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
흑심을 품은 사람들 (2)
"유진 샘, 저 마지막 타임 누구죠?"
기적의 질문에 데스크에 앉아 있던 유진이 재빨리 시간표를 확인했다.
"다음 회원님은…… 오세희 님요."
물론 그녀는 질문의 요지가 회원의 이름을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처음 방문하는 회원님이세요. 근육통이 있어서 케어를 좀 받고 싶다고 메모되어 있네요."
"아…… 고등학생 맞죠?"
"네, 네. 열일곱 살, 고 1이에요."
표정이 밝아진 기적이 쉬쉬하듯 손으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그럼 지금 막 들어오시는 하얀 줄 3개가 있는 트레이닝복 입은 학생이 오세희 학생 맞겠죠?"
그 말에 유진은 입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곧 앳된 얼굴에 기적의 말대로 일명 '삼디다스' 트레이닝복을 입은 여학생이 엄마로 보이는 중년 여성과 함께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맞는 것 같아요!"
"역시 그렇죠?"
기적은 흐음 하고 소리를 내며 오세희로 추정되는 학생이 걸어오는 모습을 관찰했다.
걸음걸이는 어떤지, 전체적인 자세는 어떤지, 시선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등을 살피며 왜 그녀가 쉽게 피로감을 느끼는 것인지 파악에 들어간 것이다. 그 덕분에 그는 오세희가 데스크에 도착했을 때 많은 것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오세희 학생이죠?"
"네."
"목과 어깨가 쉽게 피로해져서 왔고요?"
기적이 그렇게 말했을 때 유진은 생각했다, '어?' 근육통이 있다고 했지, 목과 어깨라고는 안 했는데? 라고.
그러나 오세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맞아요. 상체 쪽이 다 아픈데 목과 어깨 쪽이 특히 피곤해요."
중년 여자가 작게 박수를 치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 선생님이 그렇게 용하다고 하더니 진짜 용하시네. 점쟁이가 따로 없으셔. 어떻게 아셨대요?"
말하지도 않은 사실을 기적이 척척 알아내자 두 여자의 표정은 환하게 밝아졌다. 모르긴 몰라도 기적에 대한 신뢰도가 대폭 상승한 것 같았다.
그러나 기적의 표정은 신중하기만 했다. 몇 가지 집히는 점들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세운 가설이 사실이라면 상황은 그렇게 긍정적이지 않았다.
다만 괜한 말로 좋은 분위기를 깰 필요는 없었다. 일단은 정확한 진단을 내리는 것이 우선이었다. 생각을 마친 기적이 비어 있는 베드를 가리켰다.
"아…… 들어오시는 모습을 보고 힌트를 얻었습니다. 그건 그렇고…… 일단 이쪽으로 와 볼까요? 목과 어깨가 왜 쉽게 피곤해지는지 한번 자세히 알아볼게요."
첫 방문이었지만 오세희는 별다른 어색함 없이 기적의 말을 잘 따랐다. 그 사실을 느낀 기적이 넌지시 말했다.
"혹시 이전에도 센터 같은 곳 다녔나요?"
그 말에 대답한 것은 오세희의 엄마였다.
"네, 네. 센터에서 퍼스널 트레이닝 자주 받았어요. 얘가 자꾸 피곤하다고 하니까 PT 받아 보라고 한 거죠. 지금도 꾸준히 받고 있고요."
기적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트레이너가 별말 안 하던가요?"
"별다른 말요? 무슨 말이요? 그냥 잘하고 있다고만 하던데요. 그치, 세희야? 뭐 들은 말 없지?"
"네, 없어요. 그냥 운동 잘하고 있다고만…… 제가 목과 어깨 쪽이 좀 피곤하다고 하면…… 네 나이 때 근육통은 금방 좋아진다고만……."
기적은 조금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음…… 제가 보기에 세희 양은 근육통이 아니에요."
무거운 음성 때문이었을까? 엄마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근육통이 아니면요? 근육통이 아니면 뭔데요?"
"척추 측만증입니다."
척추 측만증은 말 그대로 척추가 옆으로 휘어지는 질환이다. 다행히 척추 측만증은 척추 전만증이나 후만증처럼 디스크를 유발시키는 질환은 아니었다.
근육통이나 호흡 곤란, 소화 불량 등의 문제를 일으키기는 하지만 그 정도가 엄청 심한 것은 아니어서 그냥 둬도 엄청난 문제가 생기거나 하지는 않는다.
다만 심미적인 측면에서는 큰 문제가 있다. 척추가 옆으로 휘게 되면서 어깨의 높낮이가 달라지고 한쪽 등이 꼽추처럼 튀어나올 수 있기 때문에 보기에 굉장히 안 좋을 수가 있다.
물론 아직까지 오세희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이런 일을 전문으로 하는 기적의 눈에야 단번에 보였지만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그렇게 티가 나지는 않는 정도였다.
하지만 측만 증상은 방치할수록 심해지기 때문에 조속한 치료가 필요했다. 특히 오세희처럼 근력이 약할 수 있는 사춘기 소녀라면 더.
"척추 측만증? 우리 세희 척추가 옆으로 휘었다 이 말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아직 심하지는 않은데 방치하면 더 심해질 수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꼽추처럼 등이 굽을 수도 있어요."
"뭐요, 꼽추?"
사춘기 척추 측만증은 결코 쉽게 생각할 질환이 아니다. 기적은 경각심을 주기 위해 꼽추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엄마는 그 말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별 소리를 다 듣겠네. 세희 어디가 꼽추라는 거예요, 지금?"
"지금 꼽추라는 것이 아니고 방치하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말을 드리는 겁니다."
기적은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했지만 여자는 듣고 싶은 말만 선택적으로 듣는 고급 스킬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 또 꼽추? 이 사람 진짜 안 되겠네. 우리 세희 어디가 꼽추라는 거예요, 지금?"
듣다 못한 오세희가 한마디 했다.
"엄마…… 지금 꼽추라는 게 아니고……."
물론 그 말은 가볍게 차단되었다.
"너는 가만히 있어 봐. 지금 이 사람이 너더러 꼽추라고 하잖아! 너는 열받지도 않아?"
"아니, 그게 아니라……."
기적은 여자의 완강한 태도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침묵은 여자의 전투력을 더욱 상승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왜 아무 말이 없어요? 당장 사과하세요!"
"기분이 나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관리를 할 필……."
기적은 당황스런 와중에도 관리의 필요성을 역설하려고 했다. 하지만 전투력이 상승한 여자는 단박에 그 말을 잘라 버렸다.
"일 없어요. 아무래도 내가 잘못 찾아왔나 봐요. 이만 돌아갈 테니 오늘 받은 거나 결재해 줘요."
기적도 사람이었다. 호의를 가지고 이야기했는데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아무리 그라도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른 곳에 가시더라도 척추 측만증은 꼭 치료받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오히려 역효과만 낼 것 같아 이내 생각을 바꿨다.
"정 그러시면 어쩔 수 없죠. 회원님께서 전혀 만족을 못 하겠다고 하시니까 돈은 받지 않겠습니다. 그냥 돌아가시면 됩니다."
기적의 말에 여자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냉랭하게 센터를 나섰다. 오세희는 뭔가 마음에 걸리는지 몇 번이나 기적 쪽을 돌아보았지만 잔뜩 성이 난 엄마를 어찌할 수는 없었는지 이내 센터를 나섰다.
그 모습에 황당함을 느낀 것은 비단 기적뿐만은 아니었다. 마지막 타임이 비어 있어 상황을 지켜보았던 수정과 진욱, 유진 또한 여자의 모습에서 황당함을 느꼈다.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3명이 기적을 향해 다가왔다.
"이상한 사람이네……."
"왜 자기 말만 하고 남의 말은 듣지를 않지? 센터장님, 괜찮으세요?"
기적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이런 날도 있는 거죠, 뭐. 그보다…… 슬슬 마무리하죠. 내일은 특히 바쁠 텐데 조금이라도 일찍 마쳐 봐요."
내일은 특히 바쁘다는 기적의 말에 수정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 크리스마스이브에 봉사 활동을 하게 될 줄이야…… 일주일 전만 해도 상상도 못 했던 일이네요."
수정이 말하는 봉사 활동이란 바로 연탄 배달을 일컫는 것이었다.
연말을 맞이해 뭔가 좋은 일을 할 수 없을까? 고민하던 기적이 과거 후원금을 신청으로 인연을 맺었던 주민 센터 복지과 직원에게 연락을 취했고, 둘이 함께 이번 일을 벌인 것이었다.
기적은 김대규에게 할증 명목으로 받은 150만 원을 투자해 불우한 이웃들에게 연탄 2천 장을 돌리겠다는 계획을 세웠고, 이 계획에 직원들을 끌어들인 것이었다.
"그래도 이브 오후부터 2박 3일 동안 쉬잖아요. 그걸 생각해야죠."
크리스마스이브와 크리스마스 당일.
기적은 통 큰 결정을 내렸다. 이브와 크리스마스가 월요일, 화요일인 만큼 두 날 예약을 받지 않아 수요일까지 3일 연휴를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한 사실 앞에서 직원들의 불만은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수정이 우디르처럼 빠른 태세 전환 능력을 보여 주었다. 소매를 걷어 올리며 그녀가 말했다.
"그래서 몇 시까지, 어디로 모이면 되나요?"
180도 달라진 수정의 모습에 기적은 물론 진욱과 유진 또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100년만의 혹한이라고 불리는 추운 겨울이었지만 오늘도 힐링 센터에는 따뜻한 훈풍이 불고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기적을 포함한 역전의 용사들은 주민 센터 주차장에서 얼굴을 마주했다. 그런데 나타난 이들은 비단 힐링 센터 직원들 뿐만은 아니었다.
"김대규 선수,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인 선수도 감사합니다!"
김대규와 김해인이 귀한 시간을 내서 연탄 봉사에 참여하기로 한 것이다.
기적이 김대규의 돈으로 연탄 봉사를 계획했다는 사실을 알렸고, 이에 김대규가 함께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면서 연탄 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흐흐, 감사는요. 좋은 일을 하겠다고 하는데 제가 당연히 참가해야죠. 이름만 올리면 되겠습니까?"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 김대규를 보며 기적은 살짝 웃었다. 그러자 이를 발견한 김대규가 어? 하며 물었다.
"왜 웃습니까?"
"아……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서요. 어쩐지 지금이랑은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말에 김대규는 떠올렸다, 세상 다 가진 듯 건방진 태도로 일관했던 기적과의 첫 만남을.
곧 김대규는 민망한 웃음을 흘렸다.
"왜 또 과거를 소환하십니까? 맞습니다, 저 예전에는 싸가지 없었습니다. 아니, 솔직히 지금도 싸가지 없는 놈입니다. 그래도 이제는 좀 달라져 보려고 합니다. 아니, 아니, 그렇게 볼 것 없습니다. 거창하고 숭고한 뜻이 있는 건 아니니까. 그냥 착하게 사니까 야구도 잘되고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아서…… 등 떠밀린 김에 가식 좀 떨어 보려는 겁니다."
별로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다. 김대규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기적의 생각은 달랐다.
"가식이라도 좋고, 등 떠밀려 나와도 좋으니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베풀면서 살면 좋겠네요. 그 한 걸음들이 모여 세상을 바꾸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요?"
수없이 떨어진 물방울이 돌에 홈을 파내듯이 작은 변화가 결국은 세상을 바꾸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기적이 그렇게 작은 화두를 던졌고 김대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기적의 말이 틀리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때였다.
부르르릉.
거대한 엔진음과 함께 대형 트럭이 주민 센터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차가 멈춰 서기 무섭게 보조석에 타고 있던 사회복지과 직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십니까, 다들 일찍 오셨네요? 차가 막혀서 조금 늦었습니다."
양해를 구하며 걸어온 직원은 기적을 시작으로 사람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힐링 센터 직원분이시죠? 저는 복지과 사무관 이준혁입니다."
"어? 김대규 선수 진짜로 오셨네요. 저 10년째 행복 호크스 팬입니다. 반갑습니다."
"김해인 선수 맞으시죠? 아시안 게임 은메달리스트와 함께 일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앞으로 올림픽 금메달도 추가할 계획이시라고?"
넉살 좋게 인사한 그는 곧 사람들의 앞에 커다란 박스 하나를 꺼내 놓았다.
"이건 작업복입니다. 겉에 걸치면 되니까 하나씩 입어 주세요. 장갑도 끼시고요. 시간이 조금 지체됐으니까 서둘러 주세요."
사람들은 군말 없이 옷을 입고 장갑을 착용했다. 그러자 사무관, 이준혁이 짝짝 박수를 쳐 시선을 모은 뒤 말했다.
"준비 끝나셨나요? 그럼 엄동설한에 흑심을 품은 사람들. 지금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