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
방문자와 VVIP (5)
그날 점심, 중국 음식 파티를 벌인 네 사람은 꽤나 오랜 시간 기적의 집에 머물렀다. 기적의 짐 정리를 돕기도 하고, 또 모여 앉아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덧 날이 저물 시간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적당한 타이밍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오래 앉아 있었네요. 이사하느라 힘드실 텐데 저희는 그만 일어날게요."
"무슨 말씀을. 혼자 있었으면 우울할 뻔했었는데 이렇게 와서 축하도 해 주고 덕분에 행복했습니다. 제가 여러분들 집까지 모시겠습니다."
"아닙니다. 피곤하실 텐데 쉬세요."
"그래요. 그러면 저희가 너무 죄송하죠."
그러나 기적은 한사코 고집을 부렸고, 기어이 사람들을 저마다의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모두를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기적은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교수님? 교수님이 이 시간에 어쩐 일이지?'
한동안 연락이 없던 문정연 교수가 그 주인공이었다.
"교수님!"
핸즈프리를 이용해 전화를 받자, 곧바로 수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선생, 뭐 하고 있었나? 지금 바쁜가?
어쩐지 다급한 목소리. 평소 항상 느긋한 모습을 보이는 문정연이었기에 기적은 뭔가 이변이 생겼다는 것을 눈치챘다.
"아닙니다. 용무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입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 다름이 아니라, 지금 학교로 좀 올 수 있나? 최대한 빨리.
"예…… 뭐…… 30분 안에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 그래? 그거 잘됐구나. 그럼 최대한 빨리 오거라. 자세한 이야기는 내 방에서 하자.
"알겠습니다, 교수님……."
전화 통화는 그것으로 종료.
기적은 무슨 일인지 궁금했으나 알 길이 없어 하는 수 없이 학교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얼마를 달렸을까? 기적은 곧 학교에 도착했고, 곧 학과장실의 문을 열 수 있었다.
"교수님, 저 왔습니다."
인사를 건네자 곧바로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선생 왔나? 갑자기 불러서 놀랐지? 일단 이쪽으로 와서 앉아라. 윤 선생, 차 한 잔 줄래?"
"예, 알겠습니다."
곧 기적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문정연과 얼굴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녀로부터 놀라운 말을 전해 들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적이 소리쳤다.
"누, 누구요? 총장님을 저더러 치료하라고요?"
"그래. 총장님, 이 선생한테 전화하기 전에 총장님이 전화를 하셨더라고. 이따 저녁에 물리치료실에서 치료를 받고 싶으시다고. 총장님이 테니스를 즐겨 치시는데 중요한 대회가 얼마 남지 않으셨대. 이번에 대회 꼭 나가셔야 한다고. 실력 좋은 물리치료사 좀 소개시켜 달라고 하시는데, 이 선생 생각이 딱 나지 뭐야?"
기적은 조금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문정연이 다급한 기색으로 말을 더했다.
"이건 기회야, 이 선생. 총장님 같은 VVIP를 치료할 기회가 쉽게 오는 줄 알아? 총장님만 만족시켜 봐. 그러면 이 선생은 어마어마한 줄을 잡는 거야. 총장님이 어떤 분인 줄 알잖아? 그 말로만 듣던 재벌 2세야, 재벌 2세. 이 선생, 아마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걸?"
세원대가 우리나라 굴지의 대기업인 삼화 그룹의 소유라는 사실은 기적 또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총장이라는 사람이 그 삼화 그룹의 후계자 중 한 명이라는 사실 역시도.
하지만 기적은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다. 별로 VVIP와 연줄을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까. 정상적인 루트를 통해서라면 몰라도 이런 식으로는 치료를 진행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글쎄요. 솔직히 별로 내키지 않는데요."
다만 문제는 문정연이었다.
"이 선생, 생각해 봐. 이건 우리 물리치료과의 명예가 달린 일이야. 총장님이 우리 학교에서 치료를 받고 싶으시다는데 그걸 만족시키지 못해 봐. 학교 내에서 우리 물리치료과의 위치가 어떻게 되겠어? 당장 지원금도 엄청 줄어들고 우리 과 정말 힘들어질 거야."
이번 일을 기회로 생각한 문정연은 집요하리만치 기적을 설득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내가 이렇게 빌게. 내 무릎이라도 꿇을까?"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수 있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기적은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대체 무슨 이해관계가 있기에 평소 도도하기만 했던 여교수가 제자에게 무릎을 꿇겠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고 하는 것일까? 이렇게 생각하니 마냥 거절하기는 힘들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들려온 메시지는 그에게 결정타를 날려 버렸다.
-돌발 퀘스트 [VVIP를 만족시켜라!]가 주어집니다.
-목표 : 단 한 번의 치료로 VVIP의 만족도를 80 이상으로 올리세요. 현재 만족도 (11/100)
-보상 : 정교수(명예직)가 될 기회.
-돌발 퀘스트를 받아들이겠습니까? 만약 퀘스트에 실패할 경우 문정연 교수의 신뢰를 잃게 됩니다.
'뭐지? 이 말도 안 되는 보상은?'
만약 보상이 그냥 교수가 될 기회였다면 기적도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정교수였다. 정교수는 보통의 교수가 아니다. 전임강사, 부교수 등 보통 우리가 교수라고 부르는 직책에서 두 번이나 승진을 해야 얻을 수 있는 고위 직책이다.
아무리 명예직이라고는 해도 쉽게 얻을 수 있는 직책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단번에 이런 직책을 주겠다고 하니 기적으로서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교수님 때문에 마냥 거절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정말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받아 버렸네?'
재벌 2세의 파워를 새삼 느끼며 기적은 입을 열었다.
"무릎을 꿇으시긴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도저히 거절하지 못하겠네요. 부족하지만 제가 한번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그 말에 문정연은 냉큼 손을 뻗어 기적의 손을 잡았다.
"꼭 총장님 마음을 휘어잡아야 해. 이 선생 이 두 손에 우리 과 운명이 걸렸어. 이 선생의 두 손이 우리 과를 살릴 수도, 또 죽일 수도 있다고.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기적은 심히 부담스러웠지만 하겠다고 한 마당에 자신 없다고 말할 수도 없어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 * *
그로부터 30분 후, 치료 준비를 마친 기적은 4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와 얼굴을 마주했다. 퀘스트가 말하는 VVIP, 즉 총장이 등장한 것이었다. 본관에서부터 총장을 수행해 온 문정연이 반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총장님, 여기 총장님을 치료해 줄 이기적 선생입니다. 치료 실력이 아주 좋습니다."
아무리 사람마다 대하는 자세와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지만 항상 당당했던 담당 교수의 극히 낮은 저자세는 기적의 반감을 높였다.
'도대체 총장이 뭐라고?'
그 반발심 때문일까? 기적은 문정연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총장을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세원대학교 물리치료과 졸업생 이기적입니다. 총장님을 뵙는 것은 처음이네요. 반갑습니다."
평소 환자를 대하는 태도, 기적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모습으로 총장을 맞이했다.
그러자 총장의 얼굴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이채가 어렸다. 그것이 긍정적인 의미일까? 부정적인 의미일까? 문정연은 그 의미를 알 수 없어 남몰래 애를 태웠다.
하지만 기적은 달랐다. 기적은 극히 미세하지만 총장이 자신의 태도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갑자기 떠오른 메시지 때문이었다.
-VVIP의 만족도가 1만큼 상승합니다. 현재 만족도 (12/100)
아무래도 이번 퀘스트는 실시간으로 환자의 만족도를 알려 줄 모양이었다.
총장은 문정연이 준비해 놓은 의자에 풀썩 몸을 기댔다. 그러고는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기적의 인사를 받았다.
"오! 우리 학교 졸업생이라고? 그런데 생각보다 젊네? 몇 살이에요?"
"올해 서른 됐습니다."
총장은 오른 손가락으로 왼쪽 손가락을 살살 구부러뜨리며 말했다.
"서른? 나는 학생인 줄 알았네. 문 교수님, 너무 젊은 거 아니에요? 이렇게 젊은 친구가 나를 치료해도 되는 거예요?"
문정연이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호호, 이 선생이 조금 젊기는 한데 치료를 정말 잘합니다. 지난번에 동문 체육 대회에서 우리 과 교수가 허리를 다쳤는데 기어서 들어와서는 뛰어서 나갔습니다."
총장은 또 껄껄 웃었다.
"우리 문 교수님, 낚시꾼도 아니고 허풍이 심하네요. 어떻게 기어 들어온 사람이 뛰어 나갑니까? 에이, 안 믿어."
그리고 그 순간 또 한 번 메시지가 들려왔다.
-VVIP의 만족도가 2만큼 하락합니다. 현재 만족도 (10/100)
기적은 들려오는 메시지에 내심 한숨을 쉬었다.
'교수님…… 잘하라더니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를 하고 있네.'
어쩐지 쩔쩔매고 있는 문정연을 슬쩍 바라본 기적은 결국 직접 나서기로 했다.
"치료는 나이순이 아니지 않습니까? 젊어도 치료에는 자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까 교수님이 했던 말, 허풍이 아니라 진짜입니다. 아마 총장님도 곧 그걸 느끼시게 될 겁니다."
총장은 껄껄 웃었다.
"젊은 친구라 그런지 패기가 넘치네. 그래, 어디 치료받아 봅시다. 내가 웃으며 나가는지 어떨지."
"그러죠."
기적은 눈치를 주는 문정연의 시선을 외면하며 스튤을 가져와 총장의 옆에 앉았다.
"보니까 왼손잡이시네요?"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순간.
-VVIP의 만족도가 3상승합니다. 현재 만족도 (13/100)
VVIP의 만족도가 상승했다는 메시지가 들려왔다. 그리고 흥미롭다는 듯한 총장의 목소리도 연이어 들려왔다.
"어? 왜 그렇게 생각했지? 내가 다친 쪽은 오른 손목인데?"
기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다친 부위를 보니까 미끄러질 때 바닥을 짚으면서 염좌를 당하셨어요. 왼손에는 테니스 라켓을 잡으셨을 테니까 오른손으로 짚으셨겠죠? 그래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말에 총장이 검지를 움직여 기적을 가리켰다. 빙고! 즉, 정답이라는 말이었다.
분위기가 좋아지자 문정연이 끼어들었다.
"정말 다행이네요, 총장님. 오른 손목이시면 테니스 치는 거랑은 큰 상관이 없어서요."
그 말에 기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평소 그렇게나 똑똑하고 도도했던 문 교수가 오늘 이 자리에서만큼은 바보 천치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제 생각이긴 하지만 총장님은 양손 백핸드를 하실 거예요. 그리고 테니스는 수도 없이 전력 질주를 해야 하는 스포츠입니다. 왼손으로 치신다고 해도 오른 손목이 아프다면 경기력에 큰 영향을 끼치게 마련입니다."
총장은 다시 한 번 검지로 기적을 가리켰고, 기적은 본격적인 치료를 시작했다. 문진이 그 시작이었다.
"다치신 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어떤 동작을 하실 때 통증을 느끼시나요?"
그 다음에는 촉진.
"혹시 여기 통증 느껴지세요?"
"이쪽으로 이렇게 움직이시면 어떤가요?"
"여기를 이렇게 두드리면요?"
처음 진단을 시작할 때만 해도 기적은 가벼운 염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진과 촉진을 해 본 결과 생각은 완전히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