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비만은 병이다? (12)
똑똑.
"교수님, 저 왔습니다."
노크와 함께 인사를 하자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허락을 얻어 낸 기적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문 앞에 서 있던 젊은 여자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인사를 해 왔다.
"선배님, 반갑습니다. 저 기억하시죠? 학과장님 모시고 있는 14학번 윤지윤입니다."
"어…… 어. 아아, 네가 지윤이니? 너 많이 변했다. 옷을 쫙 빼입어서 그런가?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는데?"
14학번 윤지윤은 09학번인 기적이 졸업반일 때 갓 대학에 들어온 새내기였다.
그 때문에 기적이 기억하는 윤지윤은 부끄럼을 많이 타고 내성적인 성격의 후배였다.
그런데 그랬던 윤지윤이 기적을 향해 프로처럼 인사를 하고 있었다. 흘러간 시간이 스무 살 대학 새내기를 어엿한 사회인으로 변모시킨 것이었다.
윤지윤도 굳이 부정을 하지 않았다.
"요즘 그런 말 자주 듣습니다. 저는 잘 모르겠는데……. 조교로 일하다 보니 아무래도 성격이 변하나 봐요. 그런데 선배님한테 그런 말 들으니까 조금 당황스럽네요."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 윤지윤의 모습에 기적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아무리 봐도 선배님이야말로 완전 변하신 것 같아서요. 얼굴도 그렇고…… 선배님 목소리가 원래 이렇게 듣기 좋았나 싶은데요? 완전 꿀성대…… 새벽 라디오 DJ 뺨 때리겠는데요? 아무튼 완전 근사해지셨어요."
"아…… 그래? 나도 센터 운영하고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그렇게 변하는 것 같아. 노력도 많이 했고……."
대충 둘러댄 기적이 화제를 전환시켰다.
"아무튼 이렇게 만나니 반갑다. 그런데 교수님이 안 보이시네? 어디 가셨어?"
고개를 돌려 칸막이 너머를 살펴본 기적이 그렇게 물었다.
"전화 받으시고 본관에 올라가셨는데…… 가신 지 꽤 되셨으니까 곧 돌아오실 거예요."
"그래?"
"네. 선배님, 커피 한 잔 하실래요?"
"좋지."
잠시 후, 윤지윤이 잔에 담긴 커피 한 잔을 내왔다. 기적이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커피였다.
'원두네? 요즘은 학교에서도 원두 마시나?'
기적은 세상 좋아졌다고, 굉장히 아재 같은 소리를 뇌까리며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좋구나.'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의 향기는 저도 모르게 취할 정도, 기분이 좋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할 정도의 분위기였다.
기적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며, 커피를 마시며, 문정연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문이 열리며 기다리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방의 주인, 문정연이었다.
어쩐지 곤란한 얼굴로 들어온 문정연은 이내 기적을 발견하고는 본연의 신색을 회복했다.
"우리 이기적 센터장님, 일찍 오셨네요?"
기적은 커피를 내려놓고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여유 있게 왔습니다, 교수님. 어디 다녀오시나 봐요."
"일이 좀 있어서 본관에 올라갔다 왔지. 그래, 강의 준비는 잘했고?"
"네, 열심히 준비해 왔습니다."
"그래? 조교 선생한테 보내 준 자료 얼핏 보니까 강의 제목이 임상이라는 이름의 전쟁터에서 살아남기던데, 맞나?"
"네, 맞습니다. 아무래도 대상이 4학년이니까요. 임상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궁금해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게 준비해 봤습니다."
"그래. 무슨 내용인지는 이따 들어 보면 알겠지."
문정연이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기적은 그 말을 그냥 지나 보내지 못했다.
이따 들어본다는 말. 이 부분은 조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이따 들어 보신다고요? 교수님…… 혹시 제 강의에 들어오시려고요?"
"그래. 들어가서 강의 좀 들어 볼 생각인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 아니요. 그런데 교수님 바쁘지 않으세요? 수업도 들어가셔야 하잖아요."
"나 하나도 안 바쁜데? 그리고 오늘 수업 이미 다 끝났다."
"아……."
기적은 저도 모르는 사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살짝 일그러진 얼굴이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교수님 저한테 왜 이러시냐고.
그러나 문정연이 강의에 참석하고자 하는 것은 괜히 기적에게 부담을 주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등받이에서 등을 떼고 상체를 기적 쪽으로 숙인 그녀가 쉬쉬하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판단할 근거가 있어야지. 이 선생이 내년에 외래 강사로 일할 자격이 되는지 안 되는지 말이야."
이번 특강은 임용 시험이 될 것이다. 문정연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외래 강사라…….'
기적은 천천히 그 단어를 곱씹어 보았다. 솔직히 지금의 기적에게 외래 교수라는 직함이 그렇게 간절한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문정연 교수가 외래 강사직을 제안한다고 하더라도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센터를 관리하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벅차다고 느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모교에서, 그것도 후배들을 상대로 물리치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가치 있는 일이라고.
바쁜 와중에도 특강을 하라는 문정연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일단 길을 터놓을 필요는 있지 않을까? 기적은 그렇게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대화는 그것으로 종료.
이후로는 사적인 대화가 이어졌고, 그러는 사이 시간은 흘러 기적이 강의에 들어갈 3시가 되었다. 임용 시험을 치를 시간이 다가온 것이었다.
* * *
기적의 수업을 듣기 위해 자리한 학생들은 대략 50여 명 정도였다.
참가를 어느 정도 자율에 맡겼음에도 꽤 많은 사람이 찾아온 것은 기적에 대한 소문 때문이었다.
돈도 잘 벌고, 얼굴도 잘생긴 데다 실력도 엄청나게 좋은 선배라는 소문이 퍼진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강단에 선 기적을 바라보는 후배들의 눈빛은 초롱초롱했다. 덕분에 기적은 보다 편안하게 강의를 진행할 수 있었다.
-흔히들 임상을 전쟁터에 비유합니다. 왜냐고요? 전쟁터 못지않게 치열한 곳이 바로 임상이니까요. 그리고 여러분들은 곧 전쟁터에 나가야 하는 예비군들입니다. 전쟁터에 나서려면 반드시 전쟁에 나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맨몸으로 나갔다가는 비명횡사하기 딱 좋죠. 총과 총알을 물론이고, 보급품도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총은 무엇일까요? 또 보급품은 무엇일까요? 거기 보라색 옷 입은 분이 대답해 보실래요?
기적은 중간중간마다 질문을 던지고, 또 대답을 듣기도 하고, 다시 이에 대한 대답을 해 주는 식으로 강의를 진행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의사는 생명을 구하는 전문가지만, 일상생활에서의 불편함을 해소해 주는 전문가는 물리치료사라고. 임상에서 분명히 우리의 역할이 있다고 말입니다. 한 번은 이런 환자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기적의 모습에 뒷자리에 앉은 문정연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의식해서 한 행동이 아니었다. 몰입력 있는 기적의 강의에 저도 모르게 그런 행동을 한 것이었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학생들의 생각을 듣고, 다시 이에 대한 설명을 곁들이고.
기적은 PPT를 거의 활용하지 않았다. 보고 읽을 자료지 또한 없었다. 하지만 기적은 조금도 막힘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마치 토크쇼를 진행하는 유명 MC처럼. 그의 유려한 강의 속에서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의 강의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는 예정된 시간이 되어 강의를 끝마친다는 말을 했을 때 잘 드러났다.
-오늘 강의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였다.
짝짝짝짝!
여기저기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결코 타성에 젖어 형식적으로 보내는 박수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어진 학생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너무 재미있고 감동적이었어요!"
"다음에 또 해 주세요!"
"선배님 좋은 강의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 덕분에 기적은 흡족한 얼굴로 강단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대단히 성공적인 데뷔전이었다.
* * *
같은 시각.
서울 근교의 외곽 순환 도로.
그곳을 자동차 한 대가 엄청난 속도로 내달리고 있었다. 딱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외제차는 규정 속도가 적힌 표지판을 비웃기라도 하듯 최대한의 속도로 내달리고 있었다.
120km/h, 130km/h, 140km/h, 150km/h, 160km/h, 170km/h…….
자동차는 끝을 모르고 속도를 올렸다.
바아아아앙!
마치 카레이싱에서나 들을 법한 격한 엔진 소리는 옆에서 규정 속도를 지키며 내달리는 운전자들의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어떤 미친놈이야?"
"젊은 놈 같은데…… 완전히 미쳤군. 저러다가 확 뒈지는 거야."
"죽으려면 혼자 죽을 것이지. 에라이, 빌어먹을 놈."
사람들은 그렇게 외치며 선탠으로 가려진 창문 속 운전자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창문 너머 보이는 운전자의 얼굴이 어딘가 익숙해 보였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연신 욕설을 내뱉으며 미친 듯이 액셀 페달을 밟는 운전자, 그는 바로 명석한이었다.
그가 이렇듯이 악에 받쳐 페달을 밟는 것은 바로 차지은 때문이었다. 양다리를 걸치다 들통이 났고, 그로 인해 이별 통보를 받은 것에 앙심을 품은 것이다.
"뭐? 감히 나를 이기적 같은 놈과 비교해?"
만약 그냥 이별 통보를 받았다면 그도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역시도 차츰 차지은에게 질려 가던 참이었으니까. 이미 차지은을 정리하기로 마음먹고 적당한 시기를 조율하고 있던 그였다.
그런데 차지은이 건드리지 말아야 할 역린을 건드렸다.
하필 기적과 자신을 비교하며 이별 통보를 한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기적이라면 이렇게 했을 것이다. 저렇게 했을 것이다. 사사건건 비교를 하는 차지은의 말들 앞에서 석한의 인내심은 바닥나고 말았다.
명석한은 완전히 꼭지가 돌았고, 그 자리에서 차지은에게 욕설과 저주를 퍼부은 뒤, 곧바로 차에 올라 과격하게 액셀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심사가 뒤틀리면 과속을 하고야 마는 그의 습성이 또다시 튀어나온 것이었다.
"용서 못 해! 용서 못 한다고!"
그는 연신 소리치며 액셀을 밟아 자동차의 속도를 올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어! 뭐야?"
코너를 도는 순간 핸들이 말썽을 일으켰다. 너무 빠른 속도 때문인지, 아니면 기계적 결함인지 일순간 핸들이 그의 통제를 벗어난 것이었다. 그것은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170km/h에 다다른 속도는 너무나도 예민했다.
"안 돼!"
점차 가까워지는 가드레일을 본 명석한은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하지만 사고를 막을 수는 없었다.
꽈아앙!
고속도로에 때아닌 굉음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