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
거침없이 하이킥 (2)
"어제 센터장님이 장난치셔서 그런 거 아니에요? 제 밑이라고 해서 기분 나빴던 것 아니에요? 제가 한 살 어리잖아요……."
"설마요, 어제 진욱 선생님 그 이야기할 때 표정 괜찮았어요. 그보다는 요즘 너무 방치돼서 그런 것 아닐까요?"
수정과 유진은 진욱이 왜 출근하지 않았는지를 두고 나름의 의견을 개진했다.
그러나 기적은 고개를 갸웃했다. 손가락으로 데스크를 퉁퉁 튕기며 그가 말했다.
"그런 이유는 아닌 것 같은데…… 그보다는 어디가 아프다거나 열차를 놓쳤다거나 하는 쪽이 신빙성이 있지 않을까요?"
그때까지만 해도 세 사람은 허진욱이 나타나지 않는 것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금 의아하긴 하지만 이내 모습을 드러내겠지 하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10시가 되고 11시가 되고, 또 점심시간이 되어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슬슬 심경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무런 소식도 없이 3시간 가까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었으니까.
결국 기적은 스마트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허진욱에게 직접 어찌 된 사연인지 들어 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기적은 허진욱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전화기가 꺼져 있어 소리 샘으로 연결된다는데요?"
그 말에 수정이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아, 혹시! 전화기가 꺼져 있어서 알람이 안 울린 건 아닐까요? 아직 자고 있는 거죠."
"지금 12시가 넘었는데요?"
"12시가 왜요? 저는 알람 없으면 1시까지도 자는데요?"
"팀장님은 그래도 보통 사람들은 안 그렇잖아요. 그보다는 뭔가 일이 생긴 것 같은데요?"
기적도 공유진의 의견에 힘을 실어 주었다.
"아무래도 집에 전화 한번 해 봐야겠어요.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걸지도 모르니까…… 이력서에 집 전화번호가 있을 거예요."
그렇게 말한 기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컴퓨터를 뒤져 허진욱의 집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전화번호를 찾아낸 그가 스마트폰을 조작해 전화번호를 찍었을 때였다.
마침맞게 스마트폰에 전화가 걸려 왔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조교 윤지윤이라고 찍혀 있었다.
"여보세요, 조교 선생님이 무슨 일이십니까?"
장난 섞인 어조로 인사하자 곧바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선배님! 다른 게 아니라 허진욱 학생 때문에 전화드렸어요.
허진욱이라는 말에 기적의 눈가에 이채가 스쳤다.
"허진욱? 진욱 선생님이 왜?"
-오늘 국가고시 결과 발표가 있었거든요. 지금 합격자 조사 중인데 진욱 학생이 불합격한 것으로 나와서요. 지금 연락이 안 되고 있는데……. 뭐가 어떻게 된 건가 해서요.
"정마알?"
기적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되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몇 번이고 합격을 자신했던 허진욱이었으니까.
같은 소리가 돌아올 걸 알면서도 기적은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네? 가채점한 결과, 여유 있게 합격했다고 들었는데?"
그러나 수화기 너머 목소리는 지금의 상황이 사실이라고 말해 오고 있었다.
-그러니까요. 본인이 말했던 대로 총점은 여유 있어요. 그런데 전산상으로는 2교시 마지막 과목인 공중 보건학에서 과락 한 것으로 나와요.
물리치료사 국가고시의 합격 기준은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1, 2, 3교시 필기와 실기에서 총점 60% 이상 득점함과 동시에 모든 과목에서 40% 이상을 맞아야 한다고.
쉽게 말해 1, 2, 3교시 총 10개 과목에서 평균 60% 이상을 맞았다고 하더라도, 단 한 과목이라도 40점 이하로 떨어지면 불합격이라는 것이다.
허진욱은 바로 이러한 조항에 걸리는 것으로 보였다.
"과락? 몇 점이 모자라는데?"
-한 문제요…… 딱 한 문제만 더 맞았으면 합격이었어요.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기적은 안타까움에 말을 잇지 못했다. 동시에 그는 이해할 수 있었다. 허진욱이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이유를 말이다.
-선배님, 상황 보니까 허진욱 학생 오늘 출근 안 한 것 같네요. 맞나요?
"어어. 사실은 오늘 출근 안 했어. 무단결근이라, 나도 알아보려던 참이야……. 그런데 그런 이유가 있을 줄은 몰랐네."
-아마 충격이 클 거예요. 합격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딱 한 문제 때문에 불합격처리 됐으니까요. 세상이 끝난 기분일 거예요.
"아마 그렇겠지…… 알겠어. 혹시 무슨 소식 들어오면 좀 알려 줘. 그래, 수고하고."
마지막 인사를 마친 기적은 씁쓸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감시를 서는 미어캣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수정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진욱 선생님 과락이래요?"
물리치료사 국가고시에 대해 잘 모르는 공유진이야 기적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지만 수정은 과락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아들은 것이었다. 기적은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요……. 공중 보건 한 과목에서 딱 한 문제가 모자라대요. 그래서 최종 불합격이라네요."
"아이고…… 어떻게 그런……."
모르긴 몰라도 허진욱이 물리치료과 입학을 결심하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열심히 해 온 것은 딱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함일 가능성이 높았다.
바로 물리치료사 면허증을 취득하는 것. 아마 그는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20대 초중반을 열심히 달려왔을 터였다.그런데 다 잡은 줄 알았던 목표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기적은 그 심정이 어떨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몇 번이나 메시지를 썼다 지웠다 반복한 끝에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는 이내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모두를 향해 말했다.
"연락 남겼으니까 마음 정리하고 돌아오겠죠. 우리는 밥이나 먹읍시다."
그날 오후.
기적은 정말 오래간만에 휴식 타임을 맞이했다. 예약되어 있던 회원이 급한 사정이 생겼다며 예약을 취소한 덕분이었다.
모처럼의 휴식 시간.
기적은 의자에 앉아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안 쉬다 쉬어서 그런가? 쉬는 것도 참 어색하네.'
다만 평화로운 시간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기적이 보기 싫었던 것일까? 일순 스마트폰에 불이 들어오며 메시지가 도착했다.
-시간 가능하실 때 연락 부탁드립니다, 실장님! (김대규)
간단한 문자를 보낸 이는 김대규였다. 행복 생명 호크스 소속으로 지난 번 기적에게 치료를 받은 뒤 맹활약한 그가 어찌 된 셈인지 연락을 해 온 것이었다. 마침 쉬는 시간이었기에 기적은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김대규 선수, 저 이기적입니다. 잘 지내시죠?"
-아아! 이 실장님. 곧바로 전화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실장님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기적은 김대규의 목소리가 상당히 유쾌해 보인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혹시 김대규 선수, 좋은 일 있습니까?"
-좋은 일요? 아…… 역시 귀신은 속여도 실장님은 못 속인다니까? 좋은 일 있지요. 며칠 후에 열리는 골든 글러브 시상식에 초대받았지 뭡니까? 허허허.
기적은 골든 글러브 시상식에 초대받았다는 사실의 진의를 알지 못했기에 김대규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어쩌면 골든 글러브를 수상할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김대규는 단지 후보가 되었다는 사실에 상기된 것이 아니었다.
-이거 비밀인데 실장님한테만 살짝 말씀드리겠습니다. 저 이번에 골든 글러브 수상할 것 같습니다.
"어? 정말입니까? 정말 축하드립니다."
야구를 즐겨 보는 기적이었기에 한국 프로야구에서 골든 글러브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기적은 김대규에게 진심을 담아 축하를 보냈다. 김대규는 가감 없이 기적의 축하를 받아들였다.
-고맙습니다. 이게 다 실장님 덕분 아니겠습니까? 시즌 초만 해도 최악의 성적을 냈던 제가 실장님을 만나고 완전히 반등했으니 말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계산해 봤는데 실장님께 치료받은 이후 슬러쉬 라인이…… 에…… 0.349/0.432/0.589에 누적이 30홈런 98타점입니다. 시즌 초반 죽 쓰지만 않았다면…… MVP를 노려볼 만한 성적입니다.
슬러쉬 라인이란 타율/출루율/장타율을 말하는 것이었다.
김대규의 말 한마디에 기적은 그간의 피로가 싹 풀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김대규 등의 환자들은 일종의 증거라 할 수 있었다. 기적이 명성 병원에서 헛된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는 증거.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뿌듯하네요. 김대규 선수 정말 축하드립니다. 좋은 소식 전해 주시려고 이렇게 연락까지 해 주시고."
기적은 김대규가 좋은 소식을 전해 주기 위해 연락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김대규의 용건은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네? 좋은 소식은 겸사겸사 전해 드린 말이고. 제가 연락드린 거는 따로 용건이 있어서입니다.
"네, 다른 용건이요? 무슨 용건이 있으세요?"
-치료를 좀 받으려고 하는데.
"치료요? 김대규 선수 또 어디 아프세요?"
-아니, 아니요. 저 말고 다른 사람인데 아픈 사람이 있어서 실장님께 부탁을 좀 드리려고 합니다.
기적은 조금 곤란한 표정이었다.
"아, 그래요? 그런데 어쩌죠? 당분간 예약이 꽉 들어차 있는데……."
곤란한 듯한 기적의 말에 김대규가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실장님 바쁜 거 다 압니다. 실장님이 제가 부탁한다고 해서 다른 환자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제 지인을 넣어 줄 사람이 아니란 것도 다 압니다. 실장님이 겉으로는 유해 보이지만 안으로는 누구보다 강한 심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잘 알지요.
"그럼……."
-하지만 말입니다. 제가 아는 지인이 정말 급해서 그럽니다. 실장님은 원칙을 중시하지만, 환자 앞에서는 기꺼이 그런 원칙을 무너뜨리는 사람이 아닙니까?
기적은 저도 모르는 사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뭔가 사연이 있는 모양이네요. 조금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김대규 선수가 말하는 지인이 누구일지. 무슨 사연이 있나요?"
김대규는 약간은 뜸을 들인 뒤 그 질문에 답했다.
-실장님, 혹시 김해인이라는 선수 아십니까?
"김해인 선수요? 글쎄요…… 처음 들어 보는 선수인데요?"
-김해인이라고 국가 대표 태권도 선수인데 모릅니까? 이번 아시안 게임에서 은메달 목에 걸었는데.
기적은 멋쩍은 미소만 흘렸다.
"솔직히 잘 기억이 안 나네요. 태권도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아아, 아닙니다. 모르는 게 당연하지요. 태권도는 비인기 종목이니까. 금메달을 걸었다면 모를까 준결승전에서 부상을 당해서 결승전에서 완패했거든요.
"아아, 혹시 그 부상 때문에 저한테 부탁을 하시는 겁니까?"
-네네. 그렇습니다. 부상이 아직 차도가 없는데…… 다가오는 12월에 차기 올림픽에 나갈 국가 대표 선발전을 한다고 합니다.
"조금 이상하네요. 아시안 게임이 끝난 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올림픽 선발전을 합니까? 올림픽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잖아요."
-그게…… 아마 협회의 알력 다툼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해인이가 협회의 희생양이 되는 모양입니다. 많이 힘들어 하고 있어서 이렇게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실장님이라면 해인이를 구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실장님, 해인이 좀 치료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김대규가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그의 눈앞에 메시지가 주르륵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