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
널리 사람들을 이롭게 하라 (4)
"기적은 준비된 자에게만 찾아오는 법입니다. 저는 끝까지 석한이를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겠습니다."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겠다. 명의진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굳은 의지 앞에서 김귀연의 목소리 또한 누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자네 무슨 방법이라도 있는 것처럼 들리는데?"
명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도 못하는 일을……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석한이를 그 사람에게 데려갈 생각입니다. 물론 그 사람이 석한이를 치료해 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안 되면 무릎이라도 꿇어야죠."
명의진의 말을 들은 김귀연은 떠올릴 수 있었다, 명의진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자네, 설마 석한이를 그 물리치료사에게 데려갈 생각인가?"
"왜 아니겠습니까? 그 사람 말고 다른 대안이 있습니까?"
"절대 안 돼! 그깟 물리치료사에게 석한이를 맡기겠다니 절대로 안 될 말이야!"
명의진은 그런 김귀연을 향해 반문했다.
"우리나라 최고 병원이라는 서울대 병원에서도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눈앞의 의사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대로 모든 걸 포기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지푸라기라도 붙잡으시겠습니까?"
마냥 사람 좋은 줄 알았던 사위의 격앙된 목소리 앞에서 김귀연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다시 명의진의 턴이 돌아왔다.
"병원은 지금처럼 다닐 겁니다. 필요한 조치를 받을 겁니다. 이곳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겠습니다. 대신 시간을 내서 이기적 실장님의 센터에 데려가겠습니다. 그것마저 안 된다고 하지는 않으시겠죠?"
결국 김귀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걱정은 여전히 남았다.
"그야…… 그렇지. 하지만 석한이가, 그리고 그 사람이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겠군."
석한과 기적의 악연을 잘 알고 있는 그녀였으니까. 석한의 말을 듣고 병원에서 기적을 쫓아낸 것도 모두 자신이 지시한 일이었으니까.
물론 명의진이라고 해서 그걸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석한이와 장모님이 실장님에게 한 일들은 저도 어렴풋이 알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고교 시절부터 악연이라는 사실도요."
하지만 이 순간,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가 아는 이 실장님이라면 분명 석한이를 받아 줄 겁니다. 그 사람은 결코 도움이 필요한 환자를 외면하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기적이 결코 지난 악연을 이유로 석한을 아니, 장애가 있는 환자를 외면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제가 시간을 내서 실장님을 찾아가 보겠습니다. 석한이를 설득하는 일은 장모님께서 맡아 주세요."
"알았네……."
김귀연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시각.
명석한은 모처럼 병실을 나와 산책을 하고 있었다. 뒤에서 그의 휠체어를 밀고 있는 이는 바로 차지은이었다.
"알량한 동정심 때문에 날 찾아온 거라면 그만 돌아가. 나 너 원망 안 해. 이번 사고는 너 때문이 아니니까. 먼저 바람을 피운 것도, 널 기만한 것도 나니까."
차지은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다른 말을 했다.
"날씨 참 좋아요, 하늘은 맑고, 바람도 적당하고. 그쵸?"
"뭔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돌아가라는 말 못 들었어?"
지은은 여전히 석한의 질문과는 상관없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오빠랑 사귀면서 많이 행복했어요. 오빠처럼 근사한 사람이 나 같은 여자를 좋아해 주는구나 싶어서. 친구들한테도 얼마나 자랑했는데요. 그리고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어요."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묻고 있잖아!"
"연락이 안 되는 동안 제가 오빠한테 보낸 문자들 모두 진심이에요. 지금에 와서... 상황이 바뀌었다고 해서 그 마음이 변하지는 않았어요."
석한이 교통사고가 난 지도 꽤 많은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지은은 석한에게 여러 번 전화를 걸었고, 수많은 메시지를 남겼다.
헤어지자는 그 말은 진심이 아니었다고, 이 메시지를 본다면 꼭 전화를 해 달라고.
그러다 연락이 닿은 것이 며칠 전이었다. 당연히 사고가 났다는 말도 그때 전해 들었다.
처음 지은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석한을 찾아가기로, 그리고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얼굴을 굳힌 석한이 물었다.
"왜, 뭐 때문에? 동정심 때문에?"
왜냐고 묻는다면 그녀 역시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왜 그런 판단을 내렸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으니까.
그것은 어쩌면 동정심일 수도 있었고, 어쩌면 자신은 속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유야 어떻든 그녀의 마음은 이대로 석한을 모르는 체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 대답은 오빠가 다시 일어선 다음에 할게요. 내 대답을 듣기 위해서라도 꼭 다시 일어서 줘요. 두 발로 당당히 서서 다시 똑같은 질문을 해 줘요."
"……."
석한은 말없이 지은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지은은 살짝 미소를 머금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석한은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그날을 떠올렸다. 지은을 처음 만난 그날을. 첫눈에 반했던 그날을.
그날도 지은은 지금과 같이 티 없이 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 내가 저 미소에 반했었지. 내가 지은이를 다시 찾은 것은 당시의 패배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저 미소가 보고 싶어서였을까?'
석한은 곰곰이 생각했지만 끝내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었다.
* * *
기적은 평소보다 조금 이른 하루를 시작했다. '아침아, 반갑다'의 제작진이 아침 일찍부터 들이닥쳤기 때문이었다.
"반갑습니다. '아침아, 반갑다'의 책임 프로듀서 도만수입니다. 이기적 실장님 맞으시죠?"
미리 연락을 받기는 했지만 방송이 처음인 기적이었기에 그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아! 네, 네. 제, 제가 이기적입니다."
도만수는 그런 기적을 달래 주었다.
"그렇게 긴장하실 것 없습니다. 어차피 본 촬영은 내일이고 오늘은 간단히 스케치를 하기 위해서 온 거니까요. 센터 내부 모습 좀 찍고, 간단한 인터뷰만 진행할 거니까요. 자, 자, 긴장 푸시고 이쪽으로 서 보세요. 인터뷰부터 딸 거니까요. 잠깐 앉아 계세요."
그렇게 말한 도만수는 사람들을 시켜 센터 이곳저곳을 촬영하게 했고, 그사이 기적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설명해 주었다.
"제가 질문을 던지면 실장님은 자연스럽게 답변을 해 주시면 됩니다. 여기 가이드라인이 있으니까 이대로 대답해 주셔도 좋고, 실장님이 적당히 살을 붙여서 대답해 주셔도 좋습니다."
"알겠습니다."
곧 실내 촬영이 종료되었고, 기적의 인터뷰 차례가 다가왔다.
생전 처음 대하는 카메라와 마이크 앞에서 기적은 어리바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도만수는 도리어 그런 기적을 칭찬하기 바빴다.
"이야, 실장님. 카메라발 잘 받으시네. 마이크 목소리도 딱 방송용이고, 고정 패널해도 되겠어."
조연출이 그 말을 받았다.
"네, 네, 그러니까요. 특별히 분장도 안 시켰는데 저 정도에요, 목소리 톤도 딱 방송용이고."
"뭐, 분장을 안 시켰어? 저게 분장 안 시킨 피부야? 잘 하면 이번 편 대박 날 수도 있겠는데? 예고편에 인터뷰 딴 거 오래 노출시켜야겠어. 그래야 시청률 잘 나오지. 꽃미남? 훈남? 물리치료사라는 점 강조해서 자막 넣고."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강만수는 기적에게서 대박의 냄새를 맡았고, 덕분에 인터뷰는 순조롭게 끝이 났다.
긴장한 탓에 기적은 몇 번 NG를 냈지만, 강만수는 너그럽게 이를 이해해 주었다.
"죄송합니다, NG를 너무 많이 냈어요."
"처음이니까 실수도 하고 그러는 거지. 괜찮아요, 생각보다 잘하는데, 뭘. 이대로 본 촬영 때도 잘 부탁드립니다. 본 촬영이 다음 주 수요일 오후 2시인 거 알고 계시죠?"
"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럼 저희는 외부 모습 좀 촬영하고 돌아가겠습니다. 간판에는 모자이크가 들어가겠지만 그래도 알아볼 수 있게끔 촬영할 겁니다. 실장님도 홍보를 하셔야 하잖아요."
이런 정보 프로그램에는 항상 이해관계가 있다. 방송국은 능력 있는 출연자를 섭외해 흥미로운 방송을 만들고, 출연자는 방송을 통해 홍보를 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강만수는 당연히 기적이 홍보를 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기적이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죄송하지만 외부 촬영은 안 하면 안 됩니까?"
강만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예에? 그러면 홍보가 전혀 안 될 텐데?"
"네, 네.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홍보를 하려고 방송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서요. 지금도 예약이 꽉꽉 들어차 있거든요."
강만수는 계속해서 같은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예약이 꽉 차 있다? 그러면 방송에는 왜 나가시는 겁니까?"
기적은 그런 강만수를 향해 도리어 질문을 던졌다, 고개를 갸웃하면서.
"이 방송의 목적이 정보 전달 아닙니까? 그리고 이번 주제가 척추 건강이고요. 제가 이 방송에 나가겠다고 결심한 것은 당연히 척추 건강이 안 좋은 사람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기적의 대답을 들은 강만수는 완전히 한 방 먹었다는 표정이었다. 그 대답에서 그는 떠올린 것이었다, 처음 이 프로그램을 기획했을 때의 초심을.
'그래. 내가 이 방송을 기획한 것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함이었지, 출연자들의 가게를 홍보하기 위함이 아니었어.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거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그가 기적을 향해 말했다.
"제가 정말이지 바보 같은 질문을 했네요. 정보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은 당연히 정보를 전달하기 위함인데 말입니다. 이기적 실장님이라고 하셨죠? 오늘은 실례가 많았습니다. 다음 주 수요일에 뵙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강만수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 보였다. 그리고는 촬영 준비를 하고 있는 관계자들에게 말했다.
"철수 준비해라. 오늘 촬영은 여기서 끝이다."
철수라는 말에 조연출이 즉각 의문을 제기했다.
"철수요? 아직 홍보용 영상 안 찍었는데요?"
홍보용 영상을 찍어 준다는 명목으로 슬쩍 뒷돈을 받는 것은 그동안 늘 있어 왔던 관례 같은 일이었으니까.
평소 하던 루틴이라는 게 있는데, 그걸 안 하겠다고 하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로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이었지만 그 질문은 강만수를 더욱 까칠하게 만들었다.
"철수하라면 철수할 것이지 뭔 말이 그리 많아?"
버럭 소리를 지른 강만수는 영문을 몰라 하는 스태프들을 억지로 철수시킨 뒤, 센터를 나서기에 앞서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덕분에 많이 배우고 갑니다.'
그리고 그 순간, 기적의 모습을 눈에 담는 그 순간.
때마침 센터 안으로 치고 들어온 햇빛 때문이었을까? 강만수는 어쩐지 기적이 찬란하게 빛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으음~.'
그 빛이 너무 밝았던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강만수는 그 모습을 오래 바라보지 못하고 이내 고개를 돌렸다. 무거운 발걸음이 센터 밖으로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