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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물리치료사-144화 (144/205)

# 144

흑심을 품은 사람들 (4)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제가 몸이 불편해서 도와드리지도 못하고…… 따뜻한 커피라도 한 잔씩 드시고 가세요."

연탄 배달을 끝냈을 때 자매의 어머니인 허경숙이 휠체어를 끌고 나타나 한 말이었다. 이에 이준혁이 일행을 둘러보며 물었다.

"예정보다 일찍 끝나긴 했는데 시간 괜찮으시면 커피 한 잔 하고 가실래요?"

김대규가 말했다.

"그러면 저는 따뜻한 아이스커피로 부탁드립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커피를 주문했고, 허경숙은 이내 휠체어를 굴려 집 안으로 사라졌다. 기적이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볼 때 김해인이 목소리를 냈다.

"삼촌, 따뜻한 아이스커피는 뭐야? 정신 안 차려?"

"어? 그러네…… 네가 이해해라. 어느 커플이 정신 건강에 해로운 짓을 해 가지고. 이 삼촌이 정신적 충격이 크다."

김대규가 말하는 커플이란 기적과 수정을 일컫는 것이었다. 그러자 김해인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누구 말하는지 알겠다. 두 사람 심하긴 하더라. 염장 레벨이 거의 만렙이었어."

사람들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는 수정을 슬쩍 바라본 기적이 앞으로 나섰다.

"누구 말씀하시는 거예요?"

"누구긴 누구예요? 거기 얼굴에 연탄 치덕치덕 바른 두 사람 말하는 거지. 아주 연인 놀이가 심하시더라고, 두 사람 사귀어요?"

그 말에 사람들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그 바람에 기적과 수정의 얼굴은 붉게 물들었다.

얼굴에 잔뜩 바른 연탄 덕분에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어색한 분위기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김대규가 손가락을 들어 두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 대답 못 하네? 얼레리 꼴레리. 얼레리 꼴레리."

"아니, 그게 아니라……."

곤란한 상황에 빠진 기적과 수정을 구해 준 것은 수연, 지연 자매였다.

"커피 나왔습니다. 커피 드세요."

두 자매가 쟁반에 커피를 들고 나타난 것이었다. 사람들의 손에 하나둘 커피가 전달되었고, 기적이 마지막으로 커피를 받아들었다.

때를 기다렸던 김대규가 다시 기적에게 공격을 시작하려는 찰나였다. 그보다 한 템포 빠르게 기적이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그런데 혹시 어머니가 무슨 사고라도 당하셨나요? 다리를 못 쓰시는 것 같은데?"

그러자 수연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 네. 새벽에 일하시다가 뺑소니 당하셨어요. 원래는 이 정도로 다리를 못 쓰시지는 않으셨는데, 요즘에는 거의 못 걸으세요."

타이밍을 놓친 김대규는 분위기상 입을 다물었고, 기적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뺑소니…… 보니까 원래부터 다리를 못 쓰시던 것 같지는 않은데…… 사고 이후에 치료를 거의 못 받으셨죠?"

"네, 맞아요. 의사 선생님도 걷는 데는 지장이 없을 거라고 하셨는데, 치료를 못 해서 그런지 요즘에는 거의 못 걸어 다니고 계세요."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이유야 묻지 않아도 뻔했다. 한숨을 내쉰 기적이 말했다.

"우리 센터에서 치료를 받아 보는 것은 어떨까요?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수연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싶어 눈만 껌뻑였다. 마음 같아서야 무슨 도움이든 받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기적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도 잘 모르는 데다 안 그래도 도움을 받은 상황에서 또 도움을 받는다고 하기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이를 눈치챈 이준혁이 앞으로 나섰다.

"수연아, 얼른 그러겠다고 말해. 이 선생님 엄청 유명한 물리치료사 선생님이시거든. 개인적으로 센터를 운영하시는데 이 선생님에게 치료받으면 못 걷던 사람들도 걷는다고 소문이 자자해."

그러나 수연이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그런데…… 얼만데요? 치료받는데……."

발생하는 치료비를 걱정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걱정은 의미 없는 것이었다.

애초에 돈을 받을 생각으로 물어본 것이 아니었으니까. 이를 잘 알고 있는 수정이 재빨리 나섰다.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치료비는 받지 않을 거니까요. 그죠, 센터장님?"

기적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치료비는 받지 않을 생각입니다. 치료비를 받을 생각이었다면 물어보지도 않았을 겁니다."

"자, 잠시만요……."

수연은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갔고, 잠시 후 동생 지연과 함께 허경숙의 휠체어를 밀고 기적에게로 다가왔다. 그러나 기적을 향해 말하는 허경숙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이야기 들었습니다. 말씀은 고맙지만 그럴 수는 없어요. 벌써 적잖은 도움을 받았는데 더 신세를 질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요."

그 모습이 어찌나 완강했는지 기적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기적을 대신해 허경숙을 설득한 것은 수연, 지연 자매였다. 거의 울 듯한 얼굴로 수연이 말했다.

"엄마, 그냥 치료받자. 엄청 잘하시는 선생님이래…… 엄마 이대로 방치하면 다리 영영 못 쓰게 될지도 몰라. 나 그런 거 싫단 말이야."

"……."

지연도 거들었다.

"제발, 엄마…… 선생님이 그렇게 해 주시겠다잖아. 자꾸 거절하다가 선생님이 안 해 주신다고 하면 어떻게 해."

두 자매의 설득에 허경숙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없이 살아도 남에게는 손 벌리지 않고 살아온 허경숙이었다.

아마 두 딸이 아니었다면 얼어 죽을지언정 주민 센터에 연탄 지원을 신청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조선 시대 선비도 아니고 뭐 그러냐고 하겠지만 허경숙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허경숙의 그런 마음은 두 딸의 설득 앞에서 힘을 잃어 가고 있었다.

"철없는 소리들을 하고 있니…… 어떻게……."

더구나, 그녀라고 왜 두렵지 않겠는가? 점차 힘을 잃어 가는 두 다리가. 다시는 걸을 수 없을지도 모르는 현실이 말이다.

허경숙이 흔들린다는 것을 눈치챈 기적이 말을 보탰다.

"치료받으세요. 큰돈을 벌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픈 사람들 치료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입니다. 아픈 게 어머니 잘못은 아니잖아요. 정 마음에 걸리시면 치료받으신 다음에, 두 다리로 서신 다음에 갚으셔도 되잖아요."

이준혁도 거들고 나섰다.

"센터장님, 그렇게 해 주시면 제가 상부에 건의해서 선행 업체로 지정해 드릴게요. 뭐, 그런 거 없어도 센터는 잘되고 계시고 앞으로도 잘되시겠지만 그래도 도움이 될 겁니다."

"어, 그래요? 선행 업체 해 주시면 저야 좋죠."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허경숙은 두 눈 앞이 뿌옇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느끼고 있었다.

모두가, 심지어는 하늘마저도 등을 돌렸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자신의 판단 착오였다는 사실을. 아직 세상은 충분히 따뜻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동시에 그녀는 생각했다. 눈앞의 이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신세를 져도 좋겠다고 말이다. 허경숙이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일순 기적의 눈앞에 알림 창이 떠올랐다.

-퀘스트 [흑심을 품은 사람들]이 주어집니다.

-목표 : 환자의 독립적인 게이트를 가능하게 만드세요.

-보상: 선행 업체로 선정될 기회, 또 다른 SCI 환자와 인연을 맺을 기회. 레벨 업 확정권.

새로운 퀘스트가 주어진다는 메시지였다. 나쁠 것은 없었다. 안 그래도 하려던 일인데 거기에 보상까지 준다고 하니 반갑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기적은 고민할 것도 없이 퀘스트 창을 지워 버린 뒤 허경숙을 향해 말을 건넸다.

"어? 우세요? 왜 울고 그러세요?"

"아닙니다. 흑흑, 너무 감사해서 그럽니다."

"아직 뭐 해 드린 것도 없는데요."

기적으로서는 어디까지나 허경숙을 다독이기 위해서 한 말이었다. 하지만 본의와는 다르게 허경숙의 눈물은 더욱 거세지기만 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눈물은 전염되었다, 허경숙의 좌우에 있던 수연, 지연 자매에게로.

"센터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 엄마를 치료해 주셔서요."

"저도 감사합니다. 엄마를 꼭 걷게 해 주세요."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 여자, 수정과 유진, 그리고 해인까지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훔쳤다.

장내가 때아닌 바다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유달리 염분기가 많이 섞인 바다였다.

그날 저녁.

흑심을 품었던 기적은 집으로 돌아가 잠시 휴식을 취하다, 저녁 6시 다시 집 밖으로 나섰다. 남은 크리스마스이브를 수정과 보내기 위함이었다.

차를 끌고 이동한 기적은 수정을 픽업했고, 그 시간부로 데이트가 시작되었다.

핸들을 돌리며 기적이 말했다.

"시간이 많지 않네요. 서둘러야 해요."

이해가 되지 않았을까, 수정이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하세요? 뜬금없이. 시간이 왜요?"

"아버님한테 문자왔거든요. 우리 수정이 일찍 들여보내라고. 10시 이전에 들여보내라고."

그 말에 수정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마에 손을 짚었다.

"아빠도 참…… 죄송해요. 아빠가 절 너무 많이 사랑하셔서 그래요."

"흐흐, 이해합니다. 딸 키우는 아버지 마음이 다 그런 거죠. 어차피 하루 종일 같이 있었잖아요. 10시 이후부터는 가족에게 양보해야죠. 수정 샘 외동딸이잖아요."

"아~ 알겠어요. 그럼 진짜 시간이 별로 없네요. 허리 업!"

수정이 마치 카우보이처럼 손을 돌리며 말했다. 이에 기적은 가속 페달을 밟았고, 그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기적이 오늘을 위해 예약해 둔 레스토랑에.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서며 수정이 살짝 감탄성을 내뱉었다.

"와~ 저 여기 처음 와 봐요."

"왜요? 집 근처라 자주 와 봤을 것 같은데?"

"아빠는 이런 곳보다 소주 파는 곳을 좋아하셔서요. 실장님도 잘 아시잖아요?"

"아……."

문제의 그날을 떠올린 기적이 곤란한 듯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측컨대 이 일은 두고두고 자신의 아킬레스건이 될 것 같았다. 따가운 시선을 외면하는 기적을 구해 준 것은 마침맞게 찾아온 웨이트리스였다.

"예약하셨나요?"

"네, 예약했습니다. 정수정으로 했습니다."

정수정이라는 말에 웨이트리스가 반짝 눈을 빛냈다.

"아! 정수정 님 오셨군요. 자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어쩐지 웨이트리스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았지만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수정은 웨이트리스를 따라 자리로 이동했다.

자리는 훌륭했다. 건물 38층에 자리한 만큼 고층에서 창밖의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명당 중의 명당이었다.

"좋은 자리 잡으셨네요? 날이 날이라 예약하기 힘들었을 텐데?"

"아…… 뭐, 미리미리 신경 좀 썼습니다."

수정이 밝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히히, 대접받는 느낌이라 좋네요. 그런데 왜 이름을 정수정으로 예약했어요?"

"그냥요. 아시다시피 이기적이라고 하면 항상 돌아오는 반응이 있어서 그냥 정수정으로 했어요."

"아…… 하긴…… 헤헤."

이기적이라는 이름을 떠올린 수정이 장난기 짙은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웨이트리스가 메뉴판을 들고 다가왔고, 두 사람은 추천을 받으며 기분 좋게 오늘 먹을 음식들을 골랐다.

"그러면 세트 B 요리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분명히 만족하실 거예요."

"네네, 감사합니당~!"

그렇게 대답할 때만 해도 수정은 알지 못했다. 웨이트리스가 말한 만족할 거라는 말의 의미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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