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
어제보다 나은 오늘 (10)
이후로 이성훈과 이신적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덕분에 기적은 더 이상의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무사히(?)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기적은 한사코 지하철을 타고 돌아가겠다고 했지만 굳이 데려다주겠다는 이성진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차에 올랐다.
물론 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어머니 손성희였다. 술을 마신 이성진을 대신해 운전대를 잡은 것이다.
핸들을 돌리며 손성희가 말했다.
"아들, 괜찮은 거야?"
주어와 목적어가 없는 말이었지만 기적은 그 말을 단번에 이해했다.
"그럼. 잘되고 있다니까."
"그래도 엄마는 걱정이네. 정년 보장되는 병원에 계속 다니면 좋았을 텐데. 거기 들어가기 엄청 힘든 병원이라며."
"엄마 계속 똑같은 이야기할 거야? 벌써 몇 번째 같은 이야기 하는지 모르겠네?"
계속해서 반복되는 상황에 기적이 내심 한숨을 내쉴 때였다. 내내 조용히 있던 이성진이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그래. 당신 그만 좀 해. 옆에서 듣는 나도 지겨울 정도니까."
"나는 걱정되니까 그런 거지. 아무튼 알았어요. 나도 이제 그만하려던 참이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차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그 정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리고 정적을 깬 사람은 의외로 이성진이었다.
"잘했다."
가볍게 툭 던진 한마디.
그러나 그 한마디는 기적의 가슴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건가? 기적은 몇 번이고 그렇게 되물었다. 머리털이 난 이후로 이 무뚝뚝한 아버지에게 잘했다는 말을 들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잠시 말을 잃은 기적을 대신해 손성희가 물었다.
"잘했다고? 이 양반이 그런 말도 할 줄 알았네?"
술에 얼큰하게 취해서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일까? 붉어진 얼굴로 이성진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 사람아, 잘했으니까 잘했다고 하지. 나도 잘했을 때는 잘했다고 할 줄 아는 사람이야, 이거 왜이래?"
"호호호.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네. 기적이가 제 아버지한테 잘했다는 칭찬도 다 듣고. 돈이 좋기는 좋네. 돈 잘 번다고 하니까 네 아버지가 칭찬을 다 한다. 너 그 센터 차리기 잘했다. 아니면 언제 이 양반에게 잘했다는 칭찬을 듣겠니?"
이성진이 쓸데없는 소리 한다는 듯 손가락질을 했다.
"이 사람아, 돈 잘 벌면 좋지, 안 좋아?"
거기까지 들었을 때 기적은 아버지가 많이 취하셨구나 하고만 생각했다.
돈하고는 원수라도 진 것처럼 멀리하는 아버지가 돈이 좋다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다음 말을 듣고는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취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형한테 다 양보했잖아. 그래서 기적이가 고생하는 게 다 내 탓 같아서 항상 미안했어. 바보 같은 아버지를 만나서 괜한 고생하는 것 같아서. 그런데 제 놈이 열심히 해서 돈도 잘 번다고 하니 얼마나 좋으냐 이 말이야."
이성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원망 많이 했을 거다. 바보 같은 아빠라고. 큰아버지는 떵떵거리며 사는데 바보 같은 아빠는 농사나 지으면서 산다고."
아버지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항상 강한 모습만 보였던 아버지였으니까.
하지만 바보 같다는 그 말은 틀렸다. 기적은 단 한 번도 아버지를 원망하거나 바보 같다고 여긴 적이 없었다.
오히려 항상 희생하고 양보하는 아버지를 보며 약자를 돕고 봉사하겠다는 희생정신을 배웠다.
그런 아버지가 없었다면 지금의 기적 또한 없었을지도 모른다. 오늘 제사를 지내러 가기 전에 했던 그 일도 아버지가 없었다면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바보 같다고 생각한 적 한 번도 없어요. 아버지는 항상 제 인생의 버팀목이자 따라가고 싶은 모토였어요. 돈이 없다고, 농사를 짓는다고 아버지를 원망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니까요."
이성진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지그시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그것까지는 알 수 없지만 한가지만큼은 확실했다. 이성진의 기분이 그리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실내가 조용해진 사이 자동차는 열심히 달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기적은 차에서 내렸고, 부모님께 인사를 건넸다.
"엄마, 조심해서 가세요, 도착하면 연락하고."
"그래. 네 아버지는 자는 건지 뭔지 아들이 가는데도 일어날 기미가 안 보인다."
기적은 슬쩍 아버지의 모습을 살핀 뒤 피식 웃었다.
"술 드셨으니 피곤하시겠지. 원래 아버지 성격이 그렇잖아. 아무튼 어여 내려가세요. 늦었어."
"그래, 우리는 이만 간다. 쉬어라."
곧 자동차는 둔중한 엔진음을 토해 내며 멀어져 갔다. 기적은 그 모습을 유심히 살피다 이내 뇌까렸다.
"내가 중학교 때 사셨으니까…… 벌써 뽑은 지 15년도 넘으셨나? 차가 많이 낡았네."
기적은 그 낡은 차가 부모님의 성격을 대변하는 것 같아 살짝 웃음을 머금었다. 긴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 * *
모처럼의 휴식을 바쁘게 보낸 기적은 다시 힐링 센터의 문을 활짝 열었다.
오늘은 힐링 센터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날이었다. 지난주부터 회원들에게 공지했던 대로 100% 예약제를 실시하는 첫날이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만 해도 기적은 괜히 잘되고 있는 센터를 예약제로 바꾸어 위기를 맞는 것은 아닐까 우려했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예약제로 운영된다는 말에 회원들은 오히려 반색을 했고, 빠르게 예약이 진행되어 오늘은 물론 이번 주의 타임이 절반 이상이 들어차 버렸다. 기적이 예상하지 못했던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물론 새로이 찾아오는 신규 회원들이 여전히 문제지만……."
그거라면 다다음주부터 함께하게 될 수정의 합류로 해결이 될 터였다.
그 덕분에 기적은 한결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일과를 시작할 수 있었다. 첫 예약 회원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매일 아침 9시 58분에 찾아오는 남중단이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모습으로 들어서는 남중단을 향해 기적이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오늘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데요?"
기적의 인사에 남중단이 새삼스러운 눈빛을 했다.
"내가 기분이 좋은 걸 어떻게 알았대? 정말 이상하고 신기한 사람이여, 자네는. 자네 혹시 도깨비 아니여?"
"에이 무슨 도깨비예요. 얼굴에 좋은 일 있다고 쓰여 있으신데요? 그러니까 알았죠."
"내 얼굴에 좋은 일 있다고 쓰여 있다고?"
자신의 얼굴에 어지간해서는 표정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남중단이었다.
그런데 얼굴에 좋은 일이 있다고 쓰여 있다니? 남중단은 그 말을 인정하기 힘들었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말을 이었다.
"참 별일이네.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닌데. 아무튼 좋은 일이 있는 것은 맞아. 당분간은 일을 안 해도 될 것 같아."
기적은 마침맞게 부팅된 컴퓨터를 조작해 음악을 재생한 뒤 입을 열었다.
"정말요? 혹시…… 후원자가 나타난 거예요?"
"그래, 맞아. 어제 저녁에 동사무소에서 연락이 왔지 뭐야? 달에 30만 원씩 후원하겠다고 하는 고마운 분이 나타났다고. 덕분에 한 숨 돌렸어. 너무 고마워서 인사라도 하고 싶은데 이름이 밝혀지는 것을 꺼린다나, 어쩐다나. 그래서 인사도 못 했지 뭐야."
기적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이야~ 진짜 다행이네요. 그러면 당분간 치료에 집중하면서 통증을 조절하면 되겠어요. 그죠?"
"맞아 맞아. 정말 다행이지. 역시 죽으란 법은 없나 봐."
뜻밖에 날아든 좋은 소식으로 인해 남중단의 기분은 좋아 보였다. 기적은 그 기분을 고스란히 치료로 가져가고자 했다.
"자, 그럼 좋은 기분 그대로 치료를 시작할까요? 이쪽으로 와 보세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고 치료를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기적의 의도는 적중했다. 좋은 기분이 신체 리듬에 영향을 준 것인지 남중단의 통증이 평소보다 쉽게 컨트롤되고 있었다.
"기분이 좋으셔서 그런가 효과가 좋네요. 매일 이렇게만 했으면 좋겠어요."
기적은 계속해서 긍정적인 코멘트를 해 주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러한 코멘트를 해 주는 것은 굉장히 중요했다.
말의 힘이란 상당한 것이어서 환자의 잠재력을 끌어내곤 하니까. 이는 산을 오르다 지친 사람에게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말하면 힘을 짜내는 것과 같은 원리였다.
"이렇게 해도 안 아프시죠? 오늘은 강도를 조금 더 높여볼게요. 무게도 조금 더 올리고요. 어때요? 이 정도까지 괜찮으세요?"
기적의 치료하에 남중단의 통증은 점차 좋아졌다.
치료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환자의 통증 수치가 감소합니다.
계속해서 남중단의 통증 수치가 내려갔고, 그렇게 30분의 치료가 끝났을 때.
-퀘스트 [어제보다 나은 오늘]의 달성도가 올랐습니다. 환자의 통증 수치가 16 감소했습니다. (55/100 → 39/100)
이전의 치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통증 수치가 급감했다. 들쭉날쭉하던 통증 수치가 처음으로 40 이하로 내려간 것이다. 이는 이번 퀘스트도 거의 끝을 향해 가고 있음을 의미했다.
그 덕분에 기적은 한결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치료를 끝마칠 수 있었다. 이리저리 몸을 풀고 있는 남중단을 보며 기적이 질문을 던졌다.
"어떠세요? 통증이 많이 없어지신 것 같지 않으세요?"
남중단도 자신의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는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러게. 몸이 아주 가뿐해졌어. 이렇게 움직여도 통증이 거의 없는 것 같고. 다 선생님 덕분이지 뭐. 그러고 보면 선생님이 복덩이야. 선생님을 만나고 나서 집안의 우환거리가 하나둘 사라지고 있으니 말이야."
기적은 아니라는 듯 손을 저었다.
"제 덕분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저를 만나고 좋은 일이 계속 생기신다니 저도 기분이 좋네요."
"자네 덕이 아니긴. 자네 덕도 분명히 있지. 아니 자네 덕이 아주 크지."
"그런가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보람도 있고요."
기적은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남중단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우스웠을까? 기적을 바라보던 남중단이 이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웃은 적 없던 남중단이 처음으로 웃음다운 웃음을 지은 것이었다.
이른 본 기적이 큰 소리로 외쳤다.
"어? 남중단 님 웃으시는 거 처음 봐요!"
그러자 남중단이 뭘 그렇게 놀라냐는 듯 기적을 나무랐다.
"나도 사람인데 웃을 줄 모르려고? 나도 웃을 때는 웃을 줄 알아. 그동안 웃을 일이 없으니까 웃지 못한 것이지."
"앞으로는 자주 웃으세요. 웃으니까 인상이 아주 좋으세요."
순간 남중단은 색다른 감정을 느꼈다. 인상이 좋다는 말, 정말이지 오랜만에 들어 보는 말이었다.
기적의 말에 남중단은 떠올렸다, 인상 좋다는 말을 무던히도 들었던 젊은 시절을.
'그때는 참 생글생글 웃고 다닌다는 말을 많이 들었었지.'
남중단은 어쩐지 콧잔등이 시큰해져 황급히 센터를 나섰다. 뒤에서 안녕히 가시라는 기적의 인사가 들려왔지만 남중단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뇌리에는 젊은 시절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기적의 말 한마디가 남중단으로 하여금 추억 여행을 떠나게 만든 것이었다.