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
흑심을 품은 사람들 (1)
하느님이 태어난 날이라는 크리스마스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이에 맞춰 날씨는 추워지고, 기상청은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등 많은 이야기들을 떠들어 댔지만, 이와는 별개로 전체적인 분위기는 조용하기만 했다.
캐롤은 듣기 힘들었고, 거리는 조용했으며, 사람들의 얼굴에서 성탄절을 앞둔 설렘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12월의 추위보다도 차가운 경제 한파 때문이었다.
지난 IMF를 떠올리게 하는 경제난은 사람들의 소비 심리를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다.
거리에는 사람이 없지만, 반대로 엄동설한에 파리가 날리는 가게들은 넘쳐 났다.
개인 사업자들은 죽는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 연신 그러한 내용의 인터뷰가 쏟아져 나왔다.
-요즘 손님 구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예요. 이렇게 힘든 시기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요. 솟아날 구멍은 보이지 않고……. 가게를 폐업해야 하나 고민 중입니다.
-요즘 같아서는 직원들 월급 주기도 힘이 드는 상황이죠. 최저 시급은 자꾸만 오르고 있는데…… 돈 나올 곳은 없으니 그저 참담한 심정입니다. 그저 폐업만은 피하고 싶은 마음인데...
라디오를 들으며 운전을 하던 기적이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요즘 많이 힘든가 보네요. 이러다 정말 제2의 IMF가 오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네요."
기적은 직접적인 IMF 세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부모님을 통해서 IMF의 무서움은 분명히 경험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나라가 망할 뻔한 그 사건은 어린 기적에게도 상당히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수정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요. 요즘 저희 옆에 카페 있잖아요. 거기도 손님 찾아보기 힘들어요. 저희 자주 가는 식당도 완전 죽을 맛이라고 하시던데요. 그나마 대기업 프랜차이즈 업체는 사정이 나은 것 같지만……."
"글쎄요. 대기업 프랜차이즈도 본사에 돈 엄청 내야 한다고 들었는데. 그쪽 점주들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은데요?"
"하긴, 그쪽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에요. 이 엄청난 경제 한파도 우리 센터장님만큼은 비켜 가잖아요. 오늘도 풀타임이시죠?"
기적은 민망한 듯 웃었다.
"이야기가 갑자기 왜 그쪽으로 급선회하죠? 수정 샘도 참 집요한 구석이 있네요?"
수정은 인정한다는 듯 히히 웃었다.
"히히히, 대단하다는 말이니까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지 마세요."
"나 참 부담스러워서……."
기적은 부담스럽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으나 수정의 말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경제 한파도 동장군도 비켜 갈 정도로 기적은 따뜻한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여전한 예약자들로 기적은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으니까.
제아무리 차가운 바람이 불어도 힐링 센터에서는 연신 훈풍이 흘러나왔다.
"자랑스러워 하셔도 될 것 같아요. 점심 사러 가면 옆 가게 사장님들이 센터장님 부럽다고 난리예요. 지나만 가도 훈풍이 흘러나온다고."
"커피집이랑 식당 좀 자주 이용해야겠네요. 이웃인데 서로 돕고 살아야죠. 말이 나온 김에 말인데 곧 크리스마스잖아요. 불우 이웃도 돕고 할까요? 힐링 센터 이름으로 구세군에 기부금 좀 내는 거 어떨까요? 아니지. 기부금 툭 던지는 거 보다는 수요일에 시간 내서 연탄이라도 돌려 볼까요? 겨울 따뜻하게 나시라고."
수정이 검지와 엄지를 모아 미간을 움켜쥐며 말했다.
"조, 좋은 의견이네요. 저희 휴일은 없어지겠지만…… 우리 이웃들은 따뜻하게 겨울을 날 수 있겠네요."
기적은 멋쩍었는지 관자놀이를 긁었다. 그러다가 이내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수정 샘, 크리스마스에 뭐 해요? 약속 있어요?"
"크, 크리스마스요? 아니요. 약속 없어요. 왜……요?"
"왜긴요. 크리스마스에 데이트 신청하려고 하는 거죠. 아니다. 크리스마스는 가족이랑 보내야 하니까 이브에 데이트해요."
"……좋아요."
이후로 두 사람은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차는 그대로 힐링 센터에 도착했고, 기적은 문을 열어젖히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문을 여는 기적에게 남자 1명이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혹시 이곳 센터장님 되십니까?"
깔끔한 인상의 남자였다. 머리는 왁스를 발라 깔끔하게 정리했고, 고급스러운 코트와 그 속에 선이 딱 떨어지는 정장은 남자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아픈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기에 기적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습니다만…… 어쩐 일이십니까?"
그 말에 남자가 명함 하나를 내밀었다.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명함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태정 그룹 기획팀 팀장 오민석.
기적은 미간을 모았다. 명함에서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찾을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태정 그룹 기획팀장님께서 제게는 무슨 볼일이시죠?"
남자, 오민석은 능글맞은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날씨가 너무나 추운데요. 들어가서 이야기하면 안 되겠습니까? 따뜻한 커피 한 잔 주시면 더 좋고요."
날씨가 추운 것은 사실이었기에 기적은 그 말을 거절하지 못했다.
"네…… 뭐. 일단 들어오세요."
"감사합니다."
안으로 들어선 오민석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센터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기적은 그 모습이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아 한마디 내뱉었다.
"뭐 하세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아! 예."
오민석은 자리에 앉았고, 기적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오픈 준비를 해야 해서 길게 이야기 못 합니다. 이렇게 찾아오신 용건부터 들을 수 있을까요?"
오민석은 예의 유들유들한 미소를 장착한 뒤 말했다.
"그럴까요? 그러죠. 이거 한번 봐 주시겠어요?"
이어 그는 가방에서 서류철을 꺼내 기적에게 내밀었다. 기적은 서류철을 열어 내용을 확인했고, 곧 그는 오민석이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프랜차이즈 계약요? 힐링 센터와 프랜차이즈 계약을 맺자고 하시는 겁니까?"
"네, 맞습니다. 저희 태정 그룹은 힐링 센터와 프랜차이즈 계약을 맺길 원합니다."
오민석은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만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 표정이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 대태정 그룹이 프랜차이즈 계약을 맺자고 하니 영광인 줄 알아 이것아라고.
문제는 기적이 그 누구와도 프랜차이즈 계약을 맺을 생각이 없다는 데 있었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힐링 센터는 언제까지나 힐링 센터로 남을 겁니다."
흥미로운 것은 오민석의 반응이었다. 기적이 단호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음에도 그의 표정은 여전히 여유롭기만 했다.
특유의 능글능글한 미소를 장착한 그가 서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너무 성급하신 거 아닙니까? 뒤쪽의 내용도 한번 읽어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혹시 압니까, 거기에 깜짝 놀랄 만한 금액이 적혀 있을지?"
그 말에 기적은 서류를 넘겼다. 동시에 그는 확인할 수 있었다, 계약금 명목으로 제시된 엄청난 금액을.
"15억을 드리겠습니다. 분점을 낼 수 있도록 간판만 내주시면 15억을 드리겠다는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래도 거절하시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오민석의 표정은 여유롭기만 했다. 아마 이 제안을 거절하기 힘들 것이라 보는 듯했다. 무려 15억이니까. 말이 15억이지 이는 당장 신세를 고칠 수도 있는 큰돈이었으니까.
'대한민국에서 돈으로 안 되는 일은 없지.'
그러나 그의 여유로운 표정이 사라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몇 초의 시간이 흐르기도 전에 기적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대답은 똑같습니다. 계약할 생각 없으니 돌아가 주세요. 오픈하려면 바쁩니다."
오민석은 기적의 결정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간판만 내주면 15억을 벌 수 있다.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근처에는 센터를 오픈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있으니 수입이 줄어들 일도 없다. 그런데 왜 거절한다는 거지?
"이유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오민석은 그렇게 물었다. 이에 기적은 답해 주었다.
"그냥요. 마음이 내키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힐링 센터에 돈을 끼워 넣고 싶지는 않다고.
"얼마를 주셔도 제 대답은 같을 겁니다. 다시는 찾아오지 말아 주세요."
힐링 센터는 마음을 나누는 곳이지, 돈을 나누는 곳이 아니라고.
물론 오민석은 기적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돈이 전부인 세상에서 마음 따위를 나누겠다니,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었다.
"하, 이 사람 참 답답하시네. 무슨 90년대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하고 계시나. 낭만적이기는 한데……."
일순 오민석은 이죽거리는 미소를 장착했다.
"지금 그 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후회요? 제가 왜 후회를 한다는 겁니까?"
"우리 태정은 어떻게든 이 업계에 진출할 생각입니다. 그 첫걸음으로 힐링 센터라는 상호명을 따오려고 한 거구요. 그런데 이걸 거절한다? 그럼 우리가 아, 네. 그렇습니까? 하고 순순히 물러날 것 같습니까? 나는 반드시 이 업계에 진출할 겁니다. 아, 혹시 이런 것은 어떻습니까? 힐링 센터 근처에 아주 크고 거대한 센터를 차리는 겁니다. 아주 최첨단 기구들도 잔뜩 설치하고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나간다는 물리치료사들과 트레이너들을 고용하는 겁니다. 그럼 이곳 힐링 센터는 어떻게 될까요?"
"음…… 그러니까 지금 협박을 하시는 건가요?"
"사람의 호의를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다니 굉장히 슬프군요. 저는 그저 제 제안을 거절했을 때 생기는 나비효과를 그쪽에게 미리 알려 드리려는 것뿐입니다. 그쪽이 잘못된 판단을 내리지 않도록 말입니다."
오민석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잠시 센터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처음부터 이야기를 듣고 있던 수정은 물론, 어느새 출근해 일을 하고 있던 진욱과 유진도 잠시 행동을 멈추고 근심 어린 표정으로 기적의 대답을 기다렸다.
"……."
기적은 적당한 타이밍에 입을 열어 센터에 흐르는 숨 막히는 침묵을 깨 버렸다.
"얼마든지 해 보시죠. 저 역시 어떻게 될지 궁금하네요."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기적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단호한 대답에 오민석은 흠칫했지만 이내 본래의 신색을 회복했다.
"굳이 가시밭길을 자처해서 걸어가시네…… 뭐, 좋습니다. 더 이상의 협상은 없습니다. 어디 한번 해 봅시다."
기적은 전에 없이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협상은 결렬되었다.
그 같은 사실을 인정한 오민석은 사납게 몸을 일으켰고, 이내 저주와도 같은 말을 퍼부은 뒤 센터를 나섰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기적은 유진을 향해 말했다.
"유진 샘, 혹시 소금 있나요? 있으면 센터 앞에 잔뜩 뿌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