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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물리치료사-140화 (140/205)

# 140

거침없이 하이킥 (5)

비온 뒤에 땅은 더 굳는다고 했던가?

방황을 마치고 돌아온 허진욱은 이전보다 한층 성숙해진 모습을 보였다.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보고 배우고, 이전보다 더 열심히 어시스트를 하면서 업무에 적응해 나간 것이다.

열심히 움직이는 그 모습에서 물리치료사 국가고시 불합격의 후유증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국가고시 불합격은 진욱을 시험에 들게 했지만 끝내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지는 못한 것이다.

그 덕분에 기적은 다른 데 신경 쓸 것 없이 본연의 업무에 집중할 수 있었다.

최근 그가 가장 신경 쓰고 있는 인물은 역시 퀘스트의 주인공 김해인이었다.

올림픽 선발전에 출전하겠다는 일념으로 힘든 훈련을 버텨 내고 있는 그녀를 대충 치료할 수는 없으니까. 아무래도 더욱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언제나처럼 김해인을 훈련시키던 기적은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갈 필요성을 느꼈다.

"해인 선수, 이제 세라 밴드 훈련에 완전 적응한 것 같은데요? 별로 힘들어하지도 않네요?"

그 말에 겨우 휴식을 취하고 있던 해인이 살짝 눈을 흘겼다.

"선생님! 저 지금 땀 줄줄 흘러내리는 거 안 보이세요?"

그러나 기적은 해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래서 오늘부터는 난이도를 조금 올려 보려고 해요. 제가 이번에 이걸 새로 구매했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기적이 내보인 것은 밸런스 보드였다.

"별로 어려운 것은 아니에요. 지금까지 지면에서 했던 것을 여기 올라서서 하면 돼요. 참 쉽죠?"

"말 한 번 쉽게 하시네요!"

김해인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물론 기적이라고 해서 해인을 괴롭히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이 아니었다.

올림픽 선발전까지 시간이 충분치 않으니까. 적응을 마치면 효과는 반감되기 마련이라는 이론하에, 미리 세워 둔 계획대로 치료를 진행할 뿐이었다. 기적은 바로 이 점을 역설했다.

"시간이 없잖아요, 시간이. 올림픽 선발전 안 나갈 거예요?"

올림픽 선발전이라는 그 말 앞에서 김해인은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입을 꽉 다문 그녀는 독기 품은 눈을 한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요. 뭐든 해 볼게요. 밸런스 보드 이리 주세요."

그렇게 말한 김해인이 의욕적으로 움직이며 밸런스 보드를 자신의 앞에 위치시켰다. 그리고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발차기를 하며 감을 익히려 노력했다.

"다행히 완전 난이도 있는 밸런스 보드는 아니네요. 이만하면 발차기는 어찌어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뭐 발차기 하는 거랑 유지하는 거는 완전히 다른 일이지만……."

"처음에는 어려워도 하다 보면 다 돼요. 사람의 몸은 그렇게 설계되어 있거든요. 반복적인 연습이 위대한 운동선수를 만드는 이유죠."

"반복적인 연습이 위대한 운동선수를 만든다! 뭔가 멋진 말인데요? 좋아요, 열심히 해 볼게요. 선발전에만 나갈 수 있게 해 주세요."

"당연하죠. 그게 제가 할 일이니까요."

기적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고, 김해인은 센터 천장을 향해 힘껏 하이 킥을 날렸다.

그 하이 킥이 천장을 뚫고 선발전에 닿을 수 있을까? 그 결과는 남은 시간 동안의 노력만이 알고 있을 터였다.

* * *

"아흐, 춥다!"

"백년 만의 더위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겨울이라니……. 시간 참 빠르네요."

"우리 패딩 하나 맞출래요?"

"무슨 패딩을 맞춰요?"

"우리 직원분들 감기 걸리지 마시라고 제가 하나 쏘겠다 이 말입니다. 같은 브랜드로 색깔만 조금씩 다르게 하면 될 것 같은데요, 어때요?"

"저희야 좋죠. 그런데 브랜드는 저희가 정해도 돼요? 가격 제한 없는 거죠?"

"……."

기적은 수정의 반격에 괜한 말을 했나 싶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힐링 센터 창밖에서는 하얀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상할 것은 없었다. 유수와 같은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12월 중순을 향해 가고 있었으니까. 눈이 오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시기였다.

"흐흐흐, 이렇게 눈이 오니까 말인데요. 실장님, 쏘는 김에 모자랑 장갑도 쏘면 안 돼요?"

기적은 두 팔을 들어 다 가져가라는 듯 휘저었다.

"예예, 다 가져가세요. 탈! 탈! 탈!"

그 모습을 본 수정은 살짝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농담이에요, 농담. 센터장님이 파카 쏘시면 장갑이랑 모자는 제가 쏠게요. 저도 그 정도는 살 수 있어요."

"하긴 팀장이니까 팀원들한테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죠. 팀장 수당으로 돈도 더 받으니까. 암, 암. 그럴 수 있죠."

"그럼 추가 수당 없는 저희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그만이겠네요."

저희라는 진욱의 말에 유진이 문제를 제기했다.

"추가 수당이 없다니요? 진욱 선생님 어제 부로 첫 환자 받아서 추가 수당 받지 않아요? 추가 수당 없다는 말은 저한테만 해당되는 것 같은데요?"

"아…… 그런가요?"

그렇게 네 사람이 저녁 시간을 이용해 서로를 물고 뜯는 대화를 나눌 때였다. 일순 문이 열리며 사람 하나가 안으로 들어섰다. 김해인이었다.

"어? 해인 선수! 어쩐 일…… 가만있어 보자……. 아! 오늘이 그날이구나?"

지금으로부터 3일 전, 기적은 퀘스트 '거침없이 하이 킥!'을 완료했다.

김해인의 회복도를 80 이상으로 끌어 올리며 목표를 달성해 낸 것이다.

이후 김해인은 선발전을 앞두고 집중 훈련에 돌입한다며 센터에 방문하지 않았는데 3일 만에 다시 방문한 것이었다.

기적이 기억하기로 오늘이 바로 올림픽 대표 1차 선발전이 있는 날이었다.

"합격했어요?"

기적은 김해인이 분명 합격했을 거라 생각했다. 불편함을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발목 상태가 좋아졌으니까. 더구나 퀘스트였다. 성공한 퀘스트는 지금까지 나쁜 결말을 불러온 적이 없었기에 그렇게 확신한 것이었다.

'분명 이번에도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하지만 김해인의 대답은 그의 기대와는 많이 달랐다.

"아쉽지만 떨어졌어요. 마지막에 지는 바람에…… 아무래도 요즘 실전 경험이 없다 보니…… 힘들더라고요. 그래도 후회는 없어요. 최선을 다했고, 정정당당하게 겨뤄서 진 거니까요."

기적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서 지켜본 자신도 엄청 속이 상하는데 당사자는 얼마나 속이 상할까 생각하니 좀처럼 입이 벌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어설픈 위로가 때로는 그 사람을 더욱 힘들게 한다는 사실을 기적은 잘 알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김해인의 반응이었다.

"실장님 저 때문에 진짜 고생 많이 하셨는데, 죄송해요."

당사자인 그녀가 오히려 기적을 달래는 것이다.

"아…… 무슨 말을 하세요. 죄송하긴요, 제가 더 죄송하죠."

기적은 김해인이 애써 밝은 척을 한다고 생각했다.

'짠하네…… 충격이 클 텐데…….'

그런데 대화를 하면 할수록 자꾸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김해인이 정말로 기분이 좋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결국 기적은 참고 참았던 말을 입 밖으로 꺼내 놓았다.

"해인 선수,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나한테 거짓말 한 거 아니죠? 붙었는데 떨어졌다고."

그러자 김해인이 뜻밖의 말을 해 왔다.

"선발전은 확실하게 떨어졌어요. 그런데 다른 기회가 생겼어요."

"다른 기회, 다른 기회 뭐요?"

기적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물었고, 김해인은 곧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던 이유를 털어놓았다.

"사실은 태권도 품새로 전향하기로 했어요."

"태권도 품새? 그건 또 뭐예요?"

"말 그대로 품새를 보여 주는 거예요. 마치 체조나 동계의 피겨처럼 시간을 정해 놓고 프로그램을 연기하는 거예요. 마침 선발전에 품새 코치님이 와 계셨는데 제 발차기 보고 선이 예쁘다고 품새로 전향할 생각 없냐고 제안해 주셔서요."

"아…… 잘됐네요. 잘된 거죠?"

"네, 완전 잘된 거예요. 완전 좌절했었는데 희망이 생겼으니까요. 다 실장님 덕분이에요. 실장님하고 밸런스 훈련을 한 덕분에 저도 모르게 발차기가 좋아졌나 봐요."

"그래요? 그걸 노리고 한 거는 아닌데. 완전 뒷걸음질 치다가 소 잡은 격이네요. 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그만이니 상관은 없지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그만? 그거 속담이에요?"

"네. 왜요?"

"아녀. 그냥 웃겨서요. 요즘에는 그런 말 잘 안 쓰잖아요. 뒷걸음질 치다가 소를 잡는다거나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그만이라거나. 실장님 어쩔 때 보면 저희 삼촌보다 훨씬 나이 많은 사람 같아요."

기적이 묘한 표정을 짓자 김해인이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아! 그러니까…… 좋다는 말이에요. 실장님의 그런 편안한 감성들이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 같아요. 따뜻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실장님은 치료도 잘해 주시지만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뭔가가 있어요. 저는 그게 참 좋았어요."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나 모르겠네요. 아무튼 잘됐다니 모두 다 해피엔딩입니다."

김해인은 잠시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말을 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래요. 일부러 찾아와 줘서 고마워요."

환하게 웃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김해인은 곧 몸을 돌려 센터를 나섰다.

어느 때보다 경쾌한 발걸음으로. 그 뒷모습에서 선발전 탈락의 아쉬움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앞으로의 도전에 대한 기대감만이 있을 뿐. 기적은 그 뒷모습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발걸음 참 가볍네. 가벼운 발걸음이 꼭 올림픽에 닿기를…….'

기적은 가볍게 바라보았다.

* * *

서울에 위치한 한 태권도장.

그곳에서는 하얀 도복을 입은 선수들이 음악에 맞춰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태권도 국가대표 상비군 선수들이 공연을 하는 자리였다.

태권도는 올림픽 신생 종목으로 채택된 이후 한국의 효자 역할을 톡톡히 한 종목이었다. 그동안 획득한 금메달 개수가 이를 증명한다. 하지만 태권도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그리 높지 않았다.

이른바 비인기 종목의 설움이다. 그러다 보니 태권도는 올림픽에서 퇴출될 위기에 놓여 버렸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자국 국민들조차 관심이 없는 국기를 다른 나라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 줄 리는 만무하니까.

그래도 태권도 협회는 살아남기 위해 해결책을 강구했다. 그리고 그들이 내놓은 대답은 바로 이거였다.

태권도 품새. 단순한 대련을 넘어서 태권도라는 무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동작을 통해서 보여 주겠다는 것이었다.

지금 훈련장에서 몸을 움직이고 있는 이들은 바로 이를 증명하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발차기들이 이어졌고 아크로바틱한 동작들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과연 이게 우리가 알던 태권도가 맞나 싶을 정도의 아름다운 모습이 지금 이곳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중 유독 눈에 띄는 소녀 1명이 있었다. 어느 누구보다 멋지게 발차기를 내지르는 소녀. 이 소녀는 본래 품새가 아닌 대련 종목의 선수였다. 하지만 불운한 사고를 당했고, 협회의 알력 다툼에 밀려 국가대표에서 탈락했다.

하지만 이 소녀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올림픽을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그 결과 품새라는 종목에 재도전해 올림픽을 향한 꿈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발차기를 좋게 봐 준 국가대표 코치 덕분이었다. 올림픽 국가대표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고 메달을 따기 위해서는 많은 난관들이 있겠지만 크게 상관은 없었다.

지금 이 소녀는 그저 꿈을 좇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으니까.

소녀의 실력은 다른 이들에 비해 많이 부족했다. 발차기가 아주 예쁘다는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다른 선수들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하지만 소녀는 선수들 사이에서 묵묵히 땀을 쏟았다. 발차기를 지르고 공중제비를 돌고. 남들에 비해 부족하다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기에 더욱 열심히 움직였다.

어떻게 저렇게 어려운 발차기를 저렇게 안정적으로 해낼 수 있지? 정말 저 선수가 얼마 전만 해도 대련 종목을 하던 선수가 맞나? 정말 발목 부상으로 고생하던 사람이 맞나? 소녀의 이력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기적'이라고 수군거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바로 기적이었다.

기적은 관중석 뒤편에 앉아 소녀의 발차기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소녀, 그러니까 해인은 그가 있는 위치를 알지는 못했지만 그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기적이 가까이에 와 있다는 사실을.

기적은 거침없이 하이 킥을 날린 뒤 힘찬 기합을 내지르는 해인을 보며 씩 웃음을 지었다.

'부디 저 하이 킥이 올림픽에 닿기를, 그리고 그곳을 금빛으로 물들이기를.'

오늘도 기적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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