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물리치료사-148화 (148/205)

# 148

흑심을 품은 사람들 (8)

설상가상,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말이 있다. 어려운 일이 겹치고 환란이 계속된다는 뜻으로, 불운이 겹친 허경숙 같은 경우를 정확한 예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또 이런 말이 있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 있고,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지금은 힘들어도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 거라는 뜻이었다.

허경숙에게도 그런 날이 찾아왔다. 그 시작은 기적과의 만남이었다.

기적과의 만남으로 걷지 못했던 다리를 다시 쓰게 되었고, 복지과 사무관 이준혁을 통해서 이 사실이 전파를 타게 되었으며, 이를 본 목격자가 경찰에 증언을 하며 미궁에 빠졌던 뺑소니 범을 검거할 수 있었으니까.

합의금 명목으로 적지 않은 돈이 나왔고,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은 덕분인지 허경숙의 다리 상태는 하루가 다르게 좋아졌다.

좋은 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것이다. 잔뜩 먹구름이 드리웠던 허경숙의 얼굴에도 서서히 밝은 빛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선생님을 만나고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네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기적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행복하게 잘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나쁜 생각은 하지 마시고요."

허경숙은 고개를 끄덕였고, 기적은 자연스레 화제를 전환했다.

"그리고 오늘은 잘 걸어 주셨으면 좋겠고요."

바로 오늘.

오늘은 기적이 예고했던 대로 게이트를 하는 날이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의 힘으로 걷는 독립적인 게이트를.

충분히 할 수 있는 능력이 된다고 판단한 기적이 오늘을 D-day로 정한 것이다.

"잘 걸어 보겠습니다……."

이를 기억하고 있던 허경숙은 긴장이 되는지 몇 차례 심호흡을 했다.

자신의 하지 근력이 이전과는 달라졌다는 사실 정도는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오랜만에 해 보는 나 홀로 걸음은 그녀에게 적잖은 부담감을 안겨 주고 있었다.

"……!"

하지만 허경숙은 이내 무거운 다리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내 한 발을 내딛었다.

그것은 단순한 한 걸음이 아니었다.

자신의 앞을 막고 있는 모든 역경들과 싸우고, 또 이겨 내겠다는 의미가 담긴 한 걸음이었다. 그 한 걸음이 많은 것들을 바꿔 놓았다.

분명 딱 한 걸음이었다. 그런데 그 걸음을 내딛은 순간 허경숙의 마음가짐은 완전히 달라졌다.

'내가 할 수 있을까?'에서, '나는 할 수 있다!'로.

자신감이 차올랐고, 무거웠던 다리가 짐을 덜어 낸 것처럼 가벼워졌다.

일순 그녀의 시선으로 두 손을 꼭 붙잡고 지켜보고 있는 두 딸의 모습이 보였다.

허경숙은 그런 두 딸들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신감이 있기에 지을 수 있는 미소였다. 두 딸들과 함께라면 그 어떤 역경도 헤쳐 나갈 자신이 있는 그녀였다.

기적은 잔뜩 긴장한 채 허경숙의 뒤를 따라붙었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방지하는 차원에서였다.

다만 그 행동은 오래지 않아 그 의미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너무나도 안정적으로 걸음을 옮기는 허경숙의 게이트 앞에서 기적의 존재는 무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반가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퀘스트 [흑심을 품은 사람들]의 달성 조건을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선행 업체로 선정될 기회가 주어집니다.

-보상으로 또 다른 SCI 환자와 인연을 맺을 기회가 주어집니다.

-보상으로 레벨 업 확정권이 주어집니다.

퀘스트가 완료되었고, 이에 대한 보상이 주어진다는 메시지였다.

물론 주어진 보상에 대한 감상을 할 시간은 없었다. 아직 치료가 진행 중이었으니까.

단순히 걷는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허경숙 정도의 레벨과 아시아 스케일 환자라면 단순히 걷는 것에 만족하기보다는 그 자세에 더 신경 쓸 필요가 있었다.

"허경숙 님, 오른 다리는 너무 끌리고 왼쪽 다리는 너무 높이 들어 올리고 있어요. 혼자 걸을 수 있다는 건 이제 충분히 알겠으니까 그쪽에 앉아 보세요. 조금 더 효율적으로 걸을 수 있도록 다리를 세팅해야겠어요."

물론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기적은 그 분야의 전문가였으니까. 허경숙을 자리에 앉힌 기적은 마에스트로처럼 능숙하게 운동을 시키기 시작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허경숙의 게이트는 점차 완성도를 더해 갔다.

"자, 일어나 보세요. 다시 걸어 볼게요."

그리고 그렇게 20여 분이 지났을 때 허경숙은 달라진 게이트를 명확히 확인할 수 있었다.

발을 내딛는 순간, 이전과는 뭔가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단번에 느낀 것이었다.

이후부터는 그를 거쳐 갔던 많은 환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이 이어졌다.

"어? 어! 걸음이 좋아졌어요. 제 걸음이 좋아졌어요, 선생님! 다리에 힘이 가득 들어가요. 불안했던 느낌도 사라졌고요!"

허경숙은 마치 마법이라도 경험한 사람처럼 호들갑을 떨어 댔다.

본래 조용한 성격의 그녀였으나 지금의 놀라운 경험은 도저히 입을 닫고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신기한 것이었다.

두 딸도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다만 표현 방식은 달랐다.

멀찍이서 엄마의 걸음을 지켜본 두 소녀는 몰라보게 좋아졌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약속이라도 한 듯 눈가를 훔치고 있었다.

아직 어리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엄마가 거친 가시밭길을 먼저 걸어 나가며 자신들을 위해 양탄자를 깔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덕분에 자신들이 앞을 향해 계속 걸어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적당한 타이밍에 기적이 탄성을 내뱉었다.

"이야~ 잘 걸으시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팠던 사람이라고 생각도 못 할 정도예요. 안 그래? 수연아, 지연아?"

그 질문에 수연이와 지연이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입으로는 웃고 있는 모습이 꽤나 이상하게 보였으나 아무려면 어떻겠는가? 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의 모든 관심은 오로지 허경숙만을 향하고 있었다.

* * *

퀘스트를 완료한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다음 날 곧바로 전화가 걸려 왔다. 그 주인공은 바로 복지과 사무관 이준혁이었다.

-센터장님, 안녕하십니까? 그동안 잘 지내셨죠?

"네, 물론입니다. 사무관님도 잘 지내셨죠?

-예예. 저야 센터장님 덕분에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저 때문에요? 제가 왜요?"

-우선 센터장님이 힐링 센터 명으로 기부해 주신 5백만 원. 어떻게 하면 이웃들에게 잘 전달할 수 있을까 계획을 세우느라 바쁘고요. 그리고 선행 업체 선정 건 때문에 바쁩니다. 오늘 전화를 드린 것도 다름이 아니고 선행 업체 선정 건 때문입니다.

기적이 짧게 탄성을 터뜨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자 이준혁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기쁜 소식일지 모르겠습니다. 힐링 센터가 보건복지부에서 선정하는 선행 업체로 선정되었습니다. 복건복지부 장관 명으로 표창장이 전달될 거고요. 아마 보건복지부 차원에서 간단한 인터뷰가 있을 겁니다.

"보건복지부요? 일이 굉장히 커진 느낌이네요?"

-예, 뭐. 하는 김에 제대로 하자는 차원에서 신경 좀 썼습니다. 기왕이면 높은 사람한테 받으면 좋잖아요.

"예, 뭐. 그야 그렇죠. 그런데 좀 부담스럽기는 하네요. 별로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고작 5백만 원 기부한 건데……. 막 몇천만 원씩 기부하는 분들도 많던데요."

-하하하, 그런 사람들은 진짜 돈 많은 사람들이고요. 돈의 가치가 다 다르지 않습니까? 누군가에게는 단 돈 10만 원도 큰돈일 수 있고요. 누군가에게는 억이라는 큰돈도 별거 아닐 수 있습니다. 잘 아시잖아요?

"그런가요? 듣고 보니 그러네요. 그럼 그 표창 감사히 받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아! 그리고 허경숙 님 말입니다. 정말 좋아지셨더라고요. 어제 복지과에 찾아오셨는데 저는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걷지도 못했던 분이 멀쩡히 걸어오셔서 장애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는데……. 와~ 센터장님, 실력이 좋으시리라는 건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는데 진짜 장난 아니네요. 혈전도 발견해 내셨다면서요? 수연이랑 지연이가 센터장님의 열렬한 팬이 되었던데요? 센터장님이 팥으로 메주를 쑤라고 해도 그럴 기세예요.

기적은 멋쩍은 표정으로 '아니에요.'만 연발했다. 하지만 이준혁의 칭찬 공세는 계속되었다.

-몸 상태가 좋아진 것도 좋아진 거지만 제가 정말 놀란 것은 허경숙 님의 태도입니다. 항상 주눅이 들어 계시던 분이거든요. 그리고 남한테 뭐 부탁하는 거 아예 못 하시던 분인데……. 일자리도 알아봐 달라고 하시고 많이 당당해지셨더라고요. 성격이 완전히 달라지신 것 같아서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그 말 앞에서는 기적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부분은 좀 신경을 썼습니다. 힐링 센터는 몸과 마음 모두를 힐링 해 주는 곳이거든요.

-하하하, 그렇습니까? 수연이와 지연이가 저한테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났다고. 그 말이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말이 이기적이라는 사람을 만났다고도 해석되고, 말 그대로 미라클, 기적을 만났다고도 해석이 됐거든요.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과연 이기적이라는 사람을 만난 것이 좋은 일일까? 미라클, 기적을 만난 것이 좋은 일일까? 아마 두 사람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둘에게는 이기적이라는 사람 자체가 바로 기적이었을 테니까요.

기적이 바로 기적(miracle)이다. 기적으로서는 최고의 칭찬을 들은 셈이었다. 어느덧 기적은 사람들에게 기적(miracle)을 일으키는 사람, 기적(?)의 물리치료사가 되어 있었다.

* * *

대형 마트 지하 주차장.

그곳에서는 중년 여자 1명이 서서 주차 관리에 힘을 쏟고 있었다.

하얀 장갑을 끼고 모자를 눌러쓴 여자가 쉬지 않고 밀려드는 자동차들과 씨름을 벌이고 있었다.

주차장 상태를 확인하고, 적절한 양의 자동차를 들여보내고, 다시 막고, 다른 방향에서 들어오는 차를 들여보내고. 여자는 정말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워낙 많은 양의 차가 들어오는 만큼 주차 관리 일을 하다보면 정말 다양한 케이스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장애인 주차 구역에 차를 대는 일반인, 주차 구역이 아닌 구역에 주차를 하는 사람, 쓰레기를 투하하는 사람,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까지. 정말 천태만상의 진상들이 존재한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가능성이 높지는 않지만 몰랐을 수도 있으니까.

주차 관리인으로서 당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면 된다.

문제는 십중팔구의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이기보다는 화를 낸다는 데 있다. 내가 한다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냐며 되려 갑질을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주차 관리인이라는 직업은 정말 극한 직업이다. 하지만 예의 여자는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일을 하고 있었다.

여자의 표정이 좋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여자는 알고 있는 것이었다, 진상을 피우는 사람도 많지만 그에 못지않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앞을 지나가던 차가 잠시 멈추고, 창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어린아이 하나가 수줍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에는 시원한 음료가 들려 있었다.

"이거 드시고 하세요!"

"감사합니다, 고객님."

여자가 웃음을 지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손님들 덕분이었다.

사람들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사실 여자는 장애 판정을 받은 사람이었다. 실제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스로 몸을 일으키지도 못했을 정도였다.

뺑소니 사고를 당해 SCI 판정을 받았고, 제대로 치료를 하지 못한 탓에 상태가 최악으로 치달은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셈일까? 지금 여자는 당당히 두 발로 서서 주차 관리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어떻게 저렇듯 걸음을 옮길 수가 있지? 여자의 상태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여자를 보며 '기적'이라고 수군거렸다.

그리고 그런 여자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기적이었다. 기적은 여자의 손짓에 따라 핸들을 돌리며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여자, 즉 허경숙은 그를 보지 못했고, 그가 왔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 그녀는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기적은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기적은 백미러를 통해 다음 차량을 안내하고 있는 허경숙을 보며 씨익 웃었다.

'부디 더 이상의 불운은 없기를. 아름다운 세상을 아름답게 살아가기를.'

오늘도 기적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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