 프론에서 사이드라잉(옆으로 누운 자세)으로, 사이드라잉에서 롱 시팅(다리를 뻗고 앉은 자세)으로, 롱 시팅에서 시팅으로, 시팅에서 배드 투 휠체어로 일련의 자세 전환을 물 흐르듯 펼쳐 보였다.
역시 특전사 출신답게 운동 능력이 발군인 모습. 기적도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와! 정말 잘하시네요. 예전에 휠체어 국가대표 상비군을 담당한 적이 있는데 그분보다 더 잘하시는 것 같아요."
"우리 진아야 운동신경이 워낙 좋으니까요. 자세 전환도 진짜 금방금방 배웠어요."
"그러니까요. 그럼 포지션 체인지는 따로 배우실 필요는 없을 것 같고…… 하시는 것 보니까 흉추 하위 레벨인 것 같은데 맞습니까?"
"역시 선생님! 맞습니다. 흉추 10번 레벨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 진단 받은 게 언제입니까?"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바로 저번 주까지 병원을 다녔었거든요."
"그래요? 흠…… 일단 알겠습니다.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왼쪽보다 오른쪽에 더 문제가 있는 편이죠?"
"네네, 맞습니다. 왼쪽보다 오른쪽에 문제가 더 심합니다. 그래서 동작을 할 때 주로 왼쪽을 이용해서 하는 편입니다."
"그렇군요."
뭔가를 고민하던 기적이 이번에는 강진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강진아 님, 혹시 종아리나 정강이 쪽 다리에 아무런 느낌도 없으신가요?"
굳이 강진아라는 말을 앞에 붙인 것은 꼭 그녀로부터 대답을 듣고 싶다는 의미였다. 이를 눈치챈 강진아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어요…… 아무래도 없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없는 것 같다는 대답에 기적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진아가 너무 잘 해내서일까? 어쩌면 감각 신경이 아랫다리까지 내려왔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너무 과한 기대였다. 아무리 감각 신경이 운동신경보다는 좋은 예후를 보인다고 해도 흉추 10번 레벨의 코드 환자가 요추 4번 레벨 이하까지 살아있기는 힘들었다.
"역시 그렇군요. 잠깐 좀 보겠습니다. 제가 다리 이곳저곳에 힘을 줘 볼 테니까요. 강진아 님은 그 힘을 느끼시고 근육을 수축시켜 보세요. 팔을 예로 들면…… 제가 여기를 이렇게 누르면 그 근육을 움직여 보시는 거예요. 이해하셨죠?"
강진아는 고개를 끄덕였고, 기적은 곧 신경학적 레벨 검사를 시작했다.
그는 요추 4번 레벨부터 시작해 거슬러 올라가 보기로 했다.
요추 4번, 즉 L4 레벨의 주요 검사 항목인 슬개건 반사와 대퇴사두근, 그리고 고관전 내전근.
기적은 이 근육들을 차례차례 검사해 보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1레벨씩 올라가며 검사를 진행한 그는 곧 애매한 결과를 도출해 냈다.
'요추 2, 3, 4번 레벨이 아예 반응이 없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이 정도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지. 세 달이 지났다면 앞으로 극적인 운동신경 회복은 없다고 봐야 하는데……. L2 레벨의 운동 근육이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걷는 것은 물론 서는 것도 사실상 힘들다고 봐야겠지. 하지만 포기할 단계는 아니야. 그래도 어떻게든 L2 레벨까지만 회복시킨다면 보장구를 이용해서 걸을 수 있을 테니까.'
누군가는 보장구를 이용해 걷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밖에서 보장구를 사용하고 걸을 것도 아니지 않느냐며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선 자세를 경험하고 걸음을 옮긴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했다.
그 동작들을 통해 정말 많은 질병들을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적은 남매에게 바로 그 점을 설명해 주었다.
"지금으로써는 L1레벨이라고 봐야 해요. 하지만 L2 레벨에도 트레이스…… 그러니까 약간의 수축이 느껴져요. 이걸 어떻게 해서라도 잘 끌어내는 방향으로 훈련을 진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바로 그때 강진아가 입을 열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먼저 입을 연 것이었다.
"L2가 나오면 어떻게 되는데요? 다시 서고 걸을 수 있나요?"
기적은 굳이 없는 사실을 덧붙여 괜한 기대감을 심어 주지는 않았다.
"걷고 서는 거는 나중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으로써는 그걸 생각할 단계가 아니에요. 일단 어떻게든 L2 레벨을 회복시키고, 보장구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스탠딩 자세를 만드는 것만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기적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을 때였다. 어쩐지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강진아가 일순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입에서 눈물이 흘러내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